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은 피난민의 아들로 거제에서 태어나 가난한 상인의 아들로 자랐다. 《사상계》 등을 읽고, 학내 시위에도 동참하며 고교 시절을 보낸 후 경희대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총학생회 간부로 활동했는데 8년 반 정도의 대학생 시절 중 두 번 구속됐다.

시위를 조직하는 와중에 사법고시에 응시해 합격했지만 판사 임용에서 탈락 후 부산으로 내려가 노무현과 함께 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문재인은 노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민주사회를 위한 부산경남변호사모임을 발족하고 〈한겨레신문〉 창간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이 시절 문재인과 노무현은 박종철 고문 치사 추모제에 참가했다가 연행된 일도 있었다. 한진중공업 등 영남권에서 노동계 변호인으로 활약했다. 지금 이 지역 노동계 일각에서 조직적 지지 움직임이 일어난 배경인 듯하다.

1987년 대선에서 김대중과 김영삼 사이 후보단일화를 (헛되이) 지지했던 문재인은 1988년 김영삼이 국회의원 출마를 제안했지만 거절한다.(이때 노무현은 출마해 당선했다.) 이후 노무현이 부산시장 출마를 권한 것도 거절했다.

2002년 대선을 앞둔 민주당 내부 경선에서 노무현의 부산선대본부장을 맡은 뒤, 민정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했다. ‘왕수석’ 문재인은 2004년, 2006년에 잠시 물러났지만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을 거치면서 노무현 정부의 처음과 끝을 같이했다.

배신과 환멸

민주화 운동 경력은 2012년 대선에서 독재자의 생물학적·정치적 적자인 박근혜와 대비되며 문재인에게 진보적 이미지를 입혔다. 그런데 이를 이용해 문재인은 노무현 정부를 포장하고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 한다.

그러나 많은 노동계급 대중이 노무현 정부 시절의 위선과 거짓을 기억한다. 한때 ”사람 사는 세상”을 외쳤던 노무현은 집권하자 “기업 하기 좋은 나라”를 외쳤다. 문재인은 노무현 정부에 “신자유주의 딱지를 붙이는 것은 … [우익이] ‘친북좌파’라는 딱지를 붙이는 것과 그 속성에서는 매한가지다” 하며 억울해 한다. 그러나 노무현은 당선자 시절 민주노총을 방문해서 “신자유주의적 요구는 대세[이므로] 수용”해야 한다고 했다.

임기 초반 많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항의하자 노무현은 냉혹하게 “분신을 투쟁수단으로 삼는 시대는 지났다”며 “민주노총은 더 이상 노동운동단체가 아니다”고 비난했다. “귀족노조”라는 말도 노무현이 먼저 꺼냈다. 그러나 자살을 선택한 노동자들에는 한때 문재인이 변호했던 한진중공업의 정규직 김주익 열사도 포함돼 있었다.

문재인은 “노동계의 무리한 요구가 오히려 개혁을 가로막[았다]”며 정권 실패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돌리기까지 한다. 민주당 집권 후 노동자 대중의 개혁 염원에 문재인이 어떻게 대응할지 읽힌다.

그 시절 “정치적 민주주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발전”시켰다는 자화자찬도 낯뜨겁다. 그러나 노무현은 국가보안법 폐지에 완전히 실패했다. 문재인은 이를 두고 “진보·개혁진영의 전체 역량부족을 보여 주는 상징처럼 여겨진다”며 “우리 모두의 반성이 있어야 한다”고 책임을 떠넘긴다. 그리고 노무현 정부는 투쟁에 나선 노동자를 1천여 명이나 구속했다.

2005년에는 전용철·홍덕표 농민이 집회에서 경찰 폭력으로 사망했다. 당시 경찰은 백남기 농민 때처럼 책임을 회피했다. 노무현은 “이 같은 시위문화가 계속된다면 앞으로도 돌발사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며 시위대에 책임을 돌렸다. 한미FTA 반대 집회를 원천 봉쇄했고, 평택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진압에는 군인까지 동원했다. 부안 핵 폐기장 반대 투쟁이 거세지자 인구 2만 5천의 부안읍에 전경 8천여 명을 주둔시켜 “계엄령”을 방불케 했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국회 의석이 1백52석 과반이면서도 자신들이 약속한 4대 개혁(국가보안법·사립학교법·과거사 규명법·언론관계법 개정)에 실패했다. 오히려 4대 개악(파병연장 동의안, 공무원노조 악법, 기업도시법, 경제자유구역법)을 관철시켰다. 그리고서 나온 게 ‘대연정’ 발언이었다. 2016년 총선에서 여소야대가 되고도 백남기 특검, 세월호 특별법 개정 등 뭐 하나 제대로 처리된 게 없었던 때와 비슷했다.

이라크 파병으로 희생된 김선일 씨 문제로 당시 외교부장관이었던 반기문 사퇴 요구가 있었는데, 문재인은 사퇴 요구가 부당했다고 평가한다.

모호함이 “원칙”

세월호 참사 진상 규명을 지지한다지만, 2014년 박영선이 새누리당과 야합해 누더기 특별법을 합의해 왔을 때 이를 인정한 것도 문재인이다. 이번에도 탈당 위협을 한 박영선을 붙잡고 적폐 청산 대신 통합 정부를 강조한다. 그 연장선에서 한나라당 대표였던 김덕룡을 영입하려 하고, 박근혜 경제교사 출신 김광두도 영입했다. 김종인, 홍석현 등도 다시 영입할 듯하다. 안철수더러 적폐 세력과 연대한다며 비판한 것이 적잖이 우습다.

2015년 연말에는 민주노총 지도부와 만나 “노동개악 5법 저지는 분명한 당론”이라고 해 놓고는 몇 시간 뒤에 자기 당 원내대표가 이를 뒤집자 문재인은 “반기업 정당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며 쟁점 법안의 협상을 지시했다.

이런 행보 덕분에 박근혜가 거듭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재인은 “좌우로 벌려!” (포퓰리스트) 정책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니, ‘모호함’이 원칙인 듯 행동한다. 그러나 언제나 실천적 결론은 기업주들 우선이다. 왜냐하면 문재인과 민주당은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에 때때로 각을 세우며 대중의 환심을 사려 하지만 기본적으로 자본가들의 정치적·물질적 지지를 두고 새누리당과 경쟁하는 한국 지배계급의 제2선호 정당이다. 한때 노동자를 변호했던 문재인이 노무현 정부의 배신과 실패를 포장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문재인은 “보수 진영보다 더 뛰어난 경제성장 전략을 가지고 있어야 국가 경영을 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지배자들에게 믿음직한 지도자로 보이려는 문재인의 전략을 잘 보여 준다. 2015년 새정치민주연합(현 더불어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중소기업, 영세자영업자들이 어떻게 부담할 수 있느냐”며 최저임금 1만 원 요구를 반대했다.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박용만을 만나 “반기업 정당이 아니다” 하고 아부했다. 그는 새누리당과 야합해서 공무원연금을 대폭 삭감함으로써 이 발언을 입증해 보였다.

문재인은 이라크 파병에 대해 “큰 국익을 위해 필요하면 파병할 수도 있다. 그것이 국가 경영이고 진보·개혁진영이 집권을 위해선 그런 판단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집권과 안정적 권력 유지가 가장 우선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확장을 가로막았던 근본주의에서 벗어나” “유연한 진보”가 돼야 한다거나, 노동운동이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은 문제라며 진보·좌파와 노동운동을 길들이려 한다. 결국 이번에도 최종 대선 공약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 재협상이 사라졌고, 사드 배치도 찬성으로 말을 바꾸고 있다. 2012년에는 ‘경제민주화’를 이야기했는데 이번 대선의 경제공약인 J노믹스에서는 이마저도 빠지고 성장을 강조한다.

이처럼 문재인이 걸어온 길은 문재인이 집권해도 적폐 청산 과제 수행에 시늉만 낼 것이 분명하다는 걸 보여 준다. 대중이 설사 그에게 투표한대도 절대로 아무 환상 없이 그래야 하고, 무엇보다 스스로 싸워야 하는 이유다.


※ 참고 : 《문재인의 운명》(문재인 지음, 가교출판, 2011년), 《1219 끝이 시작이다》(문재인 지음, 바다출판사, 2013년), 《대한민국이 묻는다》(문재인 지음, 21세기북스, 2017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