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 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올 한 해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꾸준히 번역 연재한다.


1917년 2월 혁명으로 들어선 임시정부는 메이데이를 합법화하고 공식 축제일로 만들었다.

그러나 새로 합법화된 메이데이 시위로 임시정부에 대한 불만은 더 깊어졌을 뿐이었다.

러시아 혁명가 레온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다. “모든 도시에서 기념대회와 시위가 일어났다. 모든 사람이 메이데이를 기념하는 것 같았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 전방의 군대도 메이데이를 기념했다. 집회·연설·배너·혁명가요 소식이 전장에서 들려왔으며, 독일군이 시위에 호응하기도 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메이데이 모습

차르 시절에 합법적인 행진은 장례 행렬뿐이었다.

1917년 이전 메이데이 시위는 수많은 노동자들을 거리로 불러 모았지만 강제 해산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제는 무장한 노동자들이 페트로그라드 도심을 행진하고 전쟁 포로들이 병사들과 나란히 걸었다.

동궁(겨울궁전)을 포함해 동궁광장 주변의 모든 건물이 혁명적 구호를 내건 배너로 장식됐다.

당시 외무장관이던 파벨 밀류코프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국제 노동자들의 휴일인 메이데이가 러시아에서 처음 공개적으로 기념된 날”이었으며 “공공 건물들은 ‘인터내셔널 만세’가 쓰인 거대한 배너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 배너 중 하나가 임시정부가 자리잡고 있던 마린스키 궁전 건물에 펼쳐져 있었다. 트로츠키에 따르면, “임시정부는 이 배너의 내용에 동의하지 않았고 불안해 했지만, 걷어 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날 러시아 전체가 하나가 된 듯 보였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승리감에 하나로 똘똘 뭉친 듯 보였지만 시위 저변에 긴장감이 흘렀다”고 덧붙였다.

많은 투쟁이 공장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식량 배급량은 계속 줄고, 전쟁에 대한 불만은 커져 갔다.

메이데이 집회 후 단 며칠 만에 밀류코프 반대 시위가 터져 나왔다. 밀류코프가 [제1차세계대전에서 러시아와 한편에서 싸우고 있던] 연합국 정부들에게 러시아가 계속 참전할 것이라고 약속한 문서가 폭로돼서였다.

오늘날 ‘4월 위기’로 알려지게 되는 맹렬한 시위가 이어졌다. 병사와 무장한 노동자들이 “밀류코프 타도”, “밀류코프 사퇴하라”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행진했다.

“임시정부 타도”라는 구호를 내건 사람들도 있었다.

볼셰비키는 밀류코프를 몰아내려는 무장 시위를 조직하는 데 일조했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역사가 수하노프는 이렇게 썼다. “엄청나게 흥분된 분위기가 주로 노동계급 지구, 공장, 병영에 가득했다.”

“많은 공장이 가동되지 않았고 지역 단위의 모임이 곳곳에서 열리고 있었다.”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볼셰비키 지도자 레닌에 대한 공격이 늘었다. 메이데이 며칠 전 부상당한 병사들이 레닌에 반대하며 러시아가 계속 참전해야 한다고 시위를 벌였다. 신문들은 레닌이 독일의 첩자이며 민중의 적이라는 주장을 보도했다.

그러나 수도 페트로그라드에서 소비에트는 그런 거짓말에 단호하게 맞서며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메이데이 즈음에 수하노프가 쓴 말을 보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진정한 국가 권력을 모두 쥐고 있었고 혁명의 운명이 그 손에 통째로 달려 있었다.”

다가올 두 번째 혁명이 성공하려면 그런 자신감이 러시아 전역으로 확산될 필요가 있었다.

출처: 영국의 혁명적 좌파 신문 <소셜리스트 워커> 25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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