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북한 황태자” 김정남이 이복동생의 치명적 경계심으로 마침내 비명에 갔다. 김일성 동생 김영주가 18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 적이 있고, 김정일의 이복동생 김평일이 40년 가까이 유럽에서 유배돼 있고,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4년 전 처형됐고, 장성택 처형 이후 장성택의 아내이자 김정일의 여동생이자 김정은의 고모인 김경희는 공식석상에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대단한 집안이다. 그런데 김정은이 이런 잔인한 짓을 한 때가 남한에서 반정부 운동이 한창이라는 사실이 시사적이다.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1937~38년 이른바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옛 동지들을 다 살해하고 공포 통치를 강화했다.

스탈린이 이런 유혈 숙청을 벌이던 때가 프랑스 노동계급의 전국적 공장 점거 운동이, 그리고 스페인 노동계급과 빈농의 반파시스트 혁명과 내전이 한창이었다는 사실도 시사적이다.

1928년 반혁명으로 1917년 10월 혁명의 성과를 모두 뒤엎고 국가자본주의의 길을 놓은 이오시프 스탈린(앞 줄 오른쪽에서 네 번째)과 지지자들. 

실제로, 옛 소련 몰락 후 기밀해제된 문서들에 따르면, 스페인 혁명 운동이 스탈린의 통제를 벗어나 POUM(마르크스주의적 통일 노동자당) 쪽으로, 그리하여 POUM과 친한 트로츠키 쪽으로 설득될 위험이 감지됐다.

당시 스탈린이 지배하고 있던 코민테른(국제공산당)은 그럴 바에야 차라리 프랑코 장군의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이런 사실들은 소련 트로츠키주의자이자 역사가 바딤 Z 로고빈(1937~98)의 저작(1937: Stalin’s Year of Terror, Michigan, 1998)에 의해 훨씬 폭넓게 공개됐다.(이하의 서술은 이 저작에 크게 의존했다.)

기밀해제 문서들은 스탈린의 권력을 위협한 세력이 스페인 혁명가들 외에도 실재했음을 보여 준다. 특히 러시아 국내에 말이다. 그들은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첫째, 중년이 된 볼셰비키 선임 당원들. 이들은 20대와 30대에 1917년 10월 혁명을 체험하면서 볼셰비키당에 입당했던 사람들이다. 그동안 이들은 하는 수 없이 스탈린 통치를 감내하면서도, 급속한 경제 성장에 고무돼 점점 스탈린 공포 통치에 대한 불만을 키워 왔다.

둘째, 군부 내의 트로츠키 지지자들. 이들은 1918~24년 트로츠키가 적군 총사령관이던 때 그 휘하에서 내전을 수행했었던 야전 지휘관들이다. 게다가 군대 사병들은 여전히 농민 출신이므로 이들은 농민의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당시 스탈린의 보안경찰인 내무인민위원부가 보기에, 트로츠키를 지지하는 지휘관들이 농민 사병들의 지지를 받아 군사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를 일이었다.

스탈린은 트로츠키를 궐석기소하면서 나치의 보안경찰인 게슈타포와 협력했다는 터무니없는 혐의를 씌웠다. 이는 트로츠키의 사상이 법정에서 공개적으로 토론되길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이는 한국의 공안검사들이 북한과 아무 관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북한에 비판적인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을 보안법으로 기소할 때도 법정에서 정치적 논쟁은 회피하는 것과 비슷하다.)

스탈린의 보안경찰은 피의자들을 트로츠키의 공범이라는 누명을 씌워 기소했는데, 그 가운데 진짜 트로츠키 지지자들은 법정에는 세우지 않았다. 그 이유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고문에도 불구하고 투항하지 않았으므로 만일 그들을 법정에 세운다면 그들이 재판을 이용해 트로츠키주의 사상을 선전할까 봐 두려워했던 것이다.

당시에 단지 공산당들만이 모스크바 재판이 진실에 근거했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개혁주의자들, 가령 영국의 친노동당계 신문 〈업저버〉나 웹 부부(夫婦)도 모스크바 재판을 ‘진실’된 것이라고 말했다.

스탈린 정권의 불안정에도 불구하고 안타깝게도 이후의 전반적인 정세는 혁명가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와 스페인의 상황은 혁명 운동의 패배로 끝나며 혁명가들의 희망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마침내 제2차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소련이 참전했다. 빅토르 세르쥬의 1939년작 소설 제목대로 “세기의 한밤중”이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이 보낸 킬러에 의해 살해당했다(1940년).

스탈린이 보낸 자객에게 습격받고 사경을 헤매고 있는 트로츠키.

로고빈에게 빚지지 않고도 다른 기밀해제 소련 문서에 따르면, 스탈린은 중국 혁명 승리 직후에도 대규모 유혈숙청을 계획했다. 1953년 초에 그가 죽는 바람에 미수로 그쳤지만 말이다.

옛 소련과 북한이 마르크스와 레닌의 용어를 사용한 점이 실제 현실을 가려서는 안 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를 위한 조사(弔辭)에서 인간 삶의 물질적 실재가 “이데올로기의 과잉 성장에 의해 감춰졌다”고 지적했다. 스탈린이나 김일성, 그 밖의 북한 지배자들은 이데올로기에 먼저 좌우되진 않았다. 그들은 제국주의나 시장 자본주의 국가 지배자들과 꼭 마찬가지로 물질적 고려를 우선해서 행동했다.

스탈린 체제의 등장

스탈린 체제의 등장은 러시아 혁명이 부딪혔던 한계에서 비롯했다. 러시아 10월혁명은 국제 혁명의 성공을 기대하며 착수된 러시아 노동계급(소비에트로 조직된)의 행동이었다.

그러나 국제 혁명들은 유럽 혁명가들의 미숙함으로 잇달아 패배했다. 특히, 1923년 10월 독일 혁명의 패배가 러시아 혁명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엄청난 (군사적·경제적) 압력이 러시아에 가해졌다. 세계 자본주의의 압력에 부딪혀 생존을 위해 더욱더 착취적·억압적이 되는 개별 대기업(가령 요즘 현대중공업)의 행태를 봐도 이 압력의 존재와 효과를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의 자본주의적 단위인 소련도 더욱더 착취적·억압적이 돼야 했다.

1928~29년이 임계점이었다. 1917년의 성과는 일소됐다. 이제 노동자 권력의 잔재는커녕 노동자 권리도 파괴됐다.

엄청난 속도의 공업화가 추진됐고, 농민은 국영 집단농장에 강제로 수용돼 착취당했다.

서구가 한 세기에 걸쳐 수백만 민중의 삶을 망가뜨리며 이룩한 공업화를 러시아는 겨우 20년에 걸쳐 이룩했으니 민중의 희생의 규모가 어땠겠는가. 그 잔인성은 어땠겠는가.

이는 실로 반혁명이었다! 국가자본주의로 전환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제 러시아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띠게 됐다. 러시아 민족이 소련 내 소수민족들은 물론 소련 밖 동유럽의 민족들도 지배하면서 한 블록을 이뤘고, 미국이 이끄는 서방 블록과 경쟁하게 됐다.

물론 소련이 표방한 이데올로기는 국가자본주의가 아니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였고, ‘마르크스·레닌주의’였다. 사회주의는 이데올로기였을 뿐, 실제 현실은 전면적(관료적) 국가자본주의였다.

스탈린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그 체제를 구별해야 한다. 전자는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주의이고, 후자는 극도로 억압적인 착취 체제였다. 체제로서 스탈린주의란 1920년대 말부터 1991년 붕괴 때까지 옛 소련 사회를 지배한 체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물론 이 체제는 중국과 북한에 잔존하고 있다.

해방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와 레닌의 사상을 표방하면서도(물론 국가 종교처럼 만들어 버렸다), 실제로는 억압적이고 착취적인 체제를 지킨다는 모순 때문에, 소련 블록 밖에서 해방 운동에 헌신하는 사람들(예컨대 자민통계)과 소련 블록 소속 국가 관료는 달랐다. 전자는 천대받는 민중의 옹호자를 자임하지만, 후자는 민중을 천대하고 억압하는 압제자이다.

이는 냉혹하고 잔인하게도 이복형제를 죽인 김정은과 자민통계 활동가를 구분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스탈린주의의 모순

제2차세계대전의 승전국이 된 소련은 미국·영국과 협상해서 동유럽을 얻어 냈다.

그리고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30년간 소련은 옛 식민지 세계에서 동맹들을 많이 얻었다. 그 시기는 중국 혁명 승리(1949)와 쿠바 혁명 승리(1958), 베트남 전쟁(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 또는 반미저항전쟁 승리, 1975), 니카라과 혁명 승리, 이란 혁명 승리 등 제3세계 민족해방 운동 성공의 시기였다.

다른 한편, 스탈린주의의 위기도 이 시기에 시작됐다. 1956년 헝가리 혁명으로 스탈린주의 체제의 신뢰성이 크게 실추됐다. 이로 말미암아 서구의 수많은 공산당원들이 당을 탈당하고 뉴레프트를 표방하기 시작했다.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과 1980~81년 폴란드 연대노조가 이끈 준(準)혁명 상황도 스탈린주의의 신뢰도를 실추시켰다.

‘1968년’ 운동 과정(1975년까지 지속)에서 보여 준 서구 공산당들의 꾀죄죄한 모습도 여기에 한몫했다.

스탈린주의의 신뢰성을 추락시킨 1968년 체코 '프라하의 봄'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의 승승장구와 서구 공산당들의 꾀죄죄함 덕분에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의 좌파적 버전인 마오쩌둥주의가 많은 지지를 얻었다. 뉴레프트의 일부(특히 미국과 남부 유럽의 뉴레프트)도 마오쩌둥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 직후 베트남과 캄보디아 간의 전쟁으로, 또 (캄보디아) 폴 포트 체제의 잔학상으로 마오쩌둥주의도 급속히 불신받았다.

결정적으로 1968운동이 1970년대 후반에 패배로 끝났다. 스탈린주의의 다양한 버전들도 사기 저하하고 우경화했다. 유러코뮤니즘(서방식 공산당)이 등장했고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는 결정적으로 약화됐다.

그래서 1979년 니카라과 혁명과 이란 혁명은 스탈린주의나 마오쩌둥주의 이데올로기에 이끌리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는, 스탈린주의에 환멸을 느낀 좌파 출신자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을 받아들이거나 주창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는 서구의 경우 운동 패배와 침체의 시기였다.(한국, 남아공, 브라질 등 신흥공업국은 달랐다.)

1980년대 전반부는 미소간 냉전 재격화의 시기였다(“신냉전”).

1980년대 중엽 소련 경제 상황은 매우 심각하게 악화됐다. 소련의 선제적 유화 조처로서 1987년 미소간 긴장 완화가 시작됐다.

그러나 1989년/91년 각각 동유럽과 소련의 스탈린주의 체제가 와해됐다. 국가자본주의에서 시장자본주의로의 긴 전환 과정이 시작됐다.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도 거의 사멸하게 됐다. 세계 공산당들의 보편적인 우경화가 시작됐다. 남아공, 한국 등에서조차 그랬다.

한국의 스탈린주의는 1980년대까지는 혁명적이었고, 1990년대에는 중간주의적(혁명적 입장과 개혁주의적 입장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동요하는 것)이었고, 2000년 이후로는 점점 개혁주의에 가까워졌다.

그러나 좌파적 개혁주의와 흡사해도 북한에 대한 입장 때문에 진화한 스탈린주의로 취급해야 적절하게 분석할 수 있다.

이런 진화는 단순한 이데올로기 변화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물질적 토대의 특이성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스탈린주의의 사회적 기반은 세 계급에 걸쳐 있다: 노동계급과 북한 지배계급과 남한 일부 지배자들이 그것이다. 1934년 이후 인민전선(한줌의 반동 모리배를 제외하고 계급을 초월한 국민연합)의 전통 때문에 지배계급의 일부(2000년 이후로는 임동원과 정세현, 심지어 정주영도)까지 포섭했던 것이다.

이런 다계급 기반 지향성이나, 계급을 초월하기는 자연히 민중주의 경향을 띠게 되는 걸로 나타나게 된다. 계급투쟁이 핵심 과제가 아니라 통일과 남북 화해협력이 최우선 과제가 되고, 민주당 지지/동맹 노선을 추구하고, 스탈린주의 사상은 개혁주의적 논리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런 사상과 전략은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입맛에 맞으므로 그들의 일부에게 받아들여지게 된다.

스탈린주의의 핵심 이데올로기는 (국제 사회주의가 아니라) 일국 사회주의이다. ‘우리식 사회주의’, ‘중국 특색 사회주의’ 등이 그 사례다. 일국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진화한 결과는 좌파적 민족주의이다. 민족주의 때문에도 스탈린주의 사상은 개혁주의적 논리의 영향을 받는다.

한편 북한 지배계급에 두고 있는 기반 때문에 북핵, 세습, 북한 인권(억압), 탈북민, 성소수자 등의 문제들에 대한 태도는 아주 나쁘다.

그리고 스탈린주의 사상은 당이 운동을 대표한다는 나쁜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일부 자민통계 활동가들은 자기들 자신이 운동 그 자체라는 생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어, 다른 경향의 활동가들과 감정적으로 이반하곤 한다.

스탈린주의의 유산

이제 스탈린주의의 핵심 유산을 살펴보기로 하자. 스탈린주의의 유산은 사회주의의 의미를 전복해 버렸다. 그에 따르면, 사회주의는 국유화 또는 국영 경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프루동이 자본주의를 사유재산 제도로, 또 사회주의를 국유화로 정의한다고 비판했다.

엥겔스도 1877년 비스마르크의 주요 산업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고 규정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 식이라면 담배 산업을 국유화한 나폴레옹과 메테르니히를 사회주의의 창시자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소유(소유관계)가 형식적인 법률적 개념임을 분명히 했다. 가령 서양의 고대 사회, 중세 사회, 근대 사회의 사적 소유는 형식이 모두 같아도 그 내용, 특히 그 생산관계는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로 서로 다르다.

다른 사례는 고대 중동 제국(帝國)들이다. 거기서 주요 생산수단(토지)은 모두 국유화돼 있었지만, 그 사회는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계급 사회였다.

또 다른 사례는 가톨릭 교회의 소유관계다. 중세 이래로 사적 소유가 아니라 공적 소유였지만(가령 사제의 상속권이 없다), 그 생산관계는 중세에는 봉건적이었고, 오늘날에는 자본주의적이다(가령 바티칸은 세계 금융시장의 큰손이다).

이렇게 형식과 내용은 반드시 일대일(一對一)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사유 자본주의도 있을 수 있고 국유 자본주의도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를 국유화나 국영 경제로 정의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으로 정의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자신의 행위다.”

동유럽과 북한, 중국 등지에서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은 없었다. 동유럽과 북한은 소련 군대에 의해 사회가 전면 재편됐고, 중국에선 지식인 유격대원들이 농민의 지지로 집권한 후 사회를 전면 재편했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의 현지 대리인 구실이나 하던 허약한 기존 국가 대신에, 강력한 국가 관료가 통제하는 국가자본주의 국가가 들어서서 자본 축적을 관장했다.

농촌에서 지주제도가 폐지됐지만, 그 대신에 국가가 집단농장을 세워서 집단으로 농민을 착취했다.

노동계급의 자체 활동 없이도 노동자 국가나 사회주의 사회가 가능하다면, 사회주의 운동에 노동계급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그리고 노동계급이 중요하지 않다면 마르크스주의도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된다. 마르크스주의와 노동계급 투쟁은 역사적으로 또 이론적으로 밀접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계급과 사회주의 정치가 마치 하찮은 존재 취급을 받는 건 대부분(전적으로 그런 건 아닐 게다) 스탈린주의의 유산과 그에 대한 좌파의 부적절한 대처 때문이다.(〈노동자 연대〉 신문은 옛 소련 블록 소속 국가들이 소위 ‘사회주의 국가’이기는커녕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해 왔다.)

박근혜 정권을 물러나게 만드는 데서 더 나아가 모든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남한도 북한도 아닌 진정으로 자유롭고 진정으로 민주적이며 진정으로 평등한 사회를 염원해야 한다. 그 첫걸음은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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