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본 관객이 9백만 명을 넘었다. 며칠 전 영화평을 써보겠다고 다짐했을 때만 해도 8백만이었다. 그새 백만 명이 더 영화를 봤다. 광주항쟁을 소재로 한 영화를 이렇게 많은 사람이 보다니 좋은 일이다. 광주항쟁처럼, 억압받는 이들이 지배자들에게 도전한 역사는 많은 이들이 알고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과거의 광주항쟁 관련 영화들이 매번 이 정도로 흥행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의 민중은 불의에 분노해 대통령을 끌어내리고 감옥에 보내버려 사기가 높다. 지난 겨울과 봄 사이 촛불 운동의 승리에서 얻은 자신감이 꺾이지 않은 상태에서, 운동의 부수적 결과로 탄생한 자유주의 정권은 광주항쟁의 정신을 헌법에 새기겠다고 한다.

이전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살인마 전두환의 정치적 후손들이 정치 권력을 쥐고 기세등등했으며 전두환을 감옥에서 빼내 줬다. 밝혀야 할 것들은 은폐했고, 책임 있는 자들의 진정한 사과는커녕 뻔뻔한 거짓말들이 죽은 사람을 또 한 번 죽였다. 그래서 이 시절의 영화는 우울하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꽃잎〉(1996년)은 본 사람이 정말 얼마 안 된다. 이 영화는 정말 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유명한 배우들이 나온 영화라도 비슷한 분위기다. 예컨대 1980년 5월, 고등학생 선동렬을 스카우트하겠다며 광주에서 벌어지는 소동이 핵심인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스카우트〉(2007)마저도 주인공이 계엄군에 끌려가 사라진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광주항쟁 관련 영화 중 상대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인 〈화려한 휴가〉(2007)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세요” 하며 도청에서 쓰러져간 이들의 영정 사진 같은 ‘단체 사진’으로 끝난다. 물론 이런 우울한 영화라 할지라도 그 시기 나름의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 〈택시운전사〉는 다르다. “아빠가 손님을 두고 왔어” 하며 죽음이 사방에 깔린 광주로 돌아갔던 영화 속 김사복 씨는 독일 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를 태우고 광주를 빠져 나와, 광주의 현실을 바깥 세계에 알리는 데 성공한다. 이는 김사복이라는 한 택시 운전사가 외국인 손님 한 명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현실에 찌든 개인이 역사의 대의에 헌신하는, 투쟁하는 피억압 계급의 일부가 되어, 진실과 정의를 회복하는 이야기다. 비록 광주 사람들은 광주에 고립되어 죽임을 당하지만, 영화가 주목한 두 주인공은 광주에서 죽지 않는다.

발터 벤야민은 동화에서 주인공이 “그 후로도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며 끝나는 것은 치유적 효과를 낸다고 말한 적 있다. 주인공의 결말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택시운전사〉에서 주인공의 생존은 ‘진실은 이긴다’, ‘투쟁은 결국 승리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1980년에서 현재로 돌아온 영화의 끝에서, 나이 든 힌츠펜터가 김사복 씨를 향해 “만약 당신을 지금 만날 수 있다면 당장 한국으로 가 당신의 택시를 타고 달라진 한국을 보고 싶다”고 말한 것은 이를 뒷받침한다.

이 모든 것은 1980년 5월 국가권력에 의해 고립된 광주가 군사적으로는 패배했을지라도, 역사의 대의에 헌신한 평범한 이들의 투쟁은 더 넓은 시공간의 맥락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이 이전의 “광주” 영화들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다.

지난해 연말과 올해 초를 잇는 촛불 투쟁의 승리에서 얻은 자신감, 우리의 투쟁이 옳았다는 확신을 가진 관객들은 이런 점에 호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은 세월호의 진실, 성과연봉제 철회, 비정규직 철폐, 적폐 청산, 나라다운 나라 등 결코 만만치 않은 요구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걸림돌인 정권의 즉각적 퇴진을 한목소리로 요구했다. 물론 이 요구 중 제대로 실현된 것은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 즉 체제의 문제와 연결된 탓이다. 싸울 것이 앞으로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신들의 투쟁이 옳았다고 믿고, 그 근본적인 물음에도 도전할 생각이 있어 보인다. 평범한 사람이지만 역사를 바꿔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광주’를 다룬 옛 영화들은 진실, 정의, 역사의 대의에 헌신하는 것은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일이고 광주항쟁은 패배했다고 은연중에 함의한다. 이와 달리 〈택시운전사〉는 평범한 사람들의 투쟁이 역사를 바꿀 수 있다는 오늘날의 교훈과 더 잘 어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