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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추문 폭로에서 파면까지
박근혜 퇴진 운동의 의의와 과제

 국민 감정에 기름을 부은 지난해 10월의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폭로가 마침내 박근혜 파면으로 일단락됐다. 넉 달 넘게 완강하게 퇴진 촛불을 치켜든 민중의 명백한 승리다!

박근혜는 엄청난 범죄와 거짓말이 백일하에 드러나도 스스로 물러나지 않았다. 박근혜의 권력 집착은 소름 돋을 정도였다. 세월호 침몰로 수백 명의 아이들이 죽어 가는 순간에 박근혜가 ‘올림머리’ 손질을 하고 있었다는 대목(“상징 조작”을 통한 권력 행사를 위해)에 이르면, 박근혜의 권력 집착은 사이코패스와 다름없다고 느끼게 된다. 4년여 전 이 나라 지배계급은 박근혜의 이런 “상징 조작”을 통해 노동계급을 다스리고자 대선에서 일치단결해 박근혜를 밀어 준 바 있다. 지금 그들은 내분해 있지만, 여전히 만만찮은 지배자들이 박근혜를 편들고 있을 것이다. 가령 구속된 이재용이 박근혜의 파면을 기뻐할까? 자유당 의원 60명도 박근혜 파면에 반대하고 있다.

올해 들어 박근혜의 반동이 강화되기 시작하자 퇴진 운동은 그에 반작용하면서 다시 성장했다. 덕분에 운동 지지자들의 정치적 각성이 광범하게 이뤄졌다. 지난해 12월 9일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이래 각종 여론 조사에서 탄핵 찬성 의견은 꾸준히 70~80퍼센트를 유지했다. 탄핵 반대 의견은 20퍼센트 수준이었다. 특히 눈여겨볼 것은, 헌재 결정에 대한 불복 의사 비율이었다. 탄핵 찬성 쪽의 (기각 시) 불복 의사 비율은 60퍼센트 가까이 됐다. 탄핵 반대 쪽의 (인용 시) 불복 비율은 30퍼센트 정도였다. 무엇보다, 국회 탄핵안 가결 뒤에도 석 달 동안 매주 평균 수십만 명 규모의 운동이 유지됐다. 바로 이 점이 헌재의 매우 보수적인 재판관들조차 감히 탄핵을 기각할 엄두를 못 내게 했을 것이다.

우리 편의 지금 승리는 다음 국면의 정치적 과제를 제기한다. 박근혜를 쫓아낸 대중의 거대한 힘과 에너지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이 물음에 답하고자 퇴진 운동을 돌아본다. 

촛불은 어떻게 켜졌는가?

극우 언론인 조갑제는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동력을 ‘언론의 난’이라고 주장했다. 조중동이 ‘최순실 마녀사냥, 대통령 인민재판, 촛불 우상화’를 주도했다는 것이다.

얄궂게도 진보·좌파 진영 안에서도 촛불이 〈조선일보〉와 JTBC의 폭로전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는 이데올로기주의적이고 음모론적인 시각이 있다.

위기에 처한 박근혜로는 우파 정권 재창출을 기대할 수 없다고 본 〈조선일보〉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폭로를 시작했다는 게 ‘〈조선일보〉 큰 그림설’의 요체다.

매우 우파적이고 친기업적인 〈조선일보〉가 우파 정권 재창출을 지지하는 것은 새삼스럽지 않다. 그러나 음모론과 달리 사태는 〈조선일보〉 뜻대로 전개되지 않았다. 사태 초기에 〈조선일보〉는 박근혜 탄핵이 아니라(퇴진은 말할 것도 없고) 박근혜 2선 후퇴를 주장했다. 1992년 노태우가 김영삼과 갈등하다 민자당(민주자유당)을 탈당하고 현승종 ‘중립’ 내각을 출범시킨 것을 근사치 모델로 한 발상이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 전개는 〈조선일보〉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12월 9일 국회는 2백30만 촛불에 휩쓸려 탄핵소추안을 가결시켰다.

촛불이 해냈다!

한편, 박근혜 퇴진 운동 지지자들은 분명 JTBC, 더 정확히 말해 손석희 사장에게 일체감을 느꼈다. 낯선 정치 풍경이 아닌 것이, 모든 거대한 대중 운동 초기에 개혁주의적 의식이 참가자 다수를 지배한다. 1905년 러시아 혁명은 정교회 사제(가폰)가 이끈 노동자들이 행렬을 이뤄, 경찰 간부와 공장주의 학정을 해결해 달라고 차르에 청원하면서 시작됐다.

재벌 미디어 그룹을 경영한다는 점이 손석희 앵커의 보도 내용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지만(노동자 투쟁 일반에 대한 JTBC 보도는 별로 많지 않다. 철도 민영화에는 반대했지만 말이다), 손석희 씨는 촛불 운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미 손석희의 〈뉴스룸〉은 세월호 참사를 2백 일 동안 연속 보도하면서 참사에 비통함을 금치 못한 많은 사람들한테서 큰 신뢰를 받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JTBC가 촛불을 만들었다고까지 주장하는 것은 레닌이 러시아 혁명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만큼 엘리트주의적이고 비(非)역사유물론적인 주장이다.

퇴진 운동은 박근혜 일당의 부패 문제가 기폭제 또는 뇌관이 돼 그동안 켜켜이 쌓인 대중의 분노를 점화시킨 결과로 분출했다. 부패는 박근혜 정부의 태생적 약점이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과 집권 초기 인사 실패, 세월호 참사 등등. 이렇듯 ‘박근혜 게이트’는 출범 당시부터 박근혜 정부에 내장돼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박근혜 임기가 너무 많이 남아 많은 사람들이 싸워 이길 수 있다는 희망을 갖지 못했다. 선거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 경제를 회복시킬 수도 있다는 기대감, 하층민에게는 복지를 제공할지 모른다는 환상 등이 작용했다.

그러나 경제 위기가 심화하면서 경제 회복에 대한 기대가 산산이 깨졌다.

게다가 조선업·해운업 구조조정과 주요 경제정책들을 둘러싼 지배자들의 내분이 심각해졌다. 지난해 4·13 총선에서 정부 여당이 참패한 후 지배자들 사이에서 우파 정권 재창출이 어려울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이 점증한 것도 내분을 격화시켰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부패의 실체와 세부적 양상이 폭로되기 시작했다.

누가 촛불을 들었는가?

지배자들의 내부 갈등 격화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자극했는데, 이것도 박근혜의 위기 악화에 한몫했다. 특히, 퇴진 운동이 분출하기 직전에 벌어진 두 개의 노동자 투쟁이 지배자들을 긴장시켰다.

현대차 노동자들이 12년 만에 전면 파업을 벌였다. 지배자들은 현대차 파업의 경제적 손실이 3조 원대에 이르자 신경이 곤두섰다. 9월 하순에는 철도가 중심이 된 공공부문 노동자 5만여 명이 파업에 나섰다. 화물연대 노동자들도 부산신항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이며 물류 마비를 위협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터졌고, 마침내 10월 29일 첫 퇴진 운동이 서울에서 시작됐다. 특히, 철도 파업은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과 수도 중심지에서 만나면서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박근혜 반대 운동은 2002년과 2008년의 촛불 운동과 달리, 시작부터 정권 퇴진을 요구했다. 1987년 6월항쟁 이래 처음으로 진보·좌파 운동 진영 전체가 동의한 정권 퇴진 운동이었다. 운동의 규모도 엄청나게 커서, 12월 초에는 한국 역사상 최대 규모인 2백30만 명가량이 항의 집회에 참가했다.

운동 참가자들은 단지 부패에만 항의를 한정하지 않았다. 박근혜의 4년 ‘학정’들에 대한 어마어마한 분노가 쏟아져 나왔다. 그런 점에서 운동 지도부인 ‘퇴진행동’ 측이 노동자들의 참가와 독자적인 투쟁을 고무하지 않은 것은 크게 아쉽다.

이 운동에는 미조직 노동계급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참가한 경우가 많았다. 〈한겨레〉는 기존 조직이 아닌 개인들의 운동이었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물론 거대한 운동이 갑자기 일어나면 미조직된 개인들이 운동에 뛰어들어 큰 활력과 놀라운 자발성·헌신성을 보여 주는 것은 역사에서 매우 흔한 일이다.

그러나 이번 운동 과정에서 “기존 조직이 거부당했다”는 〈한겨레〉의 평가는 전혀 사실무근이다. 2002년과 2008년 촛불 때는 조직된 좌파를 배제하는 정서가 강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퇴진 운동이 규모 면에서 비약하게 된 계기는 11월 12일 노동자대회였다. 민주노총 노동자 15만 명이 참가했다. 그런데 노동자대회가 진행되던 그 시간에 이미 민주노총 조합원들보다 몇 배 많은 사람들이 집회에 모여들었다. 또, 철도 파업은 퇴진 운동 참가자들한테서 커다란 지지를 받았다. “조직 노동자들이 고립돼 있다”는 진보진영 온건파의 주장이 전혀 참말이 아님을 보여 줬다.

노동운동과 좌파가 선구적으로 이 운동을 발의했다. 특히 퇴진 운동이 처음 분출한 10월 29일부터 퇴진 운동이 전국노동자대회와 결합되는 11월 초순까지 노동운동과 좌파는 주도적인 구실을 했다.

그러나 노동운동과 좌파가 퇴진 운동을 정치적으로 지도하지는 못했다. 강력했지만 헤게모니적이진 못했던 것이다. 퇴진행동 온건파들은 노동계급, 특히 조직된 노동계급의 참가를 특별히 호소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운동이 정치적 부패에 항의해 선거로 정권을 교체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민주노총 지도자들도 형식적인(11월 30일) 하루 파업 외에는 파업 투쟁을 통해 퇴진 운동을 심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중차대한 국가권력 문제를 감당하지 못할 거라는 소심함 탓이었을 것이다.

좌파로 말할 것 같으면, 특히 노동자연대는 선구적으로 10월 29일 퇴진 집회를 발의하고 이 운동에 적극 뛰어들었지만, 조직 규모가 상황 전개에 계급투쟁의 성격을 부여하는 돌파구를 내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민주노총 집행부가 제안한 민중단일후보 전술이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 부결된 것도 퇴진 운동 헤게모니의 한계와 관계 있다. 노동운동이 퇴진 운동에 정치적 지도력을 행사하지 못함에 따라 노동계의 독자적 대선 후보 전술이 지지를 받지 못한 것이다. 운동의 최대 수혜자는 민주당이 독차지하고 있다.

퇴진 운동은 박근혜 일당의 정치적 부패에 반대하는 운동으로, 민주주의 투쟁이었다. 그런데 퇴진 운동이 짧은 시간에 폭발적으로 분출했다는 것은 이미 그전에 물밑에서 정치적 급진화가 이뤄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4·13 총선에서 집권당이 참패한 것이나 7월부터 노동자 투쟁이 고양된 것이 그런 정서가 표출된 사례들일 것이다. 좌파라면 박근혜 퇴진 촛불 운동 속에서 노동자들의 참가와 독자적 요구를 위한 투쟁(특히 파업을 포함해)을 강조해야 했다.

퇴진 운동 속의 정치적 세력관계

박근혜 퇴진 운동 국면에서 핵심 정치 플레이어는 세 세력이었다. 첫째, 박근혜 정권과 옛 새누리당, 그리고 뇌물 비리에 연루된 핵심 재벌들이었다. 둘째, 노동자와 민중(천대받는 사람들)이 있었다. 셋째, 그 중간에 주류 야당이 있었다.

주류 야당, 특히 민주당의 존재는 퇴진행동 안에서 언제나 뜨거운 쟁점이었다. 민주당은 부패 문제에조차 깨끗하지 않다(그 당의 유력한 대선 후보 중 한 명인 안희정은 부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된 전력이 있다).

이 환희를 보라!

그래서인지 몰라도 민주당은 처음에 박근혜 퇴진을 지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국중립내각과 특검을 요구했다. 그러다 퇴진 운동이 매우 큰 규모로 성장한 12월 8일에야 박근혜 탄핵을 결정했다. 더구나 철도 파업 종료를 전제로 한 결정이었다.

이때까지 아래로부터의 퇴진 운동에 주도권을 빼앗겼던 민주당은 탄핵안 통과라는 의회 절차로 정치적 주도권을 쥐기 시작했다. 일종의 공중납치였다.

탄핵 이후, 퇴진 운동은 어디로?

헌재가 박근혜 파면을 결정한 것은 퇴진 운동의 중요한 승리이지만, 상황 종료는 아니다. 헌재는 박근혜가 “중대한 법 위배 행위”를 저질렀다고 했다. 따라서 박근혜는 구속돼야 한다. 그가 민가에서 반동을 도모할 수 있도록 편히 놔둬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박근혜가 제거됐어도 박근혜 정권은 남아 있다. 어쩌면 국정원 같은 우익이 득실대는 기구들이 선거 부정을 자행할 위험성도 존재한다. 우익도 다시금 거리로 나올 수 있다. 그래서 대선 기간에 세력균형을 뒤집으려 애쓸 수 있다. 그래야 선거에서 기회가 올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특히, ‘박근혜 없는 박근혜 정부’가 박근혜의 적폐들을 밀고갈 것이다. 헌재 결정 직전에 황교안은 안보와 치안을 매우 강조했다. 커다란 승리로 자신감을 얻은 대중이 행동에 동원을 해제하도록 하겠다는 뜻이다. 사실상 같은 맥락에서 기업주 언론들도 헌재 결정 이후 “통합”의 합창을 부른다. 민주당도 이 합창에 가세했다. 그러나 박근혜 개인이 제거됐다고 해서 대중의 삶이 저절로 나아지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박근혜 개인의 제거에서 멈출 것이 아니라 박근혜가 만들어 낸 제도와 인물을 청산하는 운동을 해야 한다.

따라서 퇴진행동 조직은 유지돼야 하고, 때때로 촛불은 계속돼야 한다.

'광장을 떠나라'며 황교안이 버티고 있다.

한편, 헌재가 박근혜 파면 결정을 내림으로써 60일 이내에 대선을 치르게 된다.

지난 몇 년간 그리스의 반긴축 투쟁은 시리자의 집권으로, 스페인 광장 점거 운동은 포데모스 창당으로, 영국의 난민 방어 운동은 노동당 당수 제러미 코빈 시대의 개막으로 이어졌다.

지금 우파 진영의 대선 일기도는 흐리다. 대중의 정권 교체 열망이 매우 강하기 때문이다. 신년 여론 조사에서 국민의 80퍼센트가 정권 교체를 지지했다.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라도 새누리당이 이기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문재인은 2012년 대선 때보다 오른쪽에 있으면서 최근 서구의 용어로 “극단적 중도파” 구실을 하고 있다. 경제 위기 상황 때문이다. 경제 위기는 개혁주의 정당의 운신의 폭을 좁힌다. 개혁주의 정당이 개혁을 제공한다는 약속으로 집권하지만 막상 집권하면 체제의 포로가 돼서 개혁을 제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집권해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새 정부는 매우 심각한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은 벌써부터 대중의 기대감을 낮추려고 한다. 그는 주되게 우파에 대한 대중의 두려움을 집권의 명분으로 삼으려 할 공산이 크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대선을 기다리기보다 박근혜 파면을 통해 얻은 자신감으로 스스로 투쟁을 벌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것이 개혁을 제공받는 더 좋은 방법이다.

물론 이것은 선거 무용론으로 풀이돼선 안 된다. 현실정치에 영향을 미치려면 현실정치 속에서 한 축을 차지하는 개혁과 진보 염원 대중의 정서와 접점을 이뤄야 한다.

그렇다면 좌파는 투표에 참가해서 그런 수십만, 수백만 대중에게 연대의 표시로서 모종의 진보적 또는 개혁적 투표를 해야 한다. 그러나 진보·개혁 염원 대중에게 이무런 환상도 갖지 말라고 경계심을 촉구하면서 그래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