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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라”

[편집자 주] 올해는 ‘해방 60주년’이 되는 해다. 그 동안 한국 현대사에 대한 해석은 미국과 소련에 대한 태도, 남한 정권 지지인가 북한 정권 지지인가 하는 점을 기준으로 나뉘어 왔다.
이것은 서로 거울 이미지일 뿐이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 분노, 저항이 부차적이거나 왜곡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한 입장과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 〈다함께〉는 한국 현대사의 주요 쟁점들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이 그 두번째다.

소련이 한반도에 막 진주했을 때 일화다. 민족주의 지도자 조만식이 소련군 사령관 치스차코프에게 “[당신들은] 점령군이냐, 해방군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치스차코프는 “난 잘 모른다. 내 뒤에 오는 정치위원에게 물어 보라”고 대답했다.

스탈린주의자들과 포퓰리스트들, 그리고 일부 자유주의자들은 정도 차이는 있지만, 소련군을 모종의 해방군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당시 스탈린의 심복이었던 몰로토프는 “외무장관으로서 나의 임무는 내 조국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 소련 보안경찰이 훗날 회고하듯이 “세계 공산주의 혁명에 대한 선전은 세계 지배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은폐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막”에 지나지 않았다.

“이데올로기적 장막”을 걷어 내면, 북한 진주 소련군의 성격은 남한 점령 미군과 다르지 않았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조선인들의 자생적인 자치기구를 허용하지 않았다. 물론 이것은 배제와 포섭의 과정이었다.

미국은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친일·친미·반공주의자들을 하위 파트너로 삼았다. 이것은 당시 남한 민중들의 정서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압도적인 사람들이 장차 건설될 국가에서 ‘친일파가 배제’돼야 한다고 답했다. 또한, 80퍼센트에 가까운 사람들이 새로운 국가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형태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련 역시 민족주의 세력이 강력했던 평양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인정하지 않았다. 대신 그들은 건준을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했고, 여기에 ‘공산주의자’들을 끼워넣어 좌·우 세력균형을 동수로 조정했다.

조선공산당이 주도한 서울의 인민공화국은 대중조직을 상당수 포괄하고 있었지만, 소련과 미국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다.

1945년 10월 10일 미군정은 인민공화국을 “고관대직을 참칭하는 … 흥행적 가치조차 의심할 만한 괴뢰극을 하는 배우 … 그 연극을 조종하는 사기꾼”이라고 비난하면서 해체를 경고했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인민공화국 만세”를 외쳤던 김일성 역시 11월 15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에서는 말을 바꿨다. “한 마디로 말하여 인민공화국은 소수 특권계급을 위한 반인민적인 부르죠아 정권이라고밖에 인정할 수 없습니다.”

김일성의 비난은 완전히 불공정한데,왜냐면 김일성도 스탈린의 규정에 따라 당면 혁명의 과제를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규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헌영이 주도한 조선공산당과 인민공화국의 잘못은 오히려 스탈린의 지침을 너무도 충실히 따른 데 있었다. 그들은 스탈린의 지침에 따라 미군정과 가망 없는 협력을 추진했고, 자본가들에게 양보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이 급진화하는 것을 억제하는 데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인민공화국이 졸지에 ‘반인민적 부르주아 정권’이 된 것은 소련의 이해관계 때문이었다. 이것은 소련 총영사관의 도서실장 샤브시나가 “인민공화국은 조선혁명의 토대가 북한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고 비판한 데서 함축적으로 드러난다. 이른바 ‘민주기지론’이 그것이다.

친북 좌파는 대체로 분단의 원인을 남한과 미군정에게만 돌리고 있지만, 사실 ‘민주기지론’ 역시 분단 정책이었다. 소련은 일찌감치 이것을 암시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26일 치스차코프는 성명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신정권이 각 도에 성립한 후 통일된 정부를 세운다. 단 신정부의 소재지는 경성에 한하지 않는다.”

아이작 도이처는 ‘민주기지론’과 같은 정책을 ‘일지역사회주의’로 규정했는데, 이것은 한반도에서 두 가지를 뜻했다.

하나는 서방과 협상하기 위해 자신의 체제를 남한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자신이 확보한 북한 지역에서 신속하게 자신의 체제를 심어 놓는다는 것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조선공산당의 ‘북부조선 분국’의 설치와 ‘5도 행정10국’은, 친북 좌파들이 주장하듯이 단순한 행정편의에 따른 것이 아니다.

5도 행정10국은 소련군에 의해 소집됐을 뿐 아니라 명령계통 상으로도 ‘소련 민정부’의 지시를 받았다.

강정구 교수는 “소련은 남한의 점령군과는 달리, 직접적인 통치행정을 구사하지 않았다”며 소련의 상대적 진보성을 얘기한다.

그러나 소련 민정부는 소련군 제25군 소속 군사회의의 산하기구로서 사실상 군정과 다르지 않았다. 더욱이 지방 인민위원회는 민정부를 거치지 않고 25군 직속의 위수사령부 명령을 따라야 했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점령지의 지배를 위해, 종전과 함께 와해된 폭압적 국가기구를 재건하고 강화했다.

1945년 10월 12일 〈북조선 주둔 소련25군사령관의 성명서〉에서는 “반일당과 민주주의단체들은 자기의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지방자치기관과 군경무사령관에 등록돼야 하며, 동시에 자기의 지도기관의 인원명부를 제출할 것”과 “북조선지역 내에 있는 모든 무장대를 해산시킬 것. 모든 무기 탄약 군용물자들을 군경무사령관에게 바칠 것”을 명령하고 있다. 이것은 미군정의 〈정당은 오라〉와 9월 27일의 〈법령 제 5호〉와 거의 똑같은 조치였다.

미·소 양 점령군은 이를 통해 강력한 사회 통제를 기도했고, 자생적으로 발전한 각종 무장조직들을 금지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했다.

이에 따라 남한에서는 좌파계열 무장조직인 조선국군준비대가 강제 해산당했다. 당시 조선국군준비대는 “인민에 의한 인민의 무장”을 표방하던 단체였는데, 예비군 10만 명, 상비군 1만 5천 명을 보유한 최대 무장조직이었다.

해방 당시 총독부의 조선인 경찰관 수는 8천 명 정도였는데, 해방 직후 이들 중 대부분이 도주해 출근율이 20퍼센트도 안 됐다. 미군정은 이들에게 복귀할 것을 명령했고, 경찰력은 3개월 만에 1만 5천 명으로 급격히 증강됐다.

북한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공산당이 주도하는 적위대까지 해산당했다. 무장력은 보안대로 집중됐고, 김일성을 중심으로 한 권력의 핵심부는 이런 경찰기구를 통해 지방까지 권력을 장악해 나갔다.

또한, 남북한 모두는 일찌감치 독자적인 정규군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는 1946년 군대간부 교육기관의 효시인 평양학원이 만들어졌다. 이것은 “남한군 창설인자 및 장교 육성의 중추 역할을 할” 남한의 군사영어학교의 개설시기와 일치한다.

즉, 남과 북 모두에서 미군과 소련군은 자신에게 유리한 분단 정권을 창조해 갔던 것이다.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이 남기고 간 공장과 작업장을 자신들의 공동 관리로 접수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남과 북의 점령군 모두는 노동자들의 급진적 진출도 탄압했다.

미군정청은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의 생각은 모든 일본인 재산을 자신들이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군정청은 이러한 생각을 고치게 하는 수단을 사용했다.” 그래서 그들은 사실상 파업권을 부정하는 법령19호를 발효했고, 자주관리운동을 탄압했다.

이것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스탈린은 “현지 주민들로 하여금 평화적 노동을 계속하고, 산업 및 상업 기업 그리고 공영 및 기타 기업의 정상적인 작업을 보장하며, 소련군 당국의 요구와 명령을 이행”하게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자주관리 운동은 “좌경적 오류” 또는 “조합주의”로 비난받고 억압받았다.

남과 북 모두에서 점령 당국의 식량공출에 저항하는 농민 폭동이 일어났다.

북한에서는 소련군의 군표가, 남한에서는 미군정이 일본 총독부의 화폐 남발을 방조해 폭발적인 물가인상을 부추겼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종전보다 하락했다.

북한은 소련군 주둔비용의 상당 부분을 부담해야 했는데, 이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세출액의 거의 9퍼센트에 달했다.

이밖에도 소련은 북한에 있는 주요 공업설비들을 대일본전 배상금 명목으로 반출해 갔다. 북한 산업에 대한 국유화 조치는 소련의 반출이 마무리될 때까지 미뤄졌다. “국유화된 인민의 재산을 훔쳐가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역사가 노만 나이마크는 “동독의 여성들은 서구에서는 대부분 알려지지 않았던 경험, 즉 오랜 기간에 걸친 폭력의 만연과 강간의 현실을 경험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남한에서 미군정에 대한 민중 저항이 정당한 것처럼, 소련군에 대한 북한 민중의 저항도 정당하다.

신의주와 함흥에서 일어난 학생 시위는 점령군의 이런 만행에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물론 이들 시위에서 종종 지주와 우익들이 지도부 구실을 하곤 했다.

그래서 서독에 진주해 있던 미군 장군 클레이의 진술은 시사적이다. “(동독 사람들에게) 우리는 천사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우리가 천사였기 때문이 아니라, 동구에서 진행되는 상황과 비교해서 볼 때 우리가 그렇게 보였기 때문이다.”

소련 점령에 대한 반대를 종종 우익들이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소련군의 점령 정책과 그로부터 독립적이지 못했던 스탈린주의자들에게 있다.

당시 조선의 민중들에게 널리 퍼졌던 유행어는 진정한 좌파적 대안이 무엇이 어야 했는지 알려 준다.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