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가 당선한 이유에 대한 가장 흔한 설명은 ‘인종차별적·성차별적 백인 중하위층’이 새로이 대거 분출했다는 것이다.

트럼프 당선으로 인종차별적 우파들이 기세 등등해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제 그림을 보면 상황이 단순치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선거에서 트럼프가 얻은 백인 표는 5천1백만 표로, 전체 백인 유권자의 25퍼센트 미만이다. 이 수치는 2008년 매케인(5천3백50만)이나 2012년 롬니(5천5백만)가 득표한 것보다 수백만 표 적은 것이다. 인종차별적 백인들이 갑자기 늘어난 것이 아니다.

저소득층 지지가 몰리지도 않았다. 연소득 5만 달러 이하 중하위층에서나 3만 달러 이하 빈곤층에서 모두 트럼프 지지는 힐러리 클린턴보다 10퍼센트포인트 낮은 40퍼센트 대 초반의 지지를 받았다.

공화당 텃밭인 남부와 일부 중서부 지역에서 득표가 는 것도 아니다. 트럼프는 이 지역들에서 1천8백만 표를 얻었는데, 이는 지난 두 대선 때 공화당이 얻은 표와 거의 같은 숫자다. 전국 득표(5천9백만여 표)도 마찬가지다.

지난 대선과 가장 크게 달랐던 점은 민주당의 오랜 ‘텃밭’이었던 오대호 연안의 옛 제조업 지역들(위스콘신·미시건·인디아나·펜실베니아·오하이오)에서 민주당 지지 노동자 표가 크게 줄어든 것이다. 8년 전 오바마에게 투표했었던 이 지역 노동자의 20퍼센트가 이번에는 트럼프를 찍거나(약 90만 명) 기권했고(약 1백40만 명), 공화당은 레이건 이후 처음으로 이 지역들에서 다득표 정당이 됐다. 선거인단을 2백70석 확보하면 이기는 선거였는데, 상대방의 안방에서 무려 75석을 빼앗은 것이다.

이 지역에서 트럼프 지지로 넘어간 표보다 기권표가 많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그곳 노동자들은 지난 수십 년간 민주당을 지지했지만, 이번에는 미국 노총 AFL-CIO의 투표 지침에도 불구하고 노조원과 그 가족의 절반만이 클린턴에 투표했다. 오바마 임기 8년 동안 산업 구조조정과 공장 역외 이전 때문에 실업률·빈곤율이 크게 오르고 실질임금·복지가 삭감된 것 때문이었다.

본지가 9일 논평(‘미국 대선: 트럼프의 승리라기보다는 클린턴의 패배 ─ 미국 주류 정치도 시궁창임을 보여 주다’)에서 지적했듯, 트럼프가 얻은 것이 아니라 클린턴이 잃은 것이 결정적이었음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불평등과 양극화, 쓰라린 기성 정치 거부 정서

클린턴이 대자본, 월가, 군부 대다수가 지원한 후보임이 너무나도 명백했기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는 트럼프에 맞서 클린턴이 “미국은 이미 위대하다”고 말할 때, 오랫동안 불평등과 생활수준 하락에 시달려 온 노동계급 사람들 수천만 명은 분노를 금치 못했다. 특히 오바마 임기 8년 동안 노동자 실질 소득은 하락한 반면 기업들은 ‘구제’ 금융을 수조 달러 챙기는 등 양극화가 더 심해졌다.

바로 이것이 미국 사회를 관통하는 핵심 쟁점이었다. (‘점거하라’ 운동의 주요 쟁점이 ‘1퍼센트 대 99퍼센트’의 양극화였음을 떠올려 보라.) 이번 선거에서도 도시 유권자의 53퍼센트, 교외 유권자의 71퍼센트가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잘못된 미국 경제”를 꼽았다. 새 대통령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미국 경제를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38퍼센트나 됐다.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버니 샌더스가 민주당 경선에서 1천3백만 표를 얻었던 것도 주로 양극화를 문제 삼아 클린턴을 왼쪽에서 비판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샌더스가 자신이 그토록 비판했던 ‘1퍼센트 후보’ 클린턴을 지지하면서, 좌파적 대안 쪽으로 견인될 수 있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결집할 구심이 사라졌다. ‘밀레니얼 세대’(18~35세)의 다수는 투표도 하지 않았다.

다른 소수는 ‘썩은 똥자루’라도 들고 내리치겠다는 심정으로 ‘아웃사이더’를 자처한 트럼프에 투표했다. 이것은 전혀 필연이 아니었다. 트럼프에 투표한 사람의 20퍼센트가 ‘트럼프가 싫지만 그를 찍었다’고 답했다. 기성 정치에 대한 뚜렷한 좌파적 대안이 없었기 때문에, 민주당 경선 때는 샌더스 지지가 높았던 오대호 연안 주들(미시건·위스콘신·인디아나)에서 기성 정치 거부 정서가 트럼프 다득표로 표현된 것이다.

미국인 81퍼센트가 클린턴을 믿을 수 없다고 봤다. 이런 지독한 불신 때문에, 트럼프의 성차별·성추행 폭로에도 불구하고 백인 여성 투표자의 53퍼센트, 라틴계 여성 투표자의 26퍼센트가 트럼프를 찍었다. 클린턴은 영부인 시절에는 낙태권 보장과 동성결혼 합법화에 반대하다가 이제 와서 여성해방의 대변자인 체하니 신뢰가 갈 리 만무했다. 오죽하면 트럼프조차 ‘당신(클린턴)은 지난 30년 동안 무엇을 했냐’며 비아냥거릴 정도였다.

트럼프가 경찰의 흑인 살해를 노골적으로 옹호했기 때문에 흑인 여성들은 트럼프를 거의 지지하지 않았다(4퍼센트). 그러나 클린턴도 경찰력 강화를 단호히 옹호했기 때문에 2008년에 오바마를 찍었었던 흑인 여성 1백50만 명이 기권했다. 흑인 전체를 봐도, 35~54세 흑인들의 거의 1백 퍼센트가 오바마에 투표했던 것에 비해 같은 층에서 클린턴 지지는 그보다 많이 낮았다(80퍼센트).

이렇듯 기성 정치의 충실한 대변자 클린턴은 모든 면에서 최악의 후보였다. 그토록 트럼프의 역겨움이 부각됐는데도 ‘클린턴이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는 사람이 59퍼센트나 됐던 이유다. (그러나 이들의 다수는 트럼프도 지지하지 않았다.)

배신과 저항

오바마 정부 8년 동안 평범한 미국인들의 변화 염원이 좌절된 까닭에, 그리고 그에 대한 좌파적 대안 구축이 실패했던 탓에, 유권자의 75퍼센트가 반대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사기꾼 ‘아웃사이더’ 트럼프의 허황한 공약에 일말의 기대를 건 사람들은 철저히 배신당할 운명이다.

트럼프는 경제 공약으로 소득세·기업세 대폭 감면, 수입품 관세 부과를 통한 ‘일자리 살리기’를 내놓았다. 실현 가능성도 낮지만 설령 실현된다 하더라도 그 최대 수혜자는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최상위 부유층일 것이다.

트럼프의 정책대로라면 평범한 미국인들의 소득세가 7퍼센트 감면될 수 있지만, 최상위 부유층은 19퍼센트의 소득 증대 효과를 볼 것이다. 또, 대규모 감세에도 불구하고 균형재정을 유지하려면 지출을 20퍼센트 가까이 삭감해야 하는데, 가뜩이나 부족한 교육·의료 등 복지 예산이 가장 먼저 도마에 오를 것이다.

그렇잖아도 경제 위기가 끝나지 않은 데다 미국 기업의 이윤율이 여전히 낮은 상황에서 트럼프가 기동할 여지는 오바마보다도 적다.

이와 동시에, 저항도 분출할 수 있다. 조짐은 당선 첫날부터 보였다. 트럼프 당선에 분노한 노동자·학생 들이 미국 전역에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고등학생들이 동맹휴업을 벌였고, 뉴욕과 시카고에서는 노동자·청년 수만 명이 행진했다. 이들은 11월 13일(일) 전국 곳곳에서 동시다발 시위를 벌일 예정이다.

미국에서는 지난 몇 년 동안 ‘점거하라’ 운동, 노동자 투쟁, 인종차별 반대 운동 등 적잖은 저항이 있었다. 지금 드러나는 분노 정서가 이런 운동과 잘 연결된다면 머지않아 저항이 확대될 여지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 좌파들의 구실이 중요하다. 좌파들은 문제의 일부인 민주당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일터와 거리에서 진정한 좌파적 대안을 건설할 전략을 추구해야 한다.

제국주의적 갈등을 악화시킬 트럼프

국내 일각에서는 소수이지만, 트럼프의 ‘고립주의’가 한반도에 좋은 영향을 줄 수도 있다고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의 각료로 물망에 오르는 인사들을 훑어보기만 해도 이런 기대가 무망함을 알 수 있다.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되는 존 볼튼은 부시 행정부에서 국무부 차관을 지냈던 주요 네오콘(1968 운동의 패배를 밟고 1970년대 말에 등장한 새 우익)이고, 대표적 보수 싱크탱크 헤리티지 재단이 트럼프의 정권 인수를 뒷받침하고 있다. 재무장관 후보들은 골드만삭스·포브스 등 금융기업 출신 인사들이다.

대외 정책에 관해서라면 트럼프 자신도 “힘을 통한 평화”(레이건 정부의 표현이다)를 말해 왔다. 트럼프는 당선 전부터 중동에 대한 강력한 군사 개입을 공언했으며, 최첨단 미사일방어(MD)시스템을 개발하겠다고 천명했다. 여기에 당선 직후 박근혜와의 전화 통화에서 한미동맹 강화로 북한에 강경 대응하겠다고 밝혔음을 생각해 보면, 트럼프가 제국주의적 공세를 지속시키고 강화할 것임을 분명히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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