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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법 개정안 논란:
노동이사제는 노동자의 처지를 개선하지 못한다

삼성 이재용 등 재벌 총수들이 박근혜 정부와 결탁해 비리를 저질러 온 점이 드러나며 재벌 총수 비판 여론이 커지자, 민주당 등 야당들은 ‘경제민주화’의 상징으로 상법 개정안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상법 개정안의 핵심 내용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대주주의 의결권을 3퍼센트로 제한), 집중투표제(이사를 여러 명 선임할 때 여러 표를 특정 후보에게 집중 투표하는 것을 허용하는 제도), 다중대표소송(모회사의 주식 1퍼센트 이상을 가진 주주가 자회사 이사에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허용), 노동자 대표 추천 사외이사 선임 등이다.

상법 개정안의 핵심 취지는 소수 주주가 지지한 인사가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높여 기업 운영을 투명하게 하자는 것이다.

재계와 우익들은 상법 개정안이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한다며 격렬하게 반대했다. 한 우익 인사는 “자유시장 질서를 파괴해 자본주의를 버리고 사회주의로 전환하는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박근혜 정부와 자유한국당·바른정당도 상법 개정안을 반대한다.

보수 정당들의 격렬한 반대는 회사 돈을 제멋대로 사용하고 노동자들을 머슴 부리듯 해 온 기업주들이 주주들에게 기업 운영을 공개하는 사소한 개혁조차 반대하며 기득권을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는 점을 보여 준다.

그러나 민주당 등이 제안한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더라도 대다수 노동자들에게 돌아오는 혜택은 거의 없다는 점도 봐야 한다. 예를 들어, 집중투표제를 이용해 이사를 선임하려면 최소 20~30퍼센트의 지분을 모아야 한다. 제법 큰 대주주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이런 대주주들이 이사 한두 명을 선임한다고 해도, (하청 노동자를 포함해)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거나, 제품의 가격을 낮춰 보통 사람들에게 혜택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힘들다.

호들갑

한편, 상법 개정안 논란이 커지면서 노동이사제에 대한 논의도 활발해지고 있다. 정의당 노회찬 의원이 내놓은 상법 개정안은 노동자 대표가 추천한 사외이사를 의무적으로 두도록 하고 있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시 공공기관에 노동이사를 임명하기 시작했고, 이재명 성남시장도 성남시 공공기관에 노동이사제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유력 대선 주자인 문재인도 노동자 대표 추천 사외이사제를 공공부문에 먼저 도입한 뒤 4대 재벌과 10대 재벌 순으로 확대한다는 공약을 내놨다.

노동이사제는 노동자 대표를 기업 이사회에 파견하는 제도로, 노조 경영 참여의 한 방법으로 개혁주의자들이 오랫동안 요구해 온 제도 중 하나다. 노조의 경영 참여로 기업의 부정부패를 척결하고, 노동자들의 이익을 높일 수 있다면서 말이다.

노동이사제는 유럽의 19개국이 채택하고 있는데, 그중 독일은 유럽에서도 노조의 경영 참여 수준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독일 대기업(노동자 2천 명 이상)은 노사 동수로 구성된 ‘감독이사회’가 ‘경영이사회’의 주요 결정을 감독할 권한이 있어, 노동자들이 경영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독일에서조차 노동자들은 기업 경영에 실질적인 결정권을 전혀 갖지 못하는 게 현실이다. 감독이사회 의장은 사측 인물이 차지하도록 돼 있고, 노사 간에 동수로 맞설 때는 의장이 2표를 행사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유럽의 노동이사제는 신자유주의 개악과 임금 삭감과 해고 등을 막는 구실을 거의 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독일의 노동이사제는 2000년대에 신자유주의 개악인 ‘하르츠 개혁’을 전혀 막지 못했고, 이에 따라 오늘날 독일 일자리의 거의 4분의 1이 저임금·시간제 일자리이다.

게다가 독일의 거대 자동차 기업인 폭스바겐에서 2005년에 터진 노조 간부와 결탁한 섹스관광, 불법보너스 수수 문제나, 최근에 터진 디젤 자동차 연비 조작 사건 등은 노동이사제가 ‘기업 투명성’을 높이는 데도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 줬다.

설사 기업이 아무리 ‘투명 경영’을 하더라도 경제 위기와 시장 경쟁의 압력은 임금 삭감이나 노동강도 강화, 정리해고를 하도록 만든다. 이때 노동자 경영 참여는 일부 노동자에 대한 구조조정을 다른 노동자들이 승인하도록 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노동이사제를 적극 지지하는 〈한겨레〉의 보도 내용을 보더라도, 노동이사는 명예퇴직, 수당 삭감, 신입사원 임금 삭감 등을 요구하는 사측에 협력하며 노동자들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구실을 한다는 점이 드러난다.

노동이사제는 고용을 보장하고 임금과 노동조건을 향상시키는 대안이 될 수 없다. 특히나 노조 지도부가 기업주(정부)와의 협상에 매달리게 만들어 노동자들의 투쟁력을 약화시킬 위험성도 크다.

따라서 노동이사제를 지지하지 말아야 한다. 그에 대한 환상을 품지 말고 노동 현장의 조직력과 투쟁력을 끌어올리는 게 일자리와 노동조건을 지키는 최선의 방법이다.

“내 회사라고? 우리가 무엇을 기념해야 하는가? 1유로 일자리? 하르츠 개혁?” 독일에서는 노동이사제가 발달해 있지만 고용 불안정과 비정규직 확대를 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