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7시간’이란 박근혜가 세월호 참사 당일 최초 지시를 내린 것으로 알려진 오전 10시 15분부터,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처음으로 얼굴을 드러낸 오후 5시 15분까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11월 19일 4차 범국민행동의 사전대회로 ‘박근혜 7시간 시국강연회’가 열리고, ‘뉴스룸’과 ‘그것이 알고 싶다’가 세월호 7시간을 파헤치는 등 세월호 쟁점이 퇴진 운동 속에서 주목받고 있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가만히 있으라", 진실을 요구하는 운동에는 "알려고 하지 마라"

11월 19일 청와대는 웹사이트에 “세월호 7시간, 대통령은 어디서 뭘 했는가 ― 이것이 팩트입니다”라는 글을 게시했다. 청와대 해명에 따르면, 같은 시각 박근혜는 집무실이 아닌 관저에 있었다. 박근혜는 오전 10시에 세월호 관련 서면 보고를 받은 뒤 10시 15분과 10시 22분에 최초 지시를 내렸다. “철저히 구조하여 단 한 명의 인명 피해도 발생하지 않도록 하라”는 게 다였다.

그러나 이미 그 시각 세월호에서는 생사가 갈리고 있었다. 10시 21분, 죽을 힘을 다해 스스로 기어 나온 여학생이 이 참사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10시 30분에 세월호는 완전히 뒤집힌 채 3백4명의 희생자와 함께 가라앉고 있었다.

박근혜는 참사가 발생한 시각(오전 8시 49분)으로부터 8시간이 지나서야 대중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구명조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그때까지 학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 위에 둥둥 떠있는 줄 알았다는 것이다.

3백4명의 생때같은 목숨들이 배 안에 갇혀 열 손톱이 부러지도록 유리를 긁고 있던 시간에 박근혜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온 나라가 각자의 일상을 뒤로 한 채 간절한 마음으로 하루 종일 생방송만 보고 있을 때 박근혜는 도대체 뭘 하느라 상황을 그토록 몰랐을까?

청와대 해명을 곧이곧대로 믿는다 해도, 박근혜는 계속 관저에서 서면이나 전화로 보고를 받기만 했을 뿐 아무 일도 안 했다. 세월호 7시간 동안 박근혜에게 들어간 보고들은 ‘대답 없는 메아리’였다.

박근혜가 ‘세월호 7시간’ 동안 관저에서 뭘 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하지만 박근혜가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써 가며 차움의원을 이용했고,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차움의원이 박근혜의 주사제를 최순실에게 대리 처방해 줬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굳이 숨겨 가며 받아야 할 치료’가 무엇이었는지, 혹시 세월호 참사 당일에도 그 치료를 받느라 대응에 소홀했던 것은 아닌지, 의혹은 점점 더 증폭되고 있다. 그동안 4월 16일 당일 병원을 휴진하고 골프를 쳤다고 해명해 온 김영재 성형외과 의원 원장이 참사 당일 프로포폴을 사용했다는 장부가 나오기도 했다.

피하고 싶었던 상상이 점차 현실로 다가올수록 유가족들이 느끼는 심정은 참담하다. “여성 대통령에게 결례라 물어볼 수 없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버티는 전 비서실장 김기춘을 보는 심정은 그 이상의 참담함과 분노를 가져다 준다. 전 민정수석 김영한의 비망록에 따르면, 김기춘은 2014년 7월 18일 수석비서관들에게 “대통령의 4월 16일 동선과 위치에 관해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박근혜와 청와대에게 세월호 7시간은 ‘낙타의 등뼈를 부러뜨릴 마지막 지푸라기’일 수도 있다. 그래서 기어코 진실을 감추려 할 것이다. 세월호 인양을 연기한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박근혜 퇴진 운동의 바다로 진수하기 시작했다. 사실 박근혜 퇴진 운동의 초기부터 세월호 운동이 함께했다. 세월호 참사도 박근혜 정부의 정치적 부패가 한 원인을 제공한 것이기도 하다.

국회의 지리한 교섭이 아니라 거리의 운동이 떠오를 때가 세월호의 진실을 규명할 절호의 순간이다.

ⓒ조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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