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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교안의 수구보수적 경력들

이 기사를 읽기 전에 “일하다 다친 이주노동자 쫓아내는 게 합법?: 이주노동자 옥죄는 악랄한 족쇄, 고용허가제를 폐지하라!”를 읽으시오.

박근혜 정권의 원년 멤버인 황교안이 결국 특검 수사 종료(2월 28일)를 하루 앞두고 특검 연장을 거부했다.

“특검법의 주요 목적과 취지는 달성”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적폐의 원흉인 박근혜는 아직 단 한번의 대면수사도 받지 않았고, SK, CJ, 롯데 등 뇌물죄와 관련된 재벌 총수들에 대해선 수사 개시도 안 된 상황인데 말이다. 결국 2월 17일 구속된 삼성 이재용 수사는 구속 기간(20일)도 다 못 채운 상태로 재판에 넘겨야 한다. 우병우 수사 등도 마찬가지다.

물론 “운동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수사가 다시 검찰로 넘어가도 박근혜 일당의 유죄를 받아낼 수 있을 것이다.”(〈노동자 연대〉 제198호)

그러나 황교안은 대선을 핑계 삼아 촛불 운동이 잠잠해질 때까지 수사를 미루도록 압력을 넣겠다는 의사도 드러냈다. 따라서 황교안에 맞서는 투쟁은 여전히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강성우익 내각의 기둥

박근혜 정권 유지에 누구보다도 앞장선 황교안은 이번 특검 연장 거부를 계기로 우익들의 기대를 더욱 한 몸에 받게 됐다.

그는 대통령 권한대행이 되자마자 국가정보원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 공작정치를 부분적으로 합법화할 수 있는 국가사이버보안법의 제정안을 국무회의에서 의결했다. 올해 1월에는 웹사이트에서 절판된 인문사회과학 서적, 자료 등을 열람할 수 있도록 제공한 ‘노동자의 책’ 대표 이진영 씨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시켰다. 그리고 바로 직전에는 국가보안법 신고 포상금을 5억 원에서 20억 원으로 대폭 인상 시켰다.

이런 그를 박근혜 정부 내각에 추천한 건 검사 시절 황교안의 멘토였던 정홍원과 공안검사의 중시조 격인 김기춘으로 알려져 있다. 정홍원은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무총리였다. 현재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회 추진위원회 위원장’ 자격으로 탄핵 반대 집회에 참여한다. 김기춘은 권력 농단을 공안통치로 뒷받침한 박근혜 정권의 핵심 인물이다.

이렇게 입각한 황교안은 2013년 법무장관이 되자마자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를 무력화시키며 박근혜의 신임을 받게 된다.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지지 사이버 선거 운동을 지시했던 국정원장 원세훈에 대해, 당시 검찰 특별 수사팀장 윤석열(현 박영수 특검의 수사팀장)이 구속영장을 청구하려 하자 황교안은 “증거가 충분치 않다”며 막아서기도 했다.

황교안은 또 진보당의 해산도 직접 진두지휘했다. 2013년 8월 진보당 의원 이석기의 이른바 ‘아르오(RO) 사건’이 터지자, 그는 7명의 검사로 ‘위헌정당·단체 관련 대책 TF’를 만들고, 그해 11월 헌법재판소에 진보당 해산 심판을 청구했다. 그리고 정부대리인 자격으로 헌재 재판정에 직접 나가 “우리 후손들에게 자유와 번영의 미래를 물려줄 것인지, 아니면 억압과 굶주림의 고통을 짊어지게 할 것인지가 이번 심판에 달려 있다”며 진보당 해산을 주장했다.

이 자는 “민주노동당이 2000년 창당했을 때, 언젠가는 위헌정당 심판이 있을 줄 알고 내 나름대로 준비를 해 왔다”고 자랑 삼아 말하기도 했다. 사석에서 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의 이런 공안 신념은 독재의 과거를 미화하는 국정 역사교과서 옹호로도 이어진다. 2013년 법무부 장관 인사청문회 때도 그는 5.16에 대해 “역사, 정치적으로 다양한 평가가 있다”며 명확한 답변을 회피했다. 진실인즉슨, 5.16 군사쿠테타를 좋은 의미의 ‘혁명’으로 본다.

그는 자기 저서인 《집회, 시위법 해설》(2009)에서 그는 “집시법 역시 4.19 혁명 이후 각종 집회와 시위가 급증하여 무질서와 사회 불안이 극에 달한 상황 속에서 5.16 혁명 직후 제정되었다”고 썼다. 이 자가 박근혜 탄핵 이후에도 계속 추진하는 것은 단순히 ‘충복’으로서만은 아닌 것이다. 그는 확신범이자 공범이다.

또한 이 인용구에서도 엿볼 수 있는 바, 그는 집회와 시위를 혼란 요인으로 본다. 당연히 관리와 단속의 대상으로만 본다. 《집회, 시위법 해설》(2009)에서 그는 “대학 구내, 회사 구내, 종교시설 경내 등에서의 집회도 옥외 집회로서” 관할 경찰서에 신고 대상이라고 말했다. 이 자의 시각으로 보면 과연 집회의 자유가 있기나 한지 의문이 들 정도다. 그가 법무장관과 총리일 때에, 세월호 참사 등 정당한 저항과 시위마다 물대포가 쏟아지고 결국 백남기 농민이 죽은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지금 이 비극에 책임있는 자들은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고 있다.

황교안은 총리로 있으면서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을 구속했다. 한 위원장은 아직도 감옥에 있다. 그런데 황교안은 한상균 위원장 구속 직후인 2016년 1월 한 간담회에서 “노동계가 주장하는 쉬운 해고, 일방적 임금삭감은 사실이 아니며, 전체 근로자의 10%에 불과한 대기업·정규직 중심의 특정노조가 기득권을 지키려고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라며 역겨운 거짓말을 했다.

사실 진보당을 해산시킨 그때부터 보수세력 일각에서는 “황교안 법무부 장관을 잘 키워서 2017년 대선 때 보수의 후보로 내보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이밖에도 2014년 검찰과 국정원 등 수사기관에 의해 억울하게 간첩 누명을 쓴 것으로 밝혀진 서울시 공무원 유우성 씨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해서도 “일부 조작 시비가 있는 것일 뿐이다. 사건의 본질은 유우성 씨가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라며 검찰·국정원의 위법 수사를 두둔했다.

박근혜 정부의 법무장관이자 총리, 즉 검찰 수사의 지휘자로서 그가 한 일은 기득권층 수사는 멈추게 하고, 보안법 수사는 부추긴 것이었다.

그를 키운 건 8할이 공안

사실 박근혜 내각에서의 활약은 공안검사 시절부터 이미 그 싹을 보였다. 그것은 단지 윗선에 개기고 독단을 부리는 정도를 넘어섰다. 그의 공안 신념은 단지 좌익 혐오가 아니다. 그는 권력자들의 범죄를 은폐하고 기득권을 비호하는 것을 ‘공공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라 여긴다.

전두환 독재정권과 함께 검사 생활을 시작한 황교안은 30년 가까이 대검 공안1과장, 서울지검 공안2부장, 서울중앙지검 2차장(공안 총괄), 대구·부산 고검장을 거치며 대표적인 ‘공안통’으로 살아왔다.

그는 1994년 서울중앙지검 공안부 검사 시절 한 국가보안법 피의자의 수사기록 복사 요구를 거부한 적이 있다. 그의 부당한 법 집행에 대해 피의자 쪽은 헌법 소원을 제기했고, 3년 뒤 헌법재판소는 황교안의 처분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이런 점만 봐도 “헌법 위에 국가보안법” 정신을 제대로 구현한 자다.

김대중 정부 첫해인 1998년 《국가보안법해설》이란 책을 썼다. 2011년 개정판 머리말에서 “국가보안법은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지키기 위한 안보형사법이다. 우리의 안보 여건이 변하지 않는 한 정치권의 이해득실에 따라 그 개정이나 폐지가 논의될 수 없는 국가의 기간법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책을 처음 낸 이후 그에게는 ‘미스터 보안법’이라는 별명이 붙었는데, 이 책의 발간 자체가 임기 중 국가보안법 구속자만 1천 명에 이르렀던 김대중 정부조차도 못마땅해 한 수구 공안 세력의 반감을 대변한 것이었다.

노동자들에 대해서 언제나 정권이나 기득권을 보호할 때와 다른 법의 잣대를 적용해 왔다. 투쟁하는 노조 지도자에 대해선 언제나 체포, 구속 등 강경한 입장을 취해 왔다. 2002년에 단병호 민주노총 위원장을 구속한 것도, 공무원노조를 불법 단체로 몰아 차봉천 초대 공무원노조 위원장을 구속한 것도 바로 황교안이었다.

2005년에는 사소한 꼬투리를 잡아 동국대 강정구 교수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 수사하려 했다. 당시 상관이었던 법무부장관 천정배가 불구속 수사를 지시했는데도 이를 거부하고 고집을 피워 쟁점이 됐다. 황교안 본인이 법무부장관으로 국정원 수사를 축소하도록 수사 지휘권을 발동한 것과 대조된다.

2005년에 불거진 ‘삼성 엑스파일’ 수사는 황교안의 기득권 수호천사 행태의 대표 사례다. 삼성 엑스파일은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삼성그룹 부회장 이학수와 〈중앙일보〉 회장 홍석현이 정관계 인사들에게 ‘떡값’을 전달하는 대화가 담긴 테이프였다.

이 두 사람의 대화를 안기부가 도청한 것을 안기부 전직 직원이 유출해 뒤늦게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특별수사팀장이었던 황교안은 삼성가(家) 수사를 방해했다. 횡령과 뇌물공여 혐의를 받던 삼성 이건희는 서면조사만 하고, 삼성 측 관계자들은 모두 불기소 처분했다.

반면 ‘떡값검사’의 실명을 공개한 노회찬 의원, 이 사건을 보도했던 이상호 MBC 기자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황교안은 당시에도 뻔뻔스럽게 “하늘 아래 부끄러움이 없는 수사를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 수사가 부실한 것 때문에 검사장 승진이 늦어진 것으로 평가됐는데, 그는 이를 김대중·노무현 정부 탓이라며 두고두고 앙심을 품었다고 한다.

결국 이명박 정부에서 겨우 검사장 승진을 하고서야 검찰을 나왔다. 그리고 그 경력을 살려 월 1억 원씩 하는 변호사 생활을 한 것이다. 전관예우 변호사로 의심할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변호사 시절 2012년 한 우파 단체가 주최한 세미나 패널로 참석해서는 ‘불법 단체의 해산뿐만이 아니라 단체의 뿌리를 잘라 내기 위해서는 본부뿐만 아니라 그 지부 산하단체들까지 규제하는 법을 만들어야 된다’며 철저한 탄압을 주장했다. 대형 로펌에서 월 1억 원을 받는 고문 변호사를 하면서 이런 주장들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제 순응적”

이런 황교안의 수구적 기득권 수호 우익적 성향은 청소년 시절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박정희가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 체제를 출범시킨 ‘10월 유신’ 이듬해에 고등학교에 들어간 황교안은 3학년 때 학도호국단의 연대장(학교 대표)이 된다.

학도호국단은 이승만 정권 때 국가가 학생들을 직접 통제할 목적으로 창설된 준(準)군사조직이었다. 4.19혁명 이후 해체됐으나 박정희 정권은 학생을 군사 동원과 선전의 대상으로 삼으려고 학도호국단을 부활시키고 훈련을 강화했다. 당시 경기고 동기생이었던 노회찬 정의당 의원은 한 언론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어용적인 성격의 학도호국단 간부를 맡으려고 하지 않았다. 나이가 어리긴 해도 대체로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들이 많았다. 따라서 당시 임명직인 연대장 자리를 맡는 것 자체가 체제 순응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작 황교안은 병역 기피 의혹을 받고 있다. 1977년부터 1979년까지 3차례 징병검사를 연기한 그는 1980년 징병 검사 때 만성 담마진(두드러기 질환)이라는 피부병으로 병역 면제 처분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두드러기 질환 판정을 받기 며칠 전에 병무청으로부터 면제 판정을 받아 논란이 일었다. 2015년 6월 국무총리 임명동의안 표결에 앞서 당시 민주당 소속 김광진 의원은 “3백50만 명이 10년간 징병검사를 받지만 단 4명만이 담마진이라고 하는 두드러기로 병역을 면제받았다”고 따지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그의 반동적 삶의 궤적을 보면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노동자를 억압해 온 박근혜 정권 적폐의 계승자로 아스팔트 ‘광박’들에게 추앙될 자격이 충분해 보인다. 황교안은 박근혜 정권 이전부터도 민주주의와 노동자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의 반대편에 서 온 자이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의 모든 악행에 부역해 온 공범이기도 하다. 황교안은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이 조금이라도 수그러든다고 판단되면 언제든지 역공을 감행할 것이다. ‘박근혜가 탄핵되면 아스팔트에 피를 뿌리겠다’는 자들을 대변해 특검 연장 요구마저 묵살해버린 이 자도 민중의 힘에 의해 자리에서 쫓겨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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