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구력] 1917년 2월 23일[신력 3월 8일, 국제 여성의 날] 페트로그라드에서 코사크 기병대[제정러시아의 시위 진압 부대]가 시위 중인 여성 노동자들에게 발포하길 거부했다. 이 사건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종말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병사들이 장교의 명령을 거절하고 자신들의 말을 따르자 여성 노동자들은 화들짝 놀랐다.

이 반란의 밑바탕에는 전쟁에 지친 병사들이 억눌러 온 분노가 있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내리 3년째 이어지고 있었고 2백만 명이 넘는 러시아 병사들이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더군다나 굶주림이 만연했는데도 부자들은 줄곧 호사스럽게 살아갔다.

1917년 4월 페트로그라드 거리를 행진하는 병사들. 

여성들의 저항이 파업과 시위에 불을 당겼고 페트로그라드를 멈춰 세웠다. 며칠 만에 반란의 불길은 페트로그라드에 주둔하던 군대마저 사로잡았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러시아 혁명사》에서] 또 다른 반란 사건을 소개했다. 파업에 나선 기계공 2천 명은 코사크 기병대가 자신들을 향해 “거듭 달려오지만 전혀 폭력적이지 않은” 상황을 맞이했다.

“시위대는 양쪽으로 갈라져 병사들을 통과시키고 나서는 도로 모였다. 노동자들 사이에 긴장 따위는 없었다. … 병사들은 [노동자들을 향해] 빙긋 웃으며 윙크했다. 총을 쏘지 않겠다는 병사들의 약속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장교들은 병사들한테 도심으로 향하는 노동자를 막으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코사크 병사들은 자신이 탄 말 밑으로 노동자들이 숙이고 지나는 것을 막지 않았다”.

그래서 트로츠키는 “[2월] 혁명이 승리를 향해 첫발을 내딛은 곳은 코사크 기마의 배 아래였다. 실로 특별난 사건이었다!” 하고 썼다.

그 후 며칠에 걸쳐 시위가 더욱 거세졌다.

[2월 26일] 차르의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은 해산하지 않는 시위대에게 무조건 발포하라고 명했다.

몇몇 연대가 발포를 거부했고 병사들 사이에서 항명이 확산됐다.

볼린스키 연대가 가장 먼저 반란에 나섰다. 시위대를 쏴 죽이라는 장교들의 지시에 넌더리를 낸 일부 병사들이 등을 돌리고 노동자들과 나란히 행진했다. 다른 연대들도 이를 뒤따라 반란에 나섰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의 병사들이 반란 편에 서자 바야흐로 때가 무르익었다. 그 병사들은 자신을 물리적으로 제지하려던 장교들을 총으로 쏴 죽였다.

하루 만에 페트로그라드 전체가 사실상 파업에 나섰고, 그때까지 반란에 가담하지 않았던 병영들에까지 반란 분위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모스크바 등 다른 도시에서도 같은 패턴이 되풀이됐다.

총성

정부 무기고를 조직적으로 습격하는 일이 여러 차례 벌어졌다.

그렇게 확보한 소총과 탄약은 이미 반정부 봉기로 빠르게 나아가고 있던 시위대를 무장시키는 데 쓰였다.

무장한 병사와 수병도 반란에 가담하며 차르가 수감한 정치범들을 풀어 줬다.

정부가 질서를 회복하겠다며 전방에서 불러들인 군대는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혁명 편으로 넘어가곤 했다.

2월 27일 병사 7만 명이 파업 노동자 40만 명과 함께 행진하면서 “전제 타도! 전쟁 종식!”을 외쳤다. 차르 밑의 대신들이 그다음 날 체포됐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에 병사 분과가 3월 1일에 설립됐고, 끝까지 버티며 차르에 충성하던 부대들도 투항했다.

3월 2일이 되자 니콜라이 2세는 혁명의 힘에 짓눌려 퇴위했다. 동생인 미하일 대공이 왕위를 물려받았지만 고작 하루 만에 자리에서 내려왔다.

이어 몇 주간 소비에트, 즉 노동자 평의회들이 방방곡곡에서 생겨나 노동자와 병사를 대표했다.

볼셰비키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당시의 전쟁이 제국주의 간 충돌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노동계급을 선동해 혁명을 일으키고 차르 체제를 무너뜨려야 전쟁을 끝낼 수 있고 그것이 [사회주의자의] 핵심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런 “혁명적 패배주의”는 다른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전황과 무관하게 자국 정부에 맞서 싸우라고 촉구했다.

볼셰비키 출신의 병사이자 선동가들이 차르 군대 내부를 계급으로 쪼개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들 덕택에 병사들이 자신감을 더 얻을 수 있었다.

반란을 일으킨 병사는 투옥이나 사형을 과감히 무릅써야 한다. 병사들이 반란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장군들이 지휘 체계를 복구시키지 못할 만큼 막강하고 단호한 대중운동이 있었던 덕분이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5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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