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차르[러시아 황제]가 지배한 러시아는 잔인하고 후진적이었다. 국가는 사람들의 삶을 엄격하고 폭력적으로 통제했으며 종교는 이를 정당화했다.

성범죄와 가정폭력이 일상다반사였고, 가난한 여성은 아이를 낳고 밭에서 일하는 존재로 취급됐다. 여러 법들이 동성애를 범죄로 간주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러시아 사회를 불균등하게 변화시키면서 사람들의 삶도 바뀌었다.

도시에는 남성 동성애자들의 비밀 클럽이 생겼다. 부유한 레즈비언들은 당시 유행하던 문학 사교모임에서 교제할 수 있었다. 이런 고상한 장소들은 주로 도시의 부유한 사람들만 이용할 수 있었다. 반면 노동계급 레즈비언들은 성관계를 하려면 사창가에서 만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례들은 당시 진행되던 사회적 변화 과정(대개 농촌에까지는 미치지 못했다)의 단면을 보여 준다.

혁명

1917년 2월 혁명은 새로운 사회로 가는 문을 열었다. 기존의 사회 관계가 완전히 바뀌었으며 성적 관계 역시 혁명적 변화를 겪었다. 

10월 혁명 이후에는 거대한 사회적 조처들이 취해져 러시아를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로 동성애가 더는 범죄가 되지 않았고 동성 결혼이 합법화 됐다.

"가장 강력한 문화가 강력한 협력을 낳는다" 1918년 러시아의 포스터.

여성은 자신의 의지만으로 이혼할 수 있고 낙태할 수 있는 권리를 법적으로 인정받았다.

10월 혁명 전에 남몰래 결혼한 두 여성은 법적으로 결혼을 인정받았다.

[그중 한 명인] 예브게니아 페도로브나는 다음과 같이 썼다. “동성 간의 사랑은 … 더는 [우리–필자] 자신의 의식 부족이나, 소시민적 편견 때문에 억눌리지 않는다.”

당시의 혁명 러시아는 LGBT+ 권리와 관련해 국제적으로 가장 진보적 국가로 칭송받았다. 오늘날의 많은 나라들은 아직도 성 해방 면에서 혁명 러시아보다 뒤처져 있다. 영국만 해도, 1967년에야 동성애가 합법화됐다.

‘모스크바의 성 위생 연구소’의 소장이었던 그리고리 바트키스 박사는 1923년에 다음과 같이 썼다. “소비에트 법률은 …그것이 타인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한, 성적 문제에서 국가와 사회의 완전한 불개입을 선언한다.

“유럽 법률이 공중도덕에 반하는 범죄로 명시한, 동성애·소도미* 등 성적 만족을 위한 다양한 성적 행위들을, 소비에트 법률은 소위 ‘정상적’ 삽입 행위들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본다.”

전투

러시아 혁명 이후 지난 1백 년의 경험은, 사회가 자동으로 점차 더 관용적으로 바뀌는 것은 아님을 보여 준다. 어떤 사상이 승리할 것인지를 두고 끊임없는 전투가 벌어진다.

승리로 얻은 성과들은 투쟁의 산물이었다.

스탈린이 주도한 관료들의 반혁명은 LGBT+ 대중이 싸워서 얻은 성과들을 뒤로 돌렸다.

스탈린의 러시아에서는 아이를 많이 낳은 여성에게 상을 주는 식으로 국가가 앞장서서 LGBT+ 억압의 뿌리인 가족의 구실을 강화했다.

1930년 소비에트 백과사전은 동성애를 “같은 성의 사람에 대한 비정상적인 성적 이끌림(정상적인 이성애의 반대말)”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반동은 LGBT+권리를 위한 투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 줬다.

동시에, 러시아 혁명이 불과 몇 년 만에 이룬 급속하고 전례 없는 진보는 성 해방을 위한 투쟁이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는지도 보여 준다.

이런 진보는 노동자들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 투쟁하는 과정에서 성취됐다. 그리고 볼셰비키는 LGBT+ 권리를 위한 투쟁이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5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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