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8월 5일 노동자연대 학생그룹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고故 함석헌 선생은 1945년 해방 직후 평북 인민위원회 문교부장으로 활동했다가 신의주에서 일어난 반소 학생 시위 사건에 연루돼 월남해야 했다. 그 후 남한에서는 군사독재에 맞섰던 인사다. 그런데 함석헌 선생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해방은 도둑같이 뜻밖에 찾아왔다.”

이처럼 일본 제국주의의 폭압에 시달려 온 조선 민중의 처지에서 1945년 해방은 정말 거짓말 같이 찾아온 “그날”이었다.

그럼에도 기뻤다. 얼마 안 가, 일제의 35년 압제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이 반도 전체로 퍼졌다.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제국주의 압제에서 벗어나 식민 잔재를 남김없이 청산하고 독립 국가를 건설할 꿈이 드디어 현실이 될 듯했다. 해방 직후 한반도에서는 건국준비위원회, 각 지역 인민위원회, 자치 무장대 등 자주적 조직들이 우후죽순 생겼다.

노동자들은 일본인 자본가들을 밀어내고 공장을 접수해 스스로 관리하려고 했다(자주관리운동). 노동조합으로도 많은 노동자들이 조직되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비호를 받던 지주 밑에서 숨죽이던 농민들은 가혹한 소작제에서 벗어나 자신의 땅을 찾고자 했다.

이런 염원을 실현하는 데서 일본 지배자들에 협력해 성장해 온 조선인 부르주아지들은 주도적 구실을 할 처지가 아니었다. 지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움츠러든 사이, 경찰 등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기구에 몸담았던 자들은 모두 도망쳐 자기 목숨 챙기기 바빴다.

이처럼 제국주의는 민족 내부의 단결을 고무하기보다 민족 내부에 계급 분단을 선명하게 만드는 동인이었다. 많은 노동자와 농민들이 같은 조선인 자본가와 지주들을 증오하며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지지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불과 3년도 안 돼 최악의 반동으로 전환됐다. 그리고 1950년 한국전쟁으로 야만이 일상화돼, 많은 사람들이 희생돼야 했고 그 부정적 유산이 이후 노동계급과 민중의 어깨 위를 짓누르게 됐다. 왜 1945년 8월 해방이 보여 준 희망이 금세 절망으로 뒤집어진 것일까.

분할 점령

1945년 해방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민중의 의사와 관계 없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를 분할 점령해 버렸다.

당시 전 세계에서 미국과 소련 두 제국주의 강대국의 전후 점령 정책은 자신들 간의 “세력권” 재분할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은 제2차세계대전 종결 전부터 유럽과 아시아 등지를 분할하는 세력권 조정 협상에 돌입했고, 합의가 어려운 곳은 재빨리 자국 군대를 보내 깃발 꽂기에 몰두했다.

1945년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이 전쟁은 과거와는 다르다. 누구든 어떤 영토를 점령하면 그곳에 자신의 사회 체제를 심는다. 누구든 자기의 군대가 미치는 곳까지 자신의 고유한 체제를 이식하고 있다.” 즉, 미국과 소련 모두 자신의 세력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자 점령지에 자신들의 체제를 이식하고, 자국한테 우호적인 정권을 수립하려고 애썼다. 당시 패전국 지역을 중심으로 노동자·민중의 급진화 움직임이 컸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모두 점령지에서 노동자·민중의 ‘아래로부터 혁명’ 움직임을 철저하게 억눌렀다.  

1945년 전후 세력권 분할을 위해 얄타회담에 모인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이는 한반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미국과 소련은 모두 한반도를 안보상의 중요 지역, 또는 동아시아에서의 세력권 확보를 위해 반드시 차지해야 할 전초 기지로 인식했다. 따라서 미국과 소련은 이 땅에 해방자가 아니라 점령군으로서 들어왔던 것이다. 당시 “미국 놈 믿지 말고, 소련 놈에 속지 말라”는 말이 인구에 회자됐던 까닭이다.

소련군은 한반도 북부에 들어오자마자 점령군 행세를 하기 시작했다. 약탈, 폭행, 성폭행, 살인 등 온갖 문제를 저질렀다. 

당시 소련 점령 당국에게 북한은 전리품과 다름없었다. 한동안 미곡을 본국으로 반출해 가고 주요 공장들에서 기계와 장비를 뜯어다가 본국으로 보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소련 점령 당국은 북한에서 노동자와 민중의 자생적 움직임을 철저히 억제했다. 노동자들의 자주관리운동은 중단됐고, 소련 점령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는 노동자들의 행동은 “조합주의” 내지 “좌경적 오류”라고 거센 비난을 받았다. 주요 공장은 소련군이 직접 통제했고, 자위대 등의 무장조직은 해산된 데 이어 무력은 소련군과 보안대로 집중됐다. 북한에서 인민위원회는 소련군의 지시로 세력이 재편되는 등 자치 권력의 성격을 금세 상실했다.

1946년 들어 북한에서 이른바 ‘인민민주주의 개혁’이 진행돼 토지가 분배되고 주요 산업이 국유화됐다. 그러나 이는 자본축적의 중심을 형성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혁명’이었지, 이를 통해 북한이 사회주의에 이른 게 아니었다. 산업이 국유화됐지만, 노동자들은 이를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 농민들은 땅을 받았지만, 현물세와 애국미 헌납 등 무거운 부담도 함께 받았다.

소련은 미국이 남한에서 한 것처럼 자신들이 점령한 한반도 북부에서만이라도 우호적 정권을 수립하려고 했다. 해방 정국 당시 북한에서 대두된 민주기지론은 바로 이런 논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를 충실하게 대변하며 북한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 이가 바로 김일성이었다. 즉, 소련 제국주의와 김일성도 분단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남한은 화약통”

1945년 9월 한반도에 들어온 미군이 남한에서 한 첫 일은 건준(인민공화국)을 무시하고 일본 제국주의의 옛 식민기구를 고스란히 인수한 것이다.

미군정은 노동자와 민중의 아래로부터의 움직임을 적대하며, 친일·친미·반공주의자들을 현지 지배 파트너로 택했다. 이는 민중의 염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당시 미군정의 인식은 1945년 9월 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 메럴 배닝호프가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서 드러난다.

“남한은 불꽃만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과 같[습니]다. … 선동가들이 활동하기에 딱 좋은 상태입니다. … 가장 고무적인 단 하나의 요소는 나이가 많고 교육을 잘 받는 한국인들 가운데 수백 명의 보수주의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중 다수가 일본에 봉사했던 사람들이긴 하지만 그런 낙인은 결국에는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강조는 인용자)

해방 당시 조선총독부 하의 조선인 경찰은 8천 명이었는데, 미군정은 숨어 있던 이들을 모두 복귀시키고 경찰력을 3개월 만에 1만 5천 명으로 급격히 늘렸다. 그리고 미군정은 자본가, 우익 집단들과 손잡고 자주관리운동 분쇄에 나섰다. 각지 인민위원회도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미군정의 시장주의 경제 정책도 대중의 불만을 키웠다. 미군정의 경제 정책 때문에 인플레이션이 악화됐고, 특히 곡물가 앙등으로 도시 식량 위기가 심각했다. 노동자와 시민들이 식량을 구하러 돌아다녀야 했다. 그러자 미군정은 황급하게 일제 때의 미곡 공출제를 부활시켰는데, 심지어 일본 제국주의도 건들지 않은 하곡(보리)까지 공출 대상으로 삼아 버렸다. 농민들의 불만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당시 한반도에는 두 개의 양극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제국주의 국가에 의한 분단이라는 양극화, 그리고 제국주의의 점령과 맞물려 커지는 민족적·계급적 갈등 말이다. 이 때문에 1946년 남한은 정말 “불꽃만 튀어도 폭발할 화약통” 상태였다.

한반도 민중의 희망을 꺾고 분단을 획책한 맥아더와 이승만

당시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노동자·농민들의 지지를 많이 받고 있었다. 그리고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같은 노동조합 조직과 전농의 지도부를 통제했다.

그런데 통념과 달리, 해방 직후 남한에서 조선공산당은 미군정과의 협력 노선을 추구하며 노동자들의 급진화를 진정시키는 구실을 했다. 1945년 8월 박헌영이 이끈 조선공산당 재건파는 이른바 ‘8월 테제’를 발표한다. 이 테제는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도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라고 보고, 이 “진보적 민주주의 국가”들이 조선을 해방시켜 줬다고 했다. 즉, 미국이 해방자라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조선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가 아니므로, 일부 극소수 반동 무리를 제외한 모든 인민이 참여하는 민족통일전선 정부를 구성하는 게 당면 목표여야 한다고 못 박았다.

이런 노선은 소련 정책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당시 소련은 미국·영국 등과 전후 세력권 조정 협상 중이었고, 따라서 서구 공산당들이 이 협력을 해칠 만한 주장과 실천을 하지 않기를 원했다. 조선에서도 미국과의 협력을 위해 조선공산당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주장해선 안 됐다.

남한에서 조선공산당 노선은 전평의 정책과 실천에 영향을 줬다. 전평 지도부는 ‘산업 건설 협력 방침’을 내놓아, “민족 자본가”와 함께 생산에 적극 임하라고 노동자들한테 촉구했다.(그런데 당시 “민족 자본가”가 남한에서 몇이나 됐을까?) 그래서 전평은 쟁의부를 폐지하고 산업건설부로 개편하는 등 파업을 자제시켰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독립 국가 건설 노력과 계급투쟁을 분리한 데 이어, 후자를 전자에 종속시키려 했다. 그런데 정작 통일된 독립 국가 건설은 미국 제국주의와 소련 제국주의가 방해하고 있었고, 남한에서 미군정은 친일파와 자본가들에게 힘을 실어 분단을 획책하고 있었다. 따라서 좌파는 계급 협력 노선을 앞세울 게 아니라, 노동자의 계급적 요구를 고무하고 투쟁을 촉구해야 했다. 그게 제국주의의 간섭에서 벗어나 민족 해방의 과제를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 핵심 동력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노선을 구현할 만한 좌파가 당시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고, 당시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노선 때문에 선진 노동자들의 행동과 의식 발전이 제약돼 버렸다.

미군정과 우익은 계급투쟁을 자제하는 공산당의 노선을 십분 이용했다. 우익은 세력을 결집할 시간을 확보했다. 미군정은 우익과 경찰력 등을 동원해 자주관리운동을 분쇄하고 지역 인민위원회를 파괴했다. 활동가들이 잇달아 투옥되고 피살됐다. 그러나 공산당은 이에 맞서 적극 방어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우익은 기세등등해지고, 노동자들은 수세에 몰렸다. 공산당 지도자들은 해방 이후의 중요한 시기를 그렇게 보낸 것이다.

신탁통치

이때 신탁통치라는 날벼락이 날아왔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국 외상회담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된 것이다. 제국주의 국가들이 한국인들의 민족 자결 열망을 능멸한 것이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대중의 반감과 반발이 폭발했다.

신탁통치 합의의 명분은 ‘임시정부 수립’이었다. 한국인들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신탁통치를 결정할 것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당시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수용하는 게 분단을 피할 최선의 방법이었다는 현실론을 내놓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미·소 양측 모두 애초 자국에 불리한 형세로 임시정부가 구성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게다가 미·소 모두 남과 북에 자국에 우호적인 정권들을 만들고 있었다.

1946년 들어 세계적으로 냉전이 본격화하기 시작한 점도 ‘임시정부 수립을 통한 통일 국가 수립’이 어려웠던 이유다. 세력권 분할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갈등은 점차 악화해, 마침내 1947년 미국이 트루먼 독트린을 발표하고 유럽에서 마셜플랜을 실시했다. 소련도 동유럽에서 자국 중심의 블록을 강화했다. 즉, 신탁통치가 논의된 시기는 세계적 차원에서 양측 모두 각자의 체제를 강화하고 블록화에 나선 시기였다.

그런데 공산당은 소련의 주장을 수용해 애초의 반탁 주장을 뒤집어 모스크바 회담 결과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대중의 염원과 괴리가 된 것이다. 이 틈에 우익이 반사이익을 얻었다. 우익은 반탁 운동을 반소·반공으로 틀려고 애썼다. 친일 인사들이 어느새 애국자로 둔갑해 버렸다.

조선공산당은 미소공위(미소공동위원회)의 결과에 기대를 걸었으나, 1946년 5월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말았다. 그러자 미·소 양측은 남북에서 지배체제 강화를 향해 가속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위기감 속에 공산당은 1946년 7월 ‘신전술’로 전환해, 얼마 전까지 “해방자”라고 불렀던 미군정을 향해 때늦은 투쟁을 시작했다. 1946년 9월 총파업에 이어 10월 인민항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이때는 상황이 불리해진 뒤였다. 미군정이 탱크를 동원하고 자본가와 우익 단체들이 합세해 이 저항을 분쇄해 버렸다.

1946년 10월 대구 항쟁 당시 미군정과 우익들은 탱크까지 동원해 저항을 잔인하게 분쇄했다.

한편 여운형, 김규식 등 ‘중간파’도 좌우합작을 계속 시도했다. 어떻게든 임시정부를 좌우 연립정권으로 구성해, 일단 분단만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가운데 그 양쪽에 한 다리씩 걸친 양상이어서, 이 좌우합작 시도는 실패를 피할 수 없었다. 중간파도 급속히 힘을 잃었다.

1947년 10월 미소공위가 최종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시켰다. 그리고 남한에서 분단 정부 수립을 위해 1948년 5월 10일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하자, 단선에 대한 반발이 일었다. 단정 수립에 대한 반감이 커서 중도 좌파·우파, 김구 같은 우파도 모두 선거 참가를 거부할 정도였다.

분단 정부 수립 강행에 대한 반발이 가장 크게 터진 곳이 바로 제주였다. 제주에서 단선에 반대하는 항의를 경찰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들이 잔혹하게 대하고 대량 체포와 살인을 저지르자, 결국 총칼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다(4·3항쟁). 그러나 미군이 화력을 지원하고, 군대와 경찰력이 대거 투입돼 제주에서 초토화 작전이 벌어졌다. 그 과정에서 제주 인구의 10퍼센트(2만 5천~3만 명)가 학살됐다. 제주 4·3항쟁은 여순 사건(여수·순천 사건)으로도 번졌는데, 미군과 남한 정부는 여수와 순천에서의 저항도 잔혹한 보복과 학살로 대응했다.

이런 유혈 사태와 학살이 자행되는 가운데, 1948년 8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이처럼 피와 오물을 뒤집어 쓴 정부 수립 과정이 무슨 자랑스런 역사일까?

같은 시기에 북한에서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남과 북 두 체제의 권력 형태는 달랐지만, 두 체제는 모두 노동자를 착취해 경쟁적으로 자본 축적을 추구하는 체제였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노동자와 민중의 해방의 싹이 잘려 나간 것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바로 전쟁이라는 최악의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쟁

1948년 분단 정부 수립 이후 남북의 새 지배자들은 모두 상대방을 향한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상대방과 오랫동안 공존할 의사가 없었던 것이다.

북한에서는 ‘국토완정(完)론’이 대두됐다. 김일성은 소련에 전쟁 승인과 지원을 계속 요구했다.

이승만도 마찬가지였다. 국방장관 신성모가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를 지껄였던 것은 당시 이승만 정부의 내심을 잘 보여 줬다.

그래서 “1950년 양 측의 논리는 누가 멍청하게 먼저 움직일지 지켜보는 것이었다.”(《한국전쟁의 기원》 저자 브루스 커밍스) 그러나 남북의 새 지배자들은 모두 미국과 소련의 승인과 지원을 기다리는 처지였다.

1949년 들어서 냉전이 격화하자, 미국과 소련이 상대방을 향해 공세적으로 대응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소련 봉쇄 정책이 공세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1950년 들어 국방비를 세 곱절로 늘리기로 하고, 소련의 최초 핵실험에 자극받아 수소폭탄 개발에도 착수했다.

이게 소련 스탈린이 김일성의 전쟁 요청을 승인하고 북한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한 배경의 하나였다. 마침 1949년 중국에서 마오쩌둥이 이끈 중국공산당이 국민당과의 내전에서 최종 승리하고, 소련은 핵무기 개발에 성공했다. 따라서 스탈린은 미국의 핵 보복 우려 없이, 그리고 여차하면 (소련군이 직접 개입하지 않고) 중국군을 한반도에 투입하는 등 한반도에서 미국의 힘을 시험해 볼 수 있다고 봤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도 남한을 포기할 수 없었다. 남한은 미국이 세운 “이데올로기 전쟁터”였다. 게다가 일본 방어의 전초 기지이기도 했다.

1950~53년 한국전쟁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극동에서 상대방의 힘을 시험한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따라서 누가 먼저 총을 쐈느냐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다.

여기서 전쟁의 구체적 양상을 일일이 다 얘기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몇 가지는 짚을 필요가 있다.

우선, 미국·소련 모두 한반도 민중의 안위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미국은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노근리 학살을 비롯한 민간인 학살과 무차별 폭격 등 온갖 잔악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특히 미군의 폭격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네이팜탄 등을 동원해 미국은 지상에서 모든 건물, 움직이는 대상은 무조건 공격했다. 북한 지역에 대한 폭격은 가히 인종 청소급이었다.

심지어 중국군 투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맥아더는 진지하게 핵무기 투하를 제안했다. 만주와 한반도 국경 일대를 오랫동안 아무도 접근할 수 없는 방사능 지대로 만들어 버리자는 구상이 아무렇지 않게 미국 정부에서 논의되던 시절이었다.

1951년 전선이 다시 38선 인근으로 고착돼 무의미한 고지전만 벌이게 되자,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 모두 휴전을 조기에 할 생각이 없었다. 스탈린은 미국이 아시아에서 2~3년 동안 묶여 있을 테니 이 틈을 동유럽 국가들의 군사력을 증강시킬 기회로 삼고자 했다. 그래서 스탈린은 “북한이 잃는 것은 인명뿐”이라며 전쟁 지속을 강요했다. 미국도 마찬가지였다. 중국을 확실하게 제압해 미국의 우위를 분명하게 보여야 한다고 보고 전쟁을 지속했다. 양측 모두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을 확인하고 나서야 협상에 제대로 임했다. 2년 동안 무의미한 살상만 늘어난 셈이었다.

전쟁은 양측에 엄청난 증오와 더불어, 끔찍한 학살도 낳았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그런 사례의 하나였다. 보도연맹은 남한에서 좌익 활동을 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킨 준국가단체였다. 연맹원이 30만 명을 헤아렸을 만큼, 좌익 활동과 무관하게 머릿수를 채우려고 가입된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보도연맹원들을 전쟁 발발 직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수많은 정치범들의 운명도 비슷했다.

워낙 학살이 만연하다 보니, 웬만한 시골 마을에는 ‘전쟁 때 사람들이 끌려가서 죽은 곳이 어디에 있다’란 얘기가 다 있을 정도다.

한국전쟁은 1953년 7월 휴전으로 끝났다. 분단은 끝나지 않았고, 한반도 민중 전체에는 엄청난 피해와 여러 세대에 걸쳐 사라지지 않는 트라우마만 남았다.

한국전쟁은 세계적으로 냉전 갈등의 수준을 높이는 계기였다. 미국의 해외 기지가 늘어났고, 미국은 베트남 등 여러 지역에서 전쟁을 벌였다. 한국전쟁은 또한 아시아에서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군사동맹 결성의 계기가 됐고, 패전국 일본이 전범국의 멍에에서 벗어나 다시 부흥의 기회를 잡게 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한반도에서는 양 측의 체제 경쟁이 가열됐다. 남측에서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독재정권이 40년 동안 지배했다. 남북 모두에서 반대자들은 이견을 제기할 자유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당시 한반도에서는 더 나은 대안을 실현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의 운동은 남북 모두에서 제대로 자신의 잠재력을 발휘할 기회를 잃은 채 양 제국주의와 그들의 현지 파트너들에 의해 모두 파괴돼 버렸다. 그리고 한반도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열전 무대가 돼 버렸다.

제국주의 갈등이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높아지는 오늘날, 당시의 경험은 우리에게 오늘의 위기를 헤쳐 가는 데 필요한 교훈을 줄 수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에서 벌어지는 제국주의 열강의 경쟁과 간섭에 맞서 노동계급의 투쟁을 고무하는 근본 대안을 전략적 방향으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실행할 좌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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