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서평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
반성폭력 운동의 발전을 위한 길라잡이

성폭력은 여성 차별의 가장 끔찍한 단면이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성폭력을 비롯한 모든 여성 차별과 그 근원을 제거하기 위해 투쟁해 왔다. 페미니스트들도 성폭력 반대 운동에 분투해 왔고, 유의미한 성과를 남기기도 했다.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 최미진 지음, 책갈피, 120쪽, 5,500원

그럼에도 여전히 여성들은 성폭력을 당해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피해 여성들이 도리어 비난받고 의심받는 일도 여전히 벌어진다. 여전히 성폭력 신고는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이런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바꾸기 위해 어떤 정치와 수단이 필요한지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어 왔다. 성폭력 문제는 대개 개인 관계에서 표출되어 복잡하고 까다로운 경우가 적지 않다. 문제의 본질을 파헤치고 진정한 교훈을 남기려면 분명한 정치와 대응이 필요하다.

아쉽게도 그동안 일부 페미니스트들이 차별 현실을 바꾸고자 사용해 온 개념들은 그 의도와 달리 언제나 올바른 효과와 결론을 내는 것은 아니었다. 가령,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가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여성 운동 내에서도 이 개념들의 유효성에 대한 논의가 활발한 상태다.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논쟁》은 논쟁의 중심에 있는 두 개념이 탄생한 이해할 만한 차별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이 개념을 비판적으로 돌아보며 반성폭력 운동에 대한 발전적 전망을 제시하는 책이다. 저자 최미진이 속한 노동자연대는 2000년대 초부터 ‘성폭력 2차가해’와 ‘피해자 중심주의’ 개념에 도전하며 비판적 평가와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 책은 바로 이런 노력을 집대성한 결과물이다.

이 책은 두 개념이 어떤 차별 현실을 바꾸고자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그럼에도 어떤 혼란과 부작용을 낳았는지, 대안적 개념과 절차는 무엇인지를 조목조목 설명한다.

가령, 저자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가해자 존중주의와 물증 지상주의에 대한 정당한 반발”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성폭력 판단의 기준을 (가해지목인의) 객관적 행위가 아니라 (피해호소인의) 인식과 감정에 의해 규정”하다 보니 “행위의 객관적 실체를 무시”하고 “진상조사가 무의미”해질 수 있음을 지적한다.

또한 ‘2차가해’ 개념도 “가해자 온정주의, 피해자 유발론’을 반대하며 성폭력 피해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피해자 중심주의’를 성역화하기 위한 방호벽”으로 사용되면서 많은 문제점을 낳았다고 지적한다. 진상 규명을 위해 피해호소인의 진술에 합리적이고 필요한 의문을 던지는 것도 ‘2차가해’로 규정되거나 성폭력과 아무런 관련성이 없는 언행도 ‘2차가해’로 몰리면서 불필요한 분열과 불신이 조장됐다. 살벌한 도덕주의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함께 교훈을 배우거나, 협력적 대응을 모색하려는 시도가 묵살되기 쉬웠다.

이 책에는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에 의존해 벌어진 사건들이 어떤 식의 문제를 야기했는지를 여러 사례를 들어 생생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구체적인 교훈을 이끌어 내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2012년 영국 런던에서 벌어진 반성폭력 시위 “우리가 무엇을 입든, 어딜 가든, 예스(YES)는 예스(YES)고, 노(NO)는 노(NO)ⓒ출처 chrisjohnbeckett(플리커)

발전적 대안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피해자 중심주의’-‘2차가해’ 개념의 단점을 지적하고 사례를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필자는 두 개념으로 인한 문제가 심각하다면 “더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운동의 발전에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또한 두 개념의 문제점에 대한 여성운동 내 활동가들의 자성적 목소리를 환영하면서도 ‘오·남용만 주의하면 된다’는 등 절충적이거나 일관되지 않은 입장에 머무르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이 책은 반성폭력 운동에 필요한 합리적인 대안적 개념을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가령 저자는 주관주의에 바탕을 둔 ’피해자 중심주의’는 “증거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증거주의는 물증만이 성폭력 입증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보는 물증 지상주의와는 다르다. 피해호소 여성의 진술도 증거에 포함된다.

대안적 개념과 함께 책 말미에 소개된 “성 관련 분쟁의 새로운 해결 절차”도 매우 유용하다.

마지막으로 “성폭력을 어떻게 정의하고 어떻게 실천에 적용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여성 해방의 전략과 연결해 설명한 부분은 독자들의 시야를 깊고 풍부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이 책은 성폭력에 맞서 어떻게 싸워야 할지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여러 번 읽어도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지혜로운 해법을 제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