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와 자유주의자들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볼셰비키가 1917년 10월 혁명으로 잔인한 독재 정권을 세웠고, 이견∙논쟁∙소수파 권리 같은 건 모조리 없애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공개적 토론은 볼셰비키의 조직 방식이었던 민주적 중앙집중주의의 핵심이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모임

날카로운 논쟁이 수없이 벌어졌다. 1917년 4월에는 2월 혁명 후에 들어선 임시정부를 지지할 것인지, 임시정부에 맞선 운동을 조직할 것인지를 둘러싸고 격렬한 토론이 벌어졌다.

볼셰비키 지도자였던 레닌의 의견[‘임시정부를 지지해서는 안 된다’]이 처음에는 완전히 소수파였다. 레닌은 당 기관지에 개인 이름으로 의견을 실을 수밖에 없었고,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는 레닌의 견해가 신문 편집부나 당 중앙위원회 다수의 의견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글을 썼다. 

1917~21년에 있었던 주요 논쟁 대부분은 공개적으로 진행됐다. 독일과의 전쟁을 끝냈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대한 논쟁이나, 노동조합의 구실을 둘러싸고 1920~21년에 벌어진 논쟁도 마찬가지였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둘러싼 논쟁에서 니콜라이 부하린과 “좌파 공산주의자들”은 공개적으로 다수파에 맞서, 반대 의견[강화에 반대하고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견해]을 실은 신문을 열 다섯 차례나 발행했다.

정부 자체도 일당 체제가 아니었다.  

10월 혁명 후 레닌은 [노동자 정부 즉,] 인민위원회의 의장직을 맡았는데 인민위원회는 소비에트(노동자평의회)에 보고하고 소비에트에 의해 소환될 수 있었다. 또한 볼셰비키뿐 아니라 좌파 사회혁명당 인민위원들도 있었다.

미국∙영국 등 14개 제국주의 국가의 침략 군대와 옛 차르 시대의 “백군”이 일으킨 반혁명 공세가 맹위를 떨치던 와중이었는데도 그랬다.

10월 혁명이 승리한 뒤에도 숨 돌릴 틈 없었다. 혁명을 성공시킨 노동계급은 혁명 방어를 위해 싸움에 나섰으며 거의 몰살당했다.

노동자들이 사라지자 소비에트는 속이 빈 껍데기만 남았고 볼셰비키는 비대해진 관료층을 떠받쳐야 하는 처지가 됐다. 도시 주민들이 기아에 허덕이자 적군은 농촌에서 강제로 곡물을 징발했다. 이것이 “적색 테러”라 불렸던 정책이었다.

이것은 전혀 인기 없는 정책이었지만 반혁명 세력이 일으킨 위기에 따른 불가피한 조처였다.

내전에 대응해 (볼셰비키가 아니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반혁명과 사보타주에 맞서는 전 러시아 특별위원회’(체카)를 설립했다. 억압적 조치에 반대한다고 익히 알려진 펠릭스 제르진스키가 체카의 수장으로 임명됐다.

체카는 소비에트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추적하는 일을 했지만 비밀경찰로서 권한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1918년 3월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체결되자 좌파 사회혁명당은 정부에서 철수하며 반란을 선포했다.

볼셰비키는 신속히 반란을 분쇄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허약한 노동자 국가는 무너질 것이었다. 그러나 반란을 이끌었던 마리아 스피리도노바에게는 1년 형이 선고됐고 “과거 혁명에 헌신한 경력”이 인정돼 바로 사면됐다.

1920년에는 포위된 혁명을 짓누르는 압력이 갈수록 커지는 것을 반영해 당 내에서 노동자반대파가 형성됐다.

노동자반대파는 노동조합과 공장위원회가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내전을 거치며 경제 운영이 모두 국가에 맡겨져 있었는데 이에 반대한 것이다. 노동자반대파의 주장은 볼셰비키 당 전체에 배포됐다.

그러나 혁명이 국제적으로 고립되면서 민주주의는 점차 제한됐다.

애초 내키지 않지만 불가피하게 도입됐던 일들을 이제 새로운 본보기로 여기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1928년에 스탈린의 반혁명이 승리를 거두자 민주주의는 완전히 파괴됐다. [1924년에 숨진] 레닌은 병상에서 임종을 맞이하면서도 스탈린에 반대했다.

볼셰비키는 노동계급 민주주의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쟁취하고자 투쟁했던 세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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