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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델 카스트로 : 1926~2016:
제국주의에 맞선 투사이자 억압적 국가의 지배자

1953년에 청년 피델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 습격 혐의로 법정에 섰을 때, 이렇게 선언했다. “나에게 유죄를 선고해도 상관 없다. 역사가 나를 무죄로 하리라.”

6년 뒤 카스트로는 쿠바 총리가 됐고, 49년 동안 정부 수반을 지내다가 2008년 정계에서 공식 은퇴했다.

카스트로는 한편으로는 미 제국주의에 결연히 맞서 미국의 콧대를 꺾은 자유 투사로,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적이고 불평등한 사회의 지배자로 기억될 것이다.

1978년 쿠바 아바나에서 연설하는 카스트로. ⓒMarcelo Montecino/Creative Commons

1926년에 태어난 카스트로의 성장기에 쿠바는 사실상 식민지와 다를 바 없었다. 스페인의 식민 지배는 1898년에야 끝났는데, 부분적으로는 미군이 개입한 결과여서 ‘독립’ 후 미군의 군정이 실시됐다.

새로 제정된 쿠바 헌법에 따라 미국은 자기 이익이 위협받을 때는 언제든 쿠바에 개입할 수 있었다. 관타나모 만은 미군 기지로 “임대”됐는데, 오늘날까지도 여기에는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수용소가 있다.

쿠바의 토지를 대부분 사들인 미국 기업들은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편중된 쿠바 경제가 저발전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쿠바는 미국의 라틴아메리카 지배 체제의 일부였다. 미국 기업들은 라틴아메리카의 자원을 강탈했다. 예컨대, 유나이티드프루트 사는 과테말라를 “바나나 공화국”으로 만들었고, 대형 구리 회사들은 칠레의 광산에서 수많은 광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폭력

미군의 폭력과, 미국이 후원한 라틴아메리카 독재자들이 이 같은 강탈을 뒷받침했다.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이를 두고 “몽둥이 정책”이라고 불렀다.

피델 카스트로는 이 같은 미 제국주의에 분노해 결연히 맞서 싸운 중간계급 학생 민족주의자 중 하나였다. 카스트로는 무장 저항에 주안점을 뒀는데, 이런 무장 저항은 불가피하게 소수의 음모자 집단이 도모할 수밖에 없었다.

몬카다 병영 습격 혐의로 재판을 받은 후 카스트로는 쿠바 내 반정부 세력의 지도적 위치로 급부상했다. 카스트로는 몬카다 병영 습격 날짜를 따서 자신의 조직 이름을 ‘7·26 운동’으로 정했다.

그러나 조직원이 겨우 1백40명밖에 안 돼 습격은 실패했고, 습격 도중 절반 가까이 죽었으며 카스트로 자신은 2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 사면으로 풀려났다.

다른 저항 세력도 [바티스타 정부를 붕괴시키는 데] 실패했던 까닭에, 유일한 대안은 카스트로의 전술밖에 없는 것처럼 보였다.

당시 대통령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1952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대통령] 선거를 중단시키고 야당을 해산해 버렸다.

일찍이 1933년에 대규모 파업과 시위가 벌어져 쿠바 노동계급의 힘이 드러난 적 있었다. 그러나 쿠바 공산당은 바티스타 1기 정부[1940~44]에 참여해서 노동자 투쟁을 말아먹었고 급진화한 한 세대 전체에게 신뢰를 잃었다.

쿠바에는 다른 무장 저항 세력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지도자들이 바티스타 정권에 살해당하자, 카스트로는 교묘한 책략을 부려서 자신과 ‘7·26 운동’이 [쿠바 무장 저항 세력들의] 지도부 구실을 하도록 만들었다.

1956년 11월 카스트로는 쿠바 출신 망명자들(과 아르헨티나인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이 탄 배를 이끌고 멕시코에서 쿠바로 진격했다. 카스트로는 쿠바 민중이 들고 일어나 자신들을 환대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카스트로와 함께 배를 타고 온 사람들은 대부분 살해당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소수는 쿠바의 산악 지대에서 기나긴 게릴라 투쟁에 돌입했다. 농민들의 도움 덕분에 이들은 전투에서 이기고 인원도 보충할 수 있었다.

바티스타 정부에 맞선 운동이 쿠바의 도시 지역에서도 분출해, 총파업과 선거 보이콧 등이 벌어졌다. 날이 갈수록 증오의 대상이 된 바티스타 정권은 안에서부터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고, 미국의 지원도 시들해졌다.

카스트로는 게릴라 투쟁으로 얻은 명성을 활용해 반정부 세력의 지도자 위치를 굳건히 했고, 바티스타 정권이 무너지면 권력을 잡을 유일한 세력은 자신의 군대뿐임을 확실히 했다.

이들의 싸움은 영웅적 투쟁이었지만,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주창한 공산주의 혁명은 결코 아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주의의 핵심 원칙이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쿠바 혁명에서, 카스트로와 그의 동맹 세력들은 노동계급의 구실을 게릴라 투쟁 지원으로 제한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1959년 1월 바티스타가 몰락하면서 사기가 오른 노동자들은 급진화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노동자들의 급진화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2월 카스트로는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 “노동계급 집회에서 나오는 구호와 요구들은 혁명 전의 [바티스타] 정부 때와 비슷하다.

“대중은 현 정부가 자신들의 정부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도 정부와 인민이 일치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억누름

1년 남짓 지나자 카스트로는 노동조합 안에서 되살아나는 민주주의를 억눌렀고 정부에 반대하는 언론들을 폐쇄했다.

새 정부는 농민들에게 약속한 토지 개혁을 시행하는 한편, 미국이나 쿠바의 부유층과 타협을 모색했다. 그러나 미국과 쿠바 부유층의 비타협적 태도 때문에, 쿠바 정부는 급진화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우익 반군을 무장시켰고 쿠바산 설탕 구매를 중단하겠다고 협박했다. 미국의 동맹국들이 쿠바에 무기와 생필품을 팔지 않았으므로 결국 쿠바는 그것들을 소련에서 수입하게 됐다. [쿠바 내의] 미국계 정유 기업들이 소련산 원유의 정제를 거부하자, 카스트로는 그 정유 기업들을 국유화했다.

미국이 강요한 금수 조처 때문에 평범한 쿠바인들이 수십 년 동안 곤경에 시달려야 했다. 미국의 첩자들은 쿠바에서 테러를 저질러 민간인들을 살해했다.

심지어 존 F 케네디 정부 시절 CIA는 쿠바계 우익 반군들을 동원해 피그스 만을 침공하기도 했다.

1961년 피그스 만 침공은 5년 전 카스트로의 쿠바 상륙 때만큼이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카스트로의 쿠바 상륙이 바티스타 정부에 대한 저항의 촉매가 됐다면, 미국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피그스 만 침공]은 카스트로 지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미국이 지원한 쿠데타들 때문에 끔찍한 참상이 벌어졌다는 것은 이미 전 세계가 아는 사실이었다. 특히 1954년 과테말라 쿠데타는 유명하다. 개혁파 대통령 하코보 아르벤스를 실각시키기 위해 미국은 과테말라 수도를 폭격하고 군대를 파병했다.

만약 쿠바에서도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1973년 칠레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을 것이다. 칠레에서는 미국의 지원을 받은 군 장성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켜 수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그러나 쿠바는 미국을 꺾을 수 있음을 보여 줬다. 그것도 미국 해안에서 고작 8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카스트로는 1961년 12월 사회주의를 선포했다. 집권 3년 만이었다. 그가 이렇게 행동한 데는 두 측면이 있었다.

한편으로 카스트로는 반제국주의 발언의 수위를 높였다. 카스트로는 아메리카 대륙 전역의 빈민들에게 영감을 줬고, 체 게바라가 “혁명을 확산”시키게끔 고무했다.

후일 카스트로는 아프리카 남부의 국가들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맞서 싸우는 투사들에게 지지를 보내고 병력을 지원했다.

그러나 냉전으로 전 세계가 양분돼 있었기 때문에,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쿠바’ 선포는 한 강대국[미국]에 맞서 다른 강대국[소련]과 손을 잡는다는 것을 뜻했다. 처음에 카스트로는 마지못해 소련과 손을 잡았지만, 소련과의 동맹은 점점 카스트로 정부의 핵심 노선이 됐다.

쿠바는 소련과 손잡은 덕에 CIA가 획책한 쿠데타를 분쇄할 수 있었지만, 그 대가로 핵무기 경쟁에서 장기판의 졸 신세가 됐다. 미국의 무역 봉쇄에서 살아남으려면 동구권의 조잡한 상품을 사는 것 말고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공업 발전을 추진하지 못하고] 설탕 수출에 계속 의존해야 했다.

카스트로가 1965년 새로 창당한 공산당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투쟁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위로부터 국가를 통제하기 위한 도구였다.

옛 쿠바 부자들 중 다수는 미국으로 망명했다. 쿠바에서는 (노동자 권력이 아니라) 국유화를 바탕으로 새로운 지배계급이 생겨났다.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은 전혀 도전받지 않았다. 착취는 계속됐고, 착취에서 비롯한 억압도 계속됐다.

문맹률은 크게 낮아졌지만, 주거 환경은 여전히 열악했고 임금도 낮았다. 특히, 흑인들은 여전히 제도적 인종차별에 시달렸고, 소련 붕괴 후 경제 위기가 닥친 1990년대의 “특별한 시기”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쿠바 국가가 의료를 발달시킨 것은 분명 칭송할 만하다. 그러나 그 수혜자는 쿠바 빈민이 아니었다. 쿠바는 발달한 의료 시스템을 주로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했는데, 예컨대 베네수엘라 산 석유를 받는 대가로 쿠바 의사를 파견하는 식이었다.

1979년까지도 쿠바에서 낙태는 범죄 행위였다. 가정 폭력은 암묵적으로 용인됐다. 심지어 오늘날에도 여성들은 [취업] 기회가 마땅치 않아 성매매 산업으로 유입되는데, 성매매는 쿠바 관광 산업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다.

카스트로는 성소수자를 대거 체포하고, “비정상인들”을 강제 노동 수용소에 보내고, ‘여성스럽다’고 판단된 소년들에게 특수 교육을 강요하는 등 성소수자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그 절정은 1980년 이후 1만 명이나 동성애자들을 추방한 것이었다.

해빙

카스트로가 정계에서 은퇴하(고 미국과 관계가 풀리)자 카스트로의 후계자들은 카스트로가 시작한 체제 전환, 즉 냉전 시기의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 지향 체제로의 전환에 박차를 가했다.

그들은 중국의 길을 따라 막대한 이윤을 벌어들이면서도 반대파를 계속 억누르고자 한다. 그들이 성공한다면, 중국 지배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경제가 성장할수록 노동계급의 규모와 투쟁 잠재력도 더 커지는 상황에 직면할 수 있다.

쿠바에서 진정한 사회주의의 희망은 바로 그 노동자들에게 있다.

[전 세계의] 위선적인 지배계급은 카스트로를 비난하고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 그들은 카스트로가 자신들의 약점을 만천하에 드러냈는데도 그를 짓밟지 못했기 때문에 그를 증오한다.

피노체트의 파시즘적 쿠데타를 후원했고 오늘날 잔악한 사우디아라비아 정권을 비호하는 자들이 카스트로를 살인마 독재자라고 비난할 것이다.

카스트로는 그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고 전 세계의 저항 세력과 반제국주의자들을 고무했다. 미국의 보복 시도에 맞선 카스트로의 저항은 지지받아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카스트로가 공산주의 사상을 악용해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한 것은 무죄로 될 수 없다.

카스트로가 대변자를 자처한 ‘사회주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카스트로가 했던 것 같은] 위로부터의 국가 통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자주적 행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