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활동가이자 신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책갈피)의 저자 실라 맥그리거가 2017년 7월 방한해 〈노동자 연대〉 신문 기자들과 가진 모임에서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다.


ⓒ이미진

발제

먼저 ‘특권 이론’에 대해서 짚어 보겠습니다. 특권 이론은 남성이 여성차별로 이득을 얻는다는 생각과 굉장히 밀접하게 관련돼 있습니다. 

특권 이론은 미국에서 발전했는데요. 미국에서 학계의 지식인들과, 다양성 교육[학교와 기업 등에서 인종, 성별 등에 따른 차별을 방지하고자 실시하는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필진들이 일련의 연구, 보조 교재, 수기 등을 통해서 ‘특권’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습니다.

영국에서는 이 개념이 학생 운동에서 특히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데요. 또 학계와 각종 블로그, 일부 활동가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주류 언론에서도 특권 개념이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예컨대 자유주의 언론 〈가디언〉의 기고란에서 정기적으로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중 한 명은 미국의 활동가 페기 매킨토시입니다. 매킨토시는 특권을 ‘보이지 않는 투명한 배낭’에 비유합니다.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백인의 특권이란, 내가 노력해서 얻지 않은 온갖 자산들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나는 그런 자산을 매일 일상적으로 써 먹지만, 정작 그런 자산이 내게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도록 돼 있다. 백인의 특권이란 무게도 없고 보이지도 않는 배낭과 같다. 그 속에는 각종 특혜 증서, 보장 보험, 도구, 지도, 가이드북, 암호표, 패스포트, 비자, 의류, 나침반, 비상용품, 공수표들이 들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백인이면 인생이 훨씬 쉽다는 거죠.

특권 이론은 [인종차별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차별에 적용됩니다. 어떤 특정 차별을 겪지 않는 사람은 곧 특권을 가졌다는 겁니다.

이런 특권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일부 대학에서는 학생들이 자기를 소개할 때 자신의 특권들을 나열하는 방식으로 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아무개이고 신체 건강한 백인 이성애자 남성입니다’ 하는 식이죠.

즉, 다른 사람들과 내가 어떤 공통점이 있는가에서 시작하는 대신, 어떤 점이 다르고 결과적으로 내가 왜 억압자인지를 밝히면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가부장제라는 것이 실재하고 남성들이 가부장제 때문에 특혜를 본다고도 생각합니다. 

이런 주장은 여성 해방 운동이 가라앉고 급진주의 페미니즘이 부상하면서 널리 확산됐습니다. 남성과 여성을 대립시켰고, 여성들이 맞서 싸워야 할 체제를 가부장제로 규정했습니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내에서는 1980년대에 이를 둘러싼 아주 유익한 논쟁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특권 이론은 30년이나 늦게 영국을 강타한 것입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서 에스미 추나라와 유리 프라사드[1]가 지적하듯이, 이런 정치는 1960~70년대에 사회운동이 분열하고 [1980년대 초] 레이건·대처 시대의 광범한 비관주의가 반영된 것입니다.

이런 분열과 비관주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국가에 맞선 투쟁에서 뒷걸음치는 동시에, 국가와 모종의 타협을 추구하거나 라이프스타일에 관심을 기울이거나 정체성 정치로 눈을 돌렸습니다. 결국 국가 문제나 구조적인 차별 문제를 완전히 등한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정체성 정치의 핵심은, 어떤 차별을 직접 경험하는 사람만이 그 차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그에 맞서 도전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특권 이론은 큰 틀에서 이런 전제를 받아들이지만, 억압 당하는 자들이 아니라 ‘특권을 누리는 억압자들’에게 더 주목한다는 점이 다릅니다.

이제부터는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차별로 이득을 보느냐는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뤄 보겠습니다. 특정 집단이 다른 집단의 차별로 이득을 얻는다는 주장은 여성차별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차별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차별로 득 보기?

이 문제는 남성들이 계급을 막론하고 여성차별을 유지하려고 단결하는가 하는 쟁점과 맞닿아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별개로 가부장제라는 체제가 존재하느냐는 쟁점과도 관련이 있죠. 이런 문제의식을 받아들이면 여성들이 남성에 맞서 계급을 초월해 단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와 다른 대안적 분석은, 여성차별을 뿌리를 뽑는 것이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입니다. 

남성이 여성차별로 이득을 본다는 주장은, 여성차별의 뿌리가 가족 내 여성의 구실에 있다는 데 대체로 합의가 이뤄지던 상황에서 제기됐습니다. 가족 내에서 성별 분업이 존재하고, 주되게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 노인과 병자를 돌보는 구실을 합니다. 여성이 이런 일을 하는 덕분에, 자본뿐 아니라 남성들도 서비스를 제공받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남성들은 요리를 안 해도 되고, 침대 정리나 청소도 안 해도 되고, 아이들을 챙기거나 생일을 기억해 선물을 사주지 않아도 되고, 성적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남성은 여성에게서 이 모든 서비스를 제공받기 때문에 특권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여성은 이런 온갖 서비스를 제공할 뿐 아니라 직장으로 일하러 나가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가정 폭력의 피해자는 흔히 여성입니다.

지배계급이 여성차별로 진정한 이득을 본다 ⓒ이윤선

'남성이 특권을 누린다'는 주장은 분명 현실의 중요한 단면을 포착하고, 우리가 그 점을 명시적으로 언급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려는 논쟁은 가족 내부에 불평등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사노동 분담에 있어 젠더에 따른 차이는 결코 부정할 수 없습니다. 영국과 미국의 사례를 보면, 남녀 간 가사노동 분담 패턴은 결혼한 커플이나 동거 커플이나 다 비슷합니다. 이혼하거나 사별한 남편은 집안 청소와 요리를 더 많이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여성이 분담하는 가사노동의 양은 자녀가 있는지 여부, 있다면 몇 명이 있느냐에 중요하게 좌우됩니다. 그래서 아이를 갖는 것은 여성에게 중대한 변화를 불러옵니다.

또한 성년인 자녀가 부모 집에 얹혀 사는 경우에도 딸일 경우 아들보다 집안일을 더 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흔히 이것은 그 엄마의 기대 수준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 친구들을 보더라도 아들이 집에 오면 모든 뒤치다꺼리를 다 해 주는데, 딸이 오면 당연히 집안일을 많이 거들어 주리라고 기대합니다. 남녀 성별 분업에 대한 이런 생각은 어리게는 8살부터 주입됩니다.

이건 제 개인적인 일화인데요. 제가 11살 때 저녁 시간에 아버지랑 뭔가 토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식사 후에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게 제 몫이었습니다. 저는 싱크대 가서 설거지를 하면서 토론을 계속하는데 아버지는 계속 그냥 의자에 앉아서 저한테 말하는 겁니다. 제가 아버지한테 ‘제가 접시를 닦아서 넘기면 아빠는 물기를 털고 정리하면 안 될까요’ 라고 했죠. 아버지가 제 말대로 했고 그걸 본 어머니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텍사스 대학의 조슬린 위클이라는 학자가 쓴 ‘소녀·소년들의 가사와 돌봄 노동 분담 패턴’이라는 논문[2]을 보면 소녀들은 이미 8살 때부터 소년보다 가사노동에 확연히 더 많이 참여합니다. 소녀들은 나이가 들어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가사노동에 쏟는 시간은 더 늘어납니다. 비록 청소년 여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성인 여성보다는 상당히 적지만 말이죠.

그런데 이런 소녀와 소년 사이의 가사노동 참여율 격차는 인종과 민족, 가계 소득, 함께 사는 부모의 수, 어머니의 고용 상태에 따라서도 크게 변합니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특히 농업이 중심인 나라에서는 청소년기 소녀들이 가사노동을 담당하는 비중이 훨씬 더 큽니다. 

한편, 여성이 남성에게 성적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문제는 사람들의 성생활에 대해 정확한 자료를 확보하기가 까다롭다는 난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육체 노동이 진 빠지는 일이고, 그래서 예컨대 하루 종일 자동차 생산 라인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의 경우에는 노동 조건이 그의 성욕에 큰 영향을 끼친다는 겁니다. 

한 가지 또 확실한 것은 가정 바깥의 일에 종사하면 가족 바깥에서 인간 관계를 맺을 기회도 훨씬 많아지기 때문에 여성과 남성 모두 직장 동료 등과 혼외 관계를 맺는 경우가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경우에 혼외관계를 맺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남성보다 더 길지만 말이죠. 

가정 폭력

가족 내 폭력과 학대에 대해서는 제가 다른 강연에서 충분히 살핀 바 있습니다. (특히 실라 맥그리거 방한 강연 '강간과 포르노 그리고 자본주의'’아동학대의 근원' 참고) 그 피해자 다수가 여성이라는 것은 분명한 만큼,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남성이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할 때 그것이 과연 남성에게 이득이 되는 것인가입니다.

이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전에 계급 문제를 짚고 싶습니다. 20세기 초 미혼 여성들에게 가장 흔한 직업은 부유한 집안에 하녀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는데] 제가 공공주택 캠페인에서 만난 한 여성은 런던의 가난한 이스트엔드 지역에 사는 전형적인 노동계급 여성이었습니다. 그녀는 정기적으로 카타르를 방문해서 어느 부호의 집안일을 돕고 그 아이들을 돌봅니다. 

이처럼 부유한 가족의 상당수는 집안에 가사 도우미 또는 '오페어 걸'[가사일을 돕는 외국인 미혼 여성]를 둡니다. 또는 사립 기숙 학교에 아이들을 보내기도 하죠. 

이렇듯 부자들은 집안일을 하지 않습니다. 남성뿐 아니라 여성도 집안일을 하지 않고 아이를 돌보지도 않습니다. 부유한 남성과 여성은 노동계급 여성의 노동으로 이득을 봅니다. 오페어들의 노동 조건은 굉장히 열악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질문을 거꾸로 뒤집어 보겠습니다. 집에서 누가 어떤 일을 맡고 있느냐를 중심으로 다루면 답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노동계급 남성이 과연 다음의 것들로 이득을 얻느냐고 질문해 보겠습니다.

자신의 여자친구나 아내가 임금이 깎여 가계 소득이 줄면 노동계급 남성은 이득을 보는가? 공과금 내기 빠듯하고, 휴가 한번 근사하게 갈 돈도 없고, 선물 마련 등 생활의 질을 높이는 데 쓸 돈도 부족할 때 여성이 여성차별로 인해서 소득이 낮은 것이 노동계급 남성에게 무슨 도움이 되는가?

또한 여성이 가사노동을 하느라고 항상 심신이 지쳐 있다면, 대체 그런 동반자 관계는 무엇이라고 봐야 하는가? 여성이 가사노동을 더 많이 하도록 남성이 방치하는 게 옳다는 것은 아니지만, 여성(여자친구든 아내든)이 가사노동으로 항상 지쳐 있는 것이 과연 남성 노동자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묻는 겁니다.

사람들이 연인으로 맺어지고 동거나 결혼을 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서로 공유하고 싶은 것이 있고 함께하고 싶은 것이 있고 시간을 함께 보내고 싶기 때문이지, 가사노동을 해결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가사노동에서 해방돼 좀더 풍성한 관계를 맺는 것이 여성뿐 아니라 남성에게도 더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이의 존재는 커플의 삶에 몹시도 지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자녀가 없을 때는 밤에 같이 술도 마시고 좋아하던 일도 함께 하던 커플도, 아이가 생기면 그 아이를 돌보느라 모든 게 달라집니다. 여성이 특히 엄청난 부담을 지게 되지만, 남성도 그전까지 좋았던 관계를 갑자기 잃게 됩니다.

남녀가 부부가 되기 전에, 비록 과정은 천차만별이겠지만 대부분 서로에게 끌리고 상대방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려고 안달이 나는 등 사랑에 빠지는 과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때 자신이 사랑했거나 어쩌면 지금도 사랑하는 여성에게 남성이 폭력을 행사하는 상황에 이른 것을 두고, 대체 어떻게 그 남성이 폭력으로 이득을 취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 남성은 완전히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나락으로 추락한 것이고, 자신의 감정을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자신이 받는 스트레스와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망가진 것입니다. 

물론 가정 폭력이 여성에게 해악적이라는 점과 남성의 그런 행동은 결코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런 상황이 벌어진 것, 남성이 그런 행동을 벌인 것은 가해 남성도 망가졌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가정폭력 문제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도 일정 부분 설명할 수 있습니다. 바로 남성이 여성을 때리고 난 뒤, 사과하면서 제발 떠나지 말아달라고 매달리는 패턴 말입니다. 그러면 여성도 남성이 자신을 여전히 사랑한다고 믿고 싶고, 자신을 때린 것이 실수라는 남성의 말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많은 여성이 남성을 떠나지 않고 머물다가 다시 그런 폭력을 겪고, 그것이 악순환으로 굳어지곤 합니다.

그러다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남성이 여성을 때리거나, 남성이 아이들까지 괴롭히기 시작하면 여성이 "더는 못 참아!" 라면서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남성이 이득을 얻는 과정이기보다는 그를 파괴하는 과정인 것입니다. 여성과 아이들이 물론 더 큰 피해를 입지만 남성에게도 파괴적입니다. 

이런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 사적인 가족과 대비되는 사회적 가족이라는 비전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회적 가족

요리나 빨래를 사회화 하는 것은 상상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나아가 저는 맑시즘 뒤풀이에서 동지들이 하나의 공동체로서 어우러지는 데서 희열을 느끼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저는 핵가족 모델 즉, 두 명의 부모와 한두 명의 자녀가 나머지 사회와 단절된 채 지내는 것이 사람들을 서로 고립시킬 뿐 아니라 심지어 재미라는 측면에서도 그리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함께 있을 때 온갖 재미있는 상호작용도 일어나기 마련인데, 문을 걸어 잠근 채 집안에 성인이라곤 자기 말곤 달랑 한 명뿐이고 거기에 어린이 한두 명 더 있을 뿐이라면 서로 대화하고 나눌 게 얼마나 제한적이겠습니까?

수렵 채집 사회에 관해서 읽을 때마다 흥미로운 것은, 스무 명에서 많게는 오십 명 규모의 사람들이 함께 생활했고, 공동의 생활 공간과 사적인 생활 공간이 나뉘어 있었지만 그 두 공간이 칼 같이 구분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즉, 공동체 영역과 사적인 영역 사이에 굳게 잠긴 대문 같은 게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공동의 공간에서 함께 어울리다가도 자신(들)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혼자서든 또는 둘이서든 사적인 공간으로 들어가곤 했습니다. 또래 집단에서든 세대를 넘나들든 서로 거리낌없이 어울릴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하면서도 공동체의 집단적 활동에 대해서는 책임을 분담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도 집단의 일원으로 인정받고 동시에 자기 몫을 해야 했습니다. 아이의 능력과 수준에 맞게 조절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부모들이 아이를 위해서 모든 일을 다 해 주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가족의 규모가 큰 시절에는 아예 불가능한 일이었죠. 작은 아이라도 자기보다 더 작은 아이를 돌봐야 했습니다.

이런 비전에 따르면 가족이 공간을 사용하는 방식도 지금과 많이 다를 것입니다. 제 경우에는 탁 트인 공간과 혼자 차를 마실 공간만 있으면 될 듯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다를 테지만요.

그런 사회에서는 노동도 바뀌어야 합니다. 가족 구성원들이 죄다 주 5일씩 일을 나가야 할 필요는 당연히 없겠죠. 사회가 훨씬 적은 노동만으로도 충분히 굴러갈 수 있는 만큼, 예컨대 주3일만 일해도 될 것입니다.

또한 노동자들이 생산 과정을 어떻게 꾸릴지, 누가 어떤 일을 담당할지를 자유롭게 민주적으로 의논할 수 있는 세상을 그려 봅니다. 제대로 된 휴식 시간도 있고, 화장실에 갈 때는 누구한테도 허락 구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요.

그런 세상에서는 점심 시간도 충분히 보장될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데요. 저는 프랑스 남부랑 스페인에서 점심 시간이 두 시간이던 시절을 기억합니다. 느릿느릿 점심을 제대로 먹으면서 사람들이랑 대화도 나누고 사교 생활을 하다 식사가 다 끝나면 한 20분 정도 낮잠을 자면서 음식을 소화시키곤 했죠. 낮잠에 취향이 없는 남성들은 축구 한 게임을 뛰든가 수영을 갈 수도 있겠죠. 

또, 모든 종류의 노동이 동등하게 존경받는 사회를 그려야 합니다. 그 속에서는 환경미화원이나 하수처리요원들이 외과의사와 동등한 대우를 받을 겁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거리와 제대로 된 하수처리 시스템이 없으면 외과의사의 실력이 제아무리 좋아 봐야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깨끗한 공중 위생 덕분에 훨씬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다른 사회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차별로 이득을 얻는다는 주장이 등장한 배경이 노동자들의 투쟁과 사회운동들이 후퇴하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과 낙관이 가라앉고, 그래서 노동계급 내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는 경향이 대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동계급 남성이 차별로 이득을 얻는다는 이론은 근본에서 비관적인 이론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여성의 고통을 남성에게 분담시키자는 것일 뿐, 그 이상의 근본적인 사회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남자들은 빨래를 빨래통에 넣지 않는 거냐’, ‘왜 꼭 일일이 말하기 전까지는 쓰레기통을 안 비울까’ 등 때때로 남성들의 행태 때문에 우리 여성들이 짜증나더라도, 이처럼 일상의 짜증나는 일들에 천착하기보단, 그런 것들이 더는 문제가 되지 않을 사회를 만드는 것에 집중하려고 해야 합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데에 주안점을 두게 되면 쓰레기통 비우는 일에 대해서는 예전보다 훨씬 신경을 덜 쓰게 됩니다.[청중 웃음] 

여성 노동자와 남성 노동자의 임금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자료: 한국노동연구원, '한국노동패널조사', 각년도.

질의 및 응답

더 열악한 여성 노동자들의 조건을 방치하는 것이 결국 전체 노동계급에게 이롭지 않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있으면 얘기해 주십시오. 

비록 ‘고임금 남성 노동자 vs. 저임금 여성 노동자’ 구도는 아니지만, 임금이나 숙련도 등에서 좀 더 나은 처지에 있는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에게 연대하지 않아서 그 자신도 결국 피해를 본 사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영국 자동차 공장에 ‘조립원’(fitter)이라는 직종과 관련된 사례입니다. 조립원은 수습 기간을 거쳤고 숙련도가 높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임금을 많이 받는 직종입니다. 

전후 영국에서는 파업 노동자들이 피켓라인 [대체인력 출입을 막는 것. '피켓라인을 넘다'는 말은 대체인력으로 투입돼 파업파괴자 구실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을 치면, 다른 노동자들은 그 피켓라인을 넘지 않는 것이 확고한 규칙으로 자리잡았습니다. 그런데 1970년대를 거치면서 자동차 공장에서 이런 규칙이 흔들리기 시작했는데, 대다수를 차지하는 반(半)숙련·미숙련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일 때 숙련 노동자들이 피켓라인을 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1977년에는 버밍엄이나 코벤트리 같은 곳의 자동차 공장에서 임금 억제 정책 때문에 숙련 노동자들의 임금이 억제됐고 반숙련 노동자들과의 임금 격차가 점점 좁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립원들이 파업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반숙련·미숙련 노동자들이 피켓라인을 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결국 조립원들의 파업이 패배했습니다. 

이 파업은 노동당 정부 하에서 벌어진 3대 파업 중 하나였습니다. 그리고 이 파업 패배를 계기로 노동자들이 같은 노동자들의 파업에 대체인력으로 투입되는 일이 훨씬 더 흔해졌습니다. 

그로부터 1년 뒤에 자동차 회사 측은 자동차 공장의 ‘선임 소집자’(convenor)를 맡았던 노동자를 해고했습니다. 이 선임 소집자는 그 회사 자동차 공장들 전체를 대표했고, 공산당원이었고, 그 자신이 조립원이었는데요, 그럼에도 그 전년도에 다른 조립원들이 파업할 때 피켓라인을 넘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소집자의 복직을 요구하는 파업이 벌어졌지만 한 주 만에 패배했습니다. 공장 노동자들이 피켓라인을 마구 넘었기 때문인데, 애초 사람들에게 피켓라인을 넘어도 된다고 가르쳤던 사람이 바로 그 소집자였습니다. 결국 그는 일자리를 잃었고, 이 해고 사건은 전국의 직장위원 운동에 굉장한 공포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사례는 숙련 노동자와 준숙련, 미숙련 노동자의 연대에 관한 내용이지만 남성과 여성 노동자에 관해서도 비슷한 원리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대형마트의 계산대 등에서 일하는 노동자는 대부분 여성이고 매장을 관리하는 하급 관리자는 죄다 남자들이라거나, 신중간계급에 속하는 사람이 대부분 남성이라며 여성을 착취하는 데 남성이 가담하고 남성이 여성차별로 이득을 취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도 특권 이론에 속하는 것입니까? 

그런 주장을 하는 특권 이론을 본 적은 없지만, 핵심 논지는 비슷한 것도 같네요. 그러나 말씀하신 형태의 인사 관리는 지배계급의 오래된 전술인 것 같습니다. 

즉, 인종·종교·성별에 따라 특정 집단을 다른 집단과 서로 대립시키는 거죠. 예컨대 과거 영국에서는 주물공장의 관리자나 기술자들은 다 백인 남성이었고 노동자들은 인도계 이민자들이었습니다. 피부색, 인종에 따라 감독 업무를 맡겨 분열을 조장한 것이죠. 

나아가, 그런 하급 지위에서 감독 업무를 맡은 사람이나 공장의 현장 주임 등을 중간계급으로 보는 것도 오류인 듯합니다. 그런 하급 감독들의 경우, 그들이 감독하는 노동자들보다 임금을 그리 많이 받지도 않고 생활수준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층 중간계급이나 회사의 진정한 관리자들, 지배계급과의 격차를 생각하면 정말 큰 차이 없습니다. 

말씀하시는 작업장에서 그런 하급 관리자가 정확히 어떤 임금 등을 받는지 제가 알 수 없지만, 남성 감독자와 여성 노동자 사이의 엄청난 격차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네요. 

여성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은 감독자가 아닙니다. 감독자는 착취 과정을 집행하는 사람이고, 그런 착취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그 대형마트의 사장입니다. 감독 업무를 하는 사람이 착취를 한다는 것은 공장의 현장 주임들이 착취를 한다는 주장만큼이나 잘못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우리는 사회주의자로서 중간 감독자들이 아니라 기층의 노동자들의 행동을 고무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아래로부터 압력이 강할 때 종종 기층 노동자들 바로 위에 있는 관리자들이 우리 쪽으로 넘어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이 계층은 파업 파괴 구실도 합니다.

예컨대 [영국의] 1984~85년 광원 파업이 벌어지던 기간 내내 현장 감독들이 파업 파괴자 구실을 했습니다. 그들이 파업에 동참했다면 광산 가동을 완전히 중단시킬 수 있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결국 광원 노조 파업이 패배하고 광산이 폐쇄됐을 때 현장 감독들도 일자리를 잃게 됐습니다.

학교 현장에서도 저는 평교사들부터 접근하지 중간 관리자급부터 다가가지 않습니다.

물론 말씀하신 대형마트의 경우, 노동조합은 여성들도 관리자로 진급할 수 있도록 요구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성별에 따른 직급 분리에도 맞서 싸워야 합니다.

가사노동에서 남성 노동계급이 실질적인 이득을 얻지는 않는다고 할지라도 맞벌이 부부 사이에서도 여성이 거의 네 배 정도의 가사노동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를 어떤 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좀더 듣고 싶습니다.

일단 여성이 왜 현실에서 가사노동을 더 많이 분담하는지 설명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 내에서 성별 분업이 존재하고 여성의 자리는 가정이라는 이데올로기가 힘을 발휘합니다. 

특히 가사노동 문제에서 여성에게 분기점이 되는 것이 출산입니다. 출산이 여성의 삶을 질적으로 바꾸기 때문인데, 먼저 출산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종합적으로 봐야 합니다. 

흔히 여성이 출산하고 일을 그만두거나 파트타임으로 일하게 되면 남성 배우자가 줄어든 소득을 벌충하기 위해 더 일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또 여성에게 가사노동의 부담이 가중되곤 합니다. 또한, 남성 노동자들은 보통 직장이 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출퇴근에 더 오랜 시간을 할애합니다. 또 여성은 하지 않고 남성의 몫으로 여겨지는 일들도 있습니다.

이처럼 상황이 복잡한 것은 맞지만 그럼에도 가사노동 분담이 불평등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에 대해서 우리가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처럼 불평등한 현실을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입니다. 불평등한 구도를 단순히 뒤집는 것, 즉 여성이 하던 가사와 육아를 남성더러 대신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연 대안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역할 교체로는 조금도 전진할 수 없습니다. 가사노동을 가족 내에서 재분배하는 데 그칠 것입니다.

제게는 두 가지가 중요해 보입니다.

첫째, 가사노동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답은 가사노동을 사회화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24시간 운영되는 양질의 무상 보육 제도가 갖춰진다면 그것은 자녀를 둔 노동계급 부모들에게 엄청난 부담을 덜어줄 것입니다. 또한 출근길에 자기 빨랫감을 맡긴 뒤 퇴근길에 빨래된 옷감을 다시 가져올 수 있는 시설이 있다면 그 또한 많은 부담을 경감시켜줄 것입니다. 또 임금이 제대로 그리고 평등하게 지급된다면 가족이 활용할 수 있는 자원도 더 많아질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던져야 할 물음이 하나 더 있습니다. 남녀 간 불평등 때문에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단결해서 투쟁할 수 없냐는 것입니다.

앞서 그나마 처지가 나은 노동자들이 더 열악한 처지의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려 하지 않는 사례가 잘 떠오르지 않았던 이유는 대부분, 어쩌면 모든 투쟁에서 남성과 여성 노동자들이 연대하거나 적어도 서로 연대하려고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1976년 [런던 북부] 그런윅의 필름 현상소에서 일하던 여성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을 때 우체국에서 일하는 남성 노동자들이 [현상소로 필름 배달과 수거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파업을 지지했습니다. 이 남성 노동자들은 국가가 법을 동원해 탄압하기 전까지 이런 연대를 유지했습니다.

집단적으로 조직되고 집단적으로 투쟁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느 한 쪽이 가사노동을 더 하고 다른 한쪽은 덜 한다는 점이 둘 사이의 단결을 가로막지는 않습니다.

최근 미국에서 트럼프에 반대해 시위할 때 사회주의자들이 운동을 조직했다고 하던데 미국에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늘어나고 있습니까?

여성차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이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의 관계에 대한 관심이 다시금 커지는 것은 분명한 듯합니다. 그런데 제가 2년 전에 참석했던, 독일의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즘의 궤적’ 학술대회를 놓고 보자면, 1970년대 말~1980년대에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걸려넘어진 대목에서 여전히 한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하는 듯해서 안타까웠습니다. 과거와 똑같이 가부장제 가설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유효성에 대해 붙잡고 있고, 노동계급과 계급 투쟁, 노동계급의 잠재력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점은 계속 놓치고 있습니다. 

제가 가장 크게 안타까워 하는 점은 그런 사회주의 페미니즘이 오늘날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국제 노동계급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과 실제로 그들이 하고 있는 구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분명해집니다.

세상을 바꾸는 문제에 있어서 여성 노동자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유리한 위치에 있습니다. 남성 노동자들과 나란히 서 있고, 투쟁을 이끌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오늘날, 한편에서는 젊은 여성들이 세상을 바꾸고 여성차별에 맞서고 차별의 기원에 대해 알고자 할 때 가부장제 이론을 받아들입니다. 가부장제가 이론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진지하게 따져 본다기보다는 막연한 상식처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가부장제를 내세우면 아무튼 여성차별을 비판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성차별의 기원 등 중요한 쟁점에 대해서 개방적으로 토론하려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오늘날 학계는 그 자체가 산업이고 마치 기계처럼 작동합니다. '젠더 연구', '페미니스트 연구'라는 상품을 찍어내는 기계가 있고, 한켠에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연구'라는 기계도 있는 것이죠. 거칠게 그리고 감히 말하자면, 저는 이런 연구들은 출발점부터 틀렸다고 봅니다. 

사회주의자로서 우리의 출발점은 여성을 해방의 주체로서 바라보는 것이고, 그러려면 계급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여성을 피해자 또는 해방 시켜줘야 할 대상으로 보는 관점과 우리가 질적으로 다른 이유입니다. 

사회주의 페미니즘과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을 어떻게 구분합니까? 예를 들면 이중체계론[오늘날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와 가부장제가 결합된 것이라는 이론]이나 가부장제 이론, 사회재생산 이론 등을 받아들이는지 여부로 구분해야 할까요? 아니면 오늘날 그 구분 자체가 의미가 없을까요?

오늘날에는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과 사회주의 페미니즘 사이에 실질적인 차이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저는 사회재생산 이론을 이중체계론의 한 변형이라고 봅니다. 현재 관련 논문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저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재생산 이론을 세우려 한] 리즈 보걸이 이중체계론의 함정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했다고 봅니다. 리즈 보걸은 모든 여성은 억압받기 때문에 범계급적 여성 연합이 가능하고 또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결론 짓는 이유 중 하나는 그가 소련 등을 사회주의 사회로 봤고 그 사회에서도 여성이 여전히 억압받았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같은 세대에 속하는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이 그런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급진주의 페미니즘과 자유주의 페미니즘 사이의 묘한 경쟁적 공존 관계가 있는 듯합니다. 그에 대한 의견을 말씀해 주시죠.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모두 체제를 바꾸는 대신 그 안에서 적응하려고 합니다. 둘 다 혁명으로 사회를 바꿔야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여성차별의 원인을 사사화된 노동력 재생산[노동력 재생산이 개별 가정에 맡겨진 것]에서 찾지 않기 때문이고 그래서 자본주의를 문제의 원인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다수의 여성과 남성이 같은 노동계급으로서 공통점이 크다는 점, 여성과 남성을 분열시키보다 단결시키는 요소가 크다는 것, 그런 단결이 사회를 바꾸는 데서 핵심이라는 점을 보지 않습니다. 

급진주의 페미니스트와 자유주의 페미니스트 모두 이런 개념이 없고, 계급에서 출발하지 않고, 바로 그 때문에 기존 체제의 틀에 맞게 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습니다. 비록 현 체제의 특정 측면에 대해서는 소리 높여 비판할지라도 말입니다.


정리 발언

오늘날 (적어도 영국에서는) 많은 젊은 여성(그리고 남성)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데, 여성차별에 반대하고 평등을 원한다는 취지에서 그렇게 말합니다. 그래서 저는 누군가가 ‘너도 페미냐’ 하고 비아냥거리면 ‘그래, 나 페미 맞다’ 하고 맞대응합니다. 저도 여성차별에 반대하고 성평등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가 '페미는 함께 있으면 불편해'라고 말하면 저도 '나도 너의 여성차별이 불편해'라고 맞장구칩니다.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고 같은 시각으로 차별적 현실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여성차별뿐 아니라 다른 여러 집단에 대한 차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르크스주의와 페미니스트 사이에 다음은 전혀 쟁점이 아닙니다: 여성이 남성보다 임금을 적게 받는지 여부, 여성이 가정폭력·성폭력의 피해자의 다수를 차지하는지 여부, 여성이 가사노동을 더 많이 하는지 여부는 전혀 쟁점이 아닙니다.

마르크스주의자와 페미니스트 사이의 논쟁점은 여성차별의 원인이 무엇이고, 차별을 어떻게 없앨 것이냐 입니다. 우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성차별이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에 내재해 있다고 말합니다. 

또, 우리는 노동계급 여성이 당하는 차별은 중간계급 여성이나 부르주아 여성이 당하는 차별보다 더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저임금에 집세를 마련하려고 애쓰고 가정 내에서 폭력도 겪는 여성은, 자기 돈으로 집도 살 수 있고 원하면 따로 나가 살 수 있는 여성에 비해 차별에 대처하기가 훨씬 더 힘듭니다. 가정부를 고용하거나 육아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여성과 비교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요. 

이렇듯 계급은 차별의 양상에 영향을 끼치고, 차별과 착취에 대응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자본주의는 임금, 고용, 그 밖의 여러 문제들을 둘러싸고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이 같은 것을 요구하며 함께 투쟁하는 데 이해관계를 갖도록 만듭니다. 이런 공동의 투쟁 속에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하나는 여성과 남성이 서로 연대 행동에 나선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계급 투쟁이 더 첨예하고 치열할수록 이 사회의 진정한 분단선이 실제로는 계급이라는 점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계급 투쟁이 치열할 때마다 지배계급 여성은 지배계급 남성 편에서 갖은 수단을 동원해 노동계급 여성과 노동계급 남성을 공격하곤 했습니다. 그리고 역사는 지배계급 여성도 자신의 계급 이익을 지키려 할 때면 지배계급 남성 못지않게 잔혹하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은 누가 애를 학교에 데려다 줄 것인지, 집안일을 누가 더 떠맡을 것인지를 가지고 때때로 다툴 수 있지만, 우리가 모두 공통의 이해관계로 묶이는 핵심적인 이유는 세상을 바꿔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새로운 세상을 쟁취할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 노동계급 남성이 여성차별로 이득을 본다는 주장은 우리를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고 서로 싸우게 만들고 고통을 서로 떠넘기는 데 골몰하도록 만듭니다. 토니 클리프가 자주 말했듯이, 우리는 제빵소를 가져와야 하는데 빵 쪼가리 놓고 서로 싸우도록 만듭니다.



[1] Esme Choonara and Yuri Prasad, ‘What’s wrong with privilege theory?’, International Socialism, 142(Spring 2014), http://isj.org.uk/whats-wrong-with-privilege-theory/

[2] Jocelyn Wikle, ‘Patterns in housework and childcare among girls and boys’, https://journals.tdl.org/jrwg/index.php/jrwg/article/download/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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