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1917년 혁명의 무대는 그보다 12년 전에 세워졌다. 레닌이 “예행 총연습”이라고 불렀던 1905년 혁명이 그것이다. 

1905년에는, 러일 전쟁에서 러시아의 패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차르 정권이 패전으로 망신살이 뻗칠수록 국내에서도 비판에 취약해졌다.

불만에 찬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들이 저항에 나설 것으로 기대됐다. 이들은 봉건적 토지 생산보다 자본주의적 공장 생산을 통해 부자가 된 자들이었다.

서구의 선출된 정부와 비교해 봤을 때, 이들의 눈에 비친 차르 전제정은 러시아의 발전을 가로막는 구시대의 유물이었다.

그렇지만 이 부르주아지들은 겁 많고 소심한 자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들은 용감히 싸우는 학생들을 외면했고, 결국 학생들은 고립됐고 패배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새로운 계급, 즉 노동자 계급이 생겨났다. 이들은 공장에 집중돼 점차 파업에 나서고자 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자유주의자들의 민주적 헌법 제정 요구에 공감했다. 하지만 노동자들에게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자들의 부와 영향력의 원천인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서는 수단이기도 했다.

1904년 12월에 수도 페테르부르그의 푸틸로프 기계 공장에서 노동자 4명이 해고됐다. 반(半) 공식적인 “조합”에 가입했다는 이유였다.

노동자들이 가입한 이 “조합”은 게오르기 가폰이라는 특이한 인물이 이끌고 있었는데, 그는 성직자이자 선동가인 동시에 경찰 첩자였다.

푸틸로프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3백82개 공장의 노동자 15만 명이 도시 전역에서 벌이는 투쟁으로 번졌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전기가 끊기고 신문 제작이 중단됐다. 

노동자 약 13만 명이 임금 인상, 노동조합 합법화, 정치 개혁 등을 요구하는 가폰의 청원서에 서명했다.

1월 22일[구력 1월 9일] 일요일에 가폰은 노동자들을 이끌고 평화적인 행진을 시작했다. 이들은 성상(聖像)을 들고 “신이시여 황제를 지켜 주소서” 라는 노래를 부르며, 차르의 “자비와 보호”를 간청했다. 

차르 전제정은 이들의 호소에 총알로 응답했다. 4천 명이 죽었다. 차르가 압제의 우두머리라는 것이 노동자들에게 분명해졌다.

병사들이 행진하던 노동자들을 향해 발포해 수천 명이 죽었다.

이후 3개월 동안 파업이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됐다. 차르 정권은 노동자와 농민을 대거 처형하고, 감옥에 가두고, 추방했지만,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다. 

여름에는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억압 받는 민족들도 들썩이기 시작했다. 당국의 묵인 하에 극우 단체들이 유대인들을 대거 학살했다.

그해 10월, 노동자들은 훨씬 강력한 파업을 벌였다. 노동자들은 개혁을 요구하는 정치 총파업에 나섰다.

파업을 강화하고 확대·조정하기 위해, 페테르부르그의 노동자들은 각 작업장에서 선출된 대표자들로 구성된 노동자 평의회, 즉 소비에트를 만들었다.

파업으로 나라가 마비되자, 많은 도시에서 소비에트가 실질적 권력이 됐다.

소비에트는 “이동식 인쇄소”를 운영해 전제정의 검열을 따돌렸다. 활동가들이 인쇄소로 쳐들어가 경영진을 “체포”하고 그곳을 차지했다. 그러면 파업 중인 발전소 노동자들이 전기를 다시 켜 소비에트 신문이 인쇄되도록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혁명 세력은 자신들의 ‘찌라시’를 인쇄할 곳을 구할 수 없게 됐다.

마침내 차르는 “10월 선언”을 발표해 제한적인 개헌을 약속했는데, 노동자들의 투쟁이 어떤 변화를 낳을 수 있는지 보인 것이었다.

그러나 차르의 계획은 민주적 권리로 위장한 엉터리였고 노동자들의 작업장에 관한 문제는 다루지도 않았다. 이미 권력을 행사해 본 노동자들이 고용주들의 속박으로 돌아가자, 분노가 새롭게 차 올랐다. 

파업이 다시 시작됐다.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노동을 요구했고, 국가와 소비에트 중 누가 러시아를 운영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됐다.

그 답은 치열한 거리 전투를 치른 뒤에야 판가름 났다. 군대가 여러 도시에 난입했다. 노동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저항했다.

노동자들은 수적으로 열세였고 무장 상태도 열악했으며, 군인을 자신들 편으로 설득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럼에도 모스크바에서는 전제정이 노동자들의 저항을 제압하는 데 2주나 걸렸다.

차르 전제정은 탄압과 테러로 이 첫 번째 러시아 혁명을 진압했다. 그러나 빠르게 성장하는 노동계급에게서 혁명의 기억을 지울 수는 없었다.

1905년 혁명은 자유주의자들이 차르보다 노동자들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을 보여 줬다. 노동자들 자신이 민주주의와 사회 변화를 위한 투쟁을 이끌어야 할 것이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53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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