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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1917년 2월혁명의 성격

1백 년 전 3월 초에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2월혁명’이라고 부른다. 제정 러시아의 달력(율리우스력)은 서구의 달력(그레고리우스력)보다 13일이 늦었기 때문이다.

당시 러시아는 산업 능력에 버겁게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 중이었으므로, 민중의 생필품이 부족했고, 특히 식료품은 배급됐다.

수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배급을 기다리던 여성들이 식료품 배급량이 적은 것에 분노해 항의를 시작했고, 3·8 여성의 날 전날부터는 노동자 파업으로 번졌다.

이 파업은 수도권의 거의 모든 지역들에서 노동자 대표들을 뽑아 지역 소비에트들을 세우는 것으로 순식간에 발전했다. 일주일 뒤 차르(러시아 황제의 호칭)는 마침내 하야했다.

노동자들과 여성들은 함께 여성의 날 기념 행사를 치렀다.

"배급을 늘려라"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거리를 행진하는 여성 노동자들. 이 시위는 2월 혁명의 시작을 알렸다.

1백 년 전에는 이렇게 노동자 운동과 여성 운동이 서로 유기적으로 융합돼 있었다. 남성을 노골적 성차별주의자나 은폐된 성차별주의자로 여기는 종류의 여성주의는 당시에 거의 지지를 못 받았다.

일찍부터 레닌은 여성 차별과 여성 해방에도 큰 관심을 가졌고, 그에 관한 소론들을 적잖이 썼다. 일관된 핵심인즉, 사회주의자들은 모든 여성이 겪는 천대와 차별에 반대하고 여성의 항의와 저항을 지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중간계급 친화적인 여성 운동가들은 때로 자신의 계급적 편견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그때는 필요하면 반자본주의적 비판을 곁들여야 할 것이다.

레닌은 더 일반적으로 각종 형태의 천대와 차별에 반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정 러시아에서는 국교인 러시아 정교회에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몹시 천대를 받았다. 특히 유대인은 때로 인종 학살을 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학대받았다.

2월혁명의 성격

2월혁명을 옛 소련의 공식 이데올로기는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라고 규정했다. 부르주아 혁명이고 또한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많은 좌파가 ─ 스탈린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는 좌파의 일부도 ─ 이런 그릇된 정의를 답습하고 있다.

그들은 2월혁명으로 부르주아지가 정권을 잡았다는 점에서 2월혁명을 그렇게 정의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어떤 혁명을 정의할 때 그 혁명의 사회적 결과에 초점을 맞춰 정의했다.

그래서 부르주아 혁명은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관계들을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들로 변혁하는 혁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자본 축적을 주도할 강력한 국민국가를 세우는 것과 농업에서 지주제도를 폐지하는 것이다. 부르주아 혁명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확립했다는 통념은 프랑스 혁명을 지나치게 일반화한 오류일 뿐이다.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전반부까지의 네덜란드 혁명과 17세기 중엽 영국 혁명,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이 대표적인 부르주아 혁명이었다.

러시아에서는 2월혁명으로 지주제도가 전혀 없어지지 않았다. 지주제도 폐지는 노동계급이 권력을 잡은 10월혁명 이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국민국가로 말하자면, 비록 차르 절대국가는 전복됐어도 그걸 대체한 임시정부는 국가의 핵심인 경찰력도 구축하지 못했고, 군대는 거의 와해 상태였다.

그리고 파업으로 몸살을 앓는 공장을 자본가들이 버리고 도망갔는데도 정부는 자본가들에 대해서나 노동자들에 대해서나 속수무책이었다. 노동자들은 소비에트(노동자 평의회)를 자기들의 정부라고 부르고 있었다.

한편, 소비에트는 노동자 국가의 맹아였는데, 도대체 16세기 후반 이래 어떤 부르주아 혁명에서 노동자 국가의 맹아가 생겨난 게 있었는가?

이제 2월혁명이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주장을 반박하고자 한다.

민주주의 혁명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존재하지 않는 권위주의 정치 체제 ─ 군부독재나 파시즘 또는 스탈린주의 ─ 를 타도하고 정치적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정치 체제로 변혁하는 혁명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서 핵심은 정치적 자유와 의회민주주의 제도, (소수)민족의 권리, 신앙의 자유 등이 확립되는 것이다. 잘 알려진 사례만 들자면,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 1989년 동유럽 혁명과 1999년 유고슬라비아 혁명 등이다.

2월혁명으로 정치적 자유와 의회민주주의 제도는 불가피하게 상당 정도 시행됐지만, 소수민족의 권리는 전혀 보장되지 않았다. 소수민족의 권리와 신앙의 자유는 임시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노동자 소비에트와 소비에트 정당들이 약속하고 있었다. 그리고 10월혁명 이후 시행됐다.

요컨대 임시정부의 정치적 민주주의는 제한적이었던 반면에, 노동자 민주주의, 즉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래 지금까지 도대체 어느 민주주의 혁명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주의의 맹아를 찾을 수 있었던가?

그렇다면, 2월혁명은 뭐였나? 훗날 트로츠키는 10월혁명을 ‘연속혁명’으로 규정하고, 2월혁명은 10월혁명의 전주곡이자 “연속혁명의 에피소드적 단계”라고 규정했다. 연속혁명이란 노동자 혁명이 노동자 권력 장악과 함께 부르주아 혁명의 과제나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를 수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용어다.

레닌도 러시아에서 민주주의는 10월혁명으로 등장한 노동자 정부 하에서 구현됐다고 지적했다. 노동자 민주주의로 성격이 변해서 구현됐다고 말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냐 노동자 민주주의냐

아무튼 2월혁명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는 둘 다 노동자 소비에트(평의회)의 등장에 주목했다. 그들은 그것을 노동자 권력이 정치적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으로, 노동자 국가가 움트고 있는 것으로 봤다.

그래서 레닌은 〈4월 테제〉를 통해 볼셰비키 간부들과 혁명적 노동자들에게 더는 임시정부를 지지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러한 견해는 스탈린주의의 견해와 전혀 다른 것이다. 스탈린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을 사회주의자들이 위로부터 기존 국가를 장악하고 그걸 지렛대로 전면적 국유화를 단행하는 것(1928년 소련, 1946년 북한, 1947년 동유럽에서처럼)으로 이해한다.

레닌과 트로츠키의 사회주의 개념은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개념과 똑같은 것으로, 요약하면 아래로부터의 노동자 권력 또는 노동계급 자력해방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대체로 확립된 나라(한국 포함)에서 민주주의 혁명을 추구하는 것은 의도와 무관하게 실천에서는 개혁주의를 실행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물론 이런 곳에서도 민주적 권리들(한반도 주민의 경우 민족 통일을 포함함)을 방어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자나 민중주의자로서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노동자 민주주의의 씨앗을 발아시키고자 애쓰는 사회주의자로서 민주주의적 요구(박근혜 일당의 부패에 반대하는 것 같은)를 지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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