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의 오랜 활동가이자 신간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분석과 성차별, 성폭력》(책갈피)의 저자 실라 맥그리거가 2017년 7월 방한해 〈노동자 연대〉 신문 기자들과 가진 모임에서 한 강연을 녹취한 것이다. [ ] 안의 말은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편집자가 덧붙인 것이고, 실라 맥그리거가 인용문을 소개하면서 덧붙인 내용은 [… ― 실라 맥그리거]로 표시했다.


최근 클라라 체트킨에 대한 관심이 급증했습니다.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새로 전기를 썼고, [캐나다 마르크스주의자] 존 리델이 코민테른 4차 대회의 회의록을 발간한 것도 체트킨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데 일조했습니다.

과거 역사가 시대에 따라서 해석이 달라지는 일은 흔합니다. 예컨대, 체트킨은 베를린 장벽이 붕괴할 때까지 동독에서 영웅으로 추앙받았지만, 오늘날에는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리는 사람들도 그 날이 체트킨이나 제2인터내셔널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 또는 [1908년] 뉴욕의 여성 노동자들 파업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아는 경우는 드뭅니다. 오늘날에는 체트킨을 그나마 아는 사람들도 흔히 그가 ‘너무 노동계급, 특히 노동계급 여성에만 주목했다’고 비판합니다.

시위 군중을 향해 연설하는 클라라 체트킨. 독일공산당 시절

클라라 체트킨이 혁명가이자 여성 해방 투사로서 재조명받는 것은 분명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저는 그의 삶과 글들이 오늘날 재해석되는 방식에는 크게 경계하고 있습니다. 체트킨을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각색하려는 시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체트킨이 독일 공산당에서 한 구실이나 여성 문제에 대해 그가 분명하게 천명한 입장 등이 종종 왜곡되곤 합니다. 체트킨이 스탈린과 [스탈린에 맞선] 좌익반대파에 대해 취한 태도도 너무나도 자주 가려집니다. 체트킨에 대한 이런 재해석은 교차성 이론처럼 계급을 각종 억압·차별과 동일선상에서 취급하려는 맥락에서 일어나는 듯합니다. 또한 혁명정당을 건설하려는 프로젝트나 레닌주의에 대한 적대감과도 맥락을 같이합니다. 저는 그런 왜곡들도 걷어내고자 합니다.

파란만장한 시대의 파란만장한 삶

체트킨이 살던 시기는 역사가 요동치던 시기였고, 노동자 투쟁도 격렬했습니다. 그는 1857년 독일 비데나우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본론》 1권이 출간되기 10년 전, 파리 코뮌이 일어나기 14년 전, 독일과 이탈리아가 각각 통일되기 전이었습니다. 체트킨은 엥겔스와 아는 사이였고, 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활동했고,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그 아들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함께 활동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절친이었고요. 체트킨은 카우츠키와 정치적으로 결별하기 전까지는 카우츠키 가족과도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독일 총리로 임명되고 나서 6개월 뒤인 1933년 6월에 소련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그래서 체트킨은 살면서 독일의 ‘사회주의자 단속법’ 하에서 지하 활동도 경험하고 독일 제국주의의 부상을 지켜봤습니다. 러시아와 폴란드(당시 러시아와 독일이 지배)의 1905년 혁명,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와 제3인터내셔널(‘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또는 코민테른)의 건설, 1918~23년 독일 혁명도 모두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벌어졌습니다. 체트킨은 좌익반대파가 패배하고 트로츠키가 러시아에서 축출되는 것을 봤고, 독일에서 파시즘이 부상하는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시대의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클라라 체트킨(왼쪽)은 독일의 탁월한 마르크스주의자 로자 룩셈부르크(오른쪽)와 긴밀히 협력했다

어린 시절 체트킨은 어머니 덕에 좋은 학교를 다녔습니다. 체트킨이 다니던 학교는 교장의 영향으로 부르주아적 관점에서 여성 권리 신장을 강조하는 곳이었습니다. 체트킨은 남동생의 친구를 통해서 독일 사회민주당(SPD)의 문헌들을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친구를 통해서 우크라이나 출신의 난민이었던 오십(Ossip) 체트킨을 만났습니다. 클라라 체트킨은 라이프치히에서 마르크스주의 서클에 가입해서 활동했고, 오십 체트킨을 통해서 마르크스주의 기초 교육을 많이 받고, 오십이 속한 망명자 그룹에서 정치적 훈련을 받았습니다.

오십 체트킨이 독일에서 쫓겨나게 됐을 때 클라라 체트킨도 그와 함께 파리로 이주해, 1882년부터 1889년까지 함께 살았습니다. 클라라는 오십의 성 “체트킨”을 취했고 아이가 둘 있었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습니다. 클라라와 오십 체트킨은 혁명의 대의를 옹호하는 집필 활동에 헌신했고, 아이를 돌보는 보모 중 한 명은 [1871년] 파리 코뮌의 투사이기도 했습니다. 그 둘은 찢어지게 가난했습니다. 오십 체트킨은 결국 결핵에 걸려서 죽었는데, 클라라는 그가 죽는 순간까지 곁에서 간호했습니다.

오십이 죽자 클라라는 독일로 돌아왔습니다. 독일에 돌아와서는 사민당이 여성을 대상으로 발행하던 신문 〈글라이히하이트〉(‘평등’)의 편집장이 됐고 1892년부터 1917년까지 편집장을 맡았습니다. 1892년부터는 사민당 대의원으로 활동했습니다. 1903년부터 1914년까지는 자기보다 스무 살가량 아래인 예술가와 같이 살았습니다. 그 둘의 집은 슈투트가르트의 전원 지역에 있었는데 혁명가들이 누구든 방문해서 머물고 갈 수 있도록 개방했습니다.

이렇듯 삶의 궤적을 보면 체트킨이 19~20세기 초의 온갖 금기들을 깡그리 어기며 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혼외 자녀를 두고 연하 남성과 동거하는 등 부르주아적 결혼관을 무시한 것이죠.

사회주의와 여성

이제부터는 체트킨의 주요 사상을 간략하게 살펴보겠습니다.

체트킨은 1896년 사민당 당대회에서 이렇게 주장했습니다. “우리의 전체적 방향은 ‘여성만을 위해 특화된 선전 활동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들 사이에서 사회주의를 선동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체트킨이 1920년에 코민테른의 여성 부문의 활동 원칙을 수립하는 책임을 맡고서 세운 원칙도 같은 방향을 가리켰습니다. 첫째 원칙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여성들을 각국 공산당이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 원칙은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여성들이 노동계급 투쟁을 지지하도록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체트킨은 코민테른 집행부의 지도 하에서 활동했는데,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는 여성들을 노동계급 투쟁의 대의로 설득하는 과제를 설명하면서 무슬림 여성들 사이에서 벌인 활동을 예로 들었습니다.

그 당시 코민테른은 혁명 사상을 동방으로 전파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방에서는 여성들이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여성차별의 무게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체트킨은 조지아의 [수도] 티빌리시의 활동을 설명합니다. 당시 그 지역에서는 농민 가족의 기반이 파괴돼 여성이 전통적으로 가족 안에서 담당했던 구실도 사라지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농촌에서 생계 수단을 찾지 못한 여성들이 도시로 이주했고 도시에서도 취약한 위치에 놓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비에트가 세운] 무슬림 여성 클럽은 농촌 생활(여성이 가족 내에서 고립돼서 생활하던)과 도시 생활(여성이 집회나 노동조합 회합 같은 데서 남성과 함께 섞이는) 사이의 완충 지대 구실을 수행했습니다. 무슬림 여성 클럽은 여성 전용이었지만 공산주의자 여성뿐 아니라 비공산주의자 여성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무슬림 여성 클럽은 읽기 강좌, 법률 지원 서비스 등을 제공했습니다. 여성들이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도록 바느질 강좌도 열었고, 신나는 오락 프로그램도 있었습니다.

한편, 체트킨은 여성차별의 기원을 아주 명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체트킨은 아우구스트 베벨을 통해 이 문제를 탐구하기 시작했지만, 베벨의 장점(여성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탁월한 분석)을 취하면서도 그의 약점(여성차별의 기원)은 취하지 않았습니다. 체트킨은 여성차별의 기원을 이해하는 데서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이 중요함을 이해했습니다. 이 책은 여성차별이 생겨난 배경을 과학적으로 설명했고, 여성차별을 생물학적 이유들로 환원시키려는 경향과 선을 긋습니다.

체트킨은 당시 사회적으로 여성차별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한 것에 주목했는데, 자본주의가 부상한 것과 그 과정에서 부르주아적 평등 사상이 확산한 것을 중요한 요인으로 봤습니다. 그는 당시 부상한 여러 여성운동들이 각각 다른 계급을 대변하고 있고 계급에 따라 차별의 성격이 달라진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부르주아 여성, 중간계급 여성, 노동계급 여성이 겪는 차별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강조했고, 그에 따라 노동계급 여성은 같은 계급에 속한 남성 노동자와 이해관계를 같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노동시간, 임금, 노동 조건 등에서 노동계급 여성의 운명은 노동계급 남성과 한 배를 타고 있음을 강조했습니다.

체트킨은 여성이 이중의 굴레를 지고 있다는 점도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여성은 가정 내 노예인 동시에 공장의 노예로서 이중의 부담을 지고 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는 대안으로 가사노동의 사회화를 요구했습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는 자신의 가정은 물론 사회주의자들로 이뤄진 가정에서는 남녀가 공평하게 가사노동을 분담해야 하고 아이들도 가사노동에 참여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체트킨과 로자 룩셈부르크는 낙태와 피임에 대해서 처음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왜냐면 그것이 [빈민의 인구를 제한해야 한다는] 맬서스주의적 시각을 담고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둘 다 신속하게 입장을 바꿨고, 여성이 자신의 몸을 통제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독일 공산당 시절에는 둘 다 낙태를 금지하는 헌법 조항에 반대하는 활동을 벌이고 “당신의 몸은 당신 것”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당시에는 여성이 노동할 권리를 쟁취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했고, 체트킨의 사상에서는 여성이 스스로 임금을 벌 때 갖게 되는 독립성이 중심적 지위를 차지합니다. 체트킨은 1889년에는 모성보호 입법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썼습니다. 사회주의자는 단지 남녀 동일임금을 위해서 투쟁할 뿐 아니라 모성보호, 출산·육아 휴가를 위해서도 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체트킨은 남성 노동자들의 여성차별 의식에 대해서도 썼는데, 그 내용이 정말 명쾌합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남성 노동자는 여성 노동자를 주되게 구애 상대로 보는 것을 멈춰야 한다. 여성 노동자가 아무리 젊고, 아름답고, 상냥하고, 발랄하더라도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말이다. 무례한 방식이든 세련된 방식이든 간에 (이는 문화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성적으로 들이대면서 모욕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쉽게 말해, ‘손을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체트킨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남성] 노동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을 프롤레타리아 여성으로, 계급 노예제에 맞서 함께 투쟁하는 노동계급 동지로, 계급투쟁에 필수적이고 대등한 아군으로 대하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여성 투표권을 보장하라. 여성의 날" 1914년 독일의 3·8 세계 여성의 날 포스터

체트킨의 이름이 아주 중요하게 각인된 일로 1910년 코펜하겐에서 열린 제2차 세계사회주의여성대회가 채택한 결의문이 있습니다. 이 결의문은 여성의 투표권을 쟁취하기 위해 ‘여성의 날’을 특별히 지정하도록 했습니다. [오늘날 3·8 ‘세계 여성의 날’의 기원이다.] 하지만 체트킨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다음과 같이 제기했습니다. “이 요구[여성의 투표권]는 여성 문제 전반과 결합되는 방식으로 제기돼야 하고 사회주의자들의 계율에 부합해야 한다. ‘여성의 날’은 국제적 성격을 띠어야 하고, 면밀히 준비돼야 한다.”

전쟁 반대

독일 사민당에서 한 활동에 대해서도 짧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당시 사민당은 대중적 노동자 정당이었고, 전 세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이 모델로 여겼고, 제2인터내셔널의 핵심 정당이었습니다. 그 지도자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으로 여겨졌고, 레닌도 카우츠키를 절대적으로 존경했었습니다. 이 사민당 안에서 아주 중요한 논쟁 두 가지가 벌어졌는데 둘 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참여해 매우 명쾌하게 주장한 논쟁입니다. 체트킨은 룩셈부르크를 지지하며 자신이 편집하던 여성 신문 〈글라이히하이트〉의 지면을 활용했습니다.

첫째 논쟁은 1890년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촉발한 것입니다.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가 모순을 극복했고 위기는 사라졌고 따라서 혁명은 더는 필요치 않다고 주장했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가 베른슈타인에 맞서 반론을 주도하고 체트킨은 룩셈부르크를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러자 카우츠키도 베른슈타인과의 논쟁을 더는 회피할 수 없었습니다.

다음 논쟁은 1903~05년 혁명에서 대중파업이 수행한 구실에 관한 것으로, 총파업이 중요한 전술이냐 아니냐를 둘러싼 논쟁입니다. 이번에도 로자 룩셈부르크가 전면에 나섰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실) 소책자 《대중파업》이 이 논쟁을 위해 쓴 것입니다. 그 내용은 혁명 과정에서 경제 투쟁과 정치 투쟁이 이어져 있고 노동계급 투쟁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논쟁에서도 체트킨은 룩셈부르크를 지지했습니다.

1910년부터는 독일 제국주의가 점점 부상하고 있다는 것, 전쟁 위험이 실질적이라는 것이 분명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체트킨은 자신이 편집하던 신문 〈글라이히하이트〉에서 전쟁에 반대할 필요성을 역설했습니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 발발 당시] 독일 사민당이 국제주의를 배신하며 의회에서 전쟁 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지자, 로자 룩셈부르크와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진) 카를 리프크네히트는 국제주의를 옹호하며 당내 반대파를 결집했고, 체트킨은 이를 전적으로 지지했습니다.

그리고 체트킨은 룩셈부르크, 리프크네히트와 마찬가지로 러시아 혁명을 노동계급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보고 환영했습니다.

체트킨은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당했을 때 그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이해했습니다. 단지 친한 동료를 잃었다고 슬퍼한 것이 아니라 그 둘, 특히 로자 룩셈부르크가 살해당한 것이 향후 독일 혁명 과정에 커다란 손실이 될 것임을 명확하게 이해했습니다.

체트킨의 사상을 관통하는 하나의 줄기는 바로 대중을 사회주의 사상과 사회주의 혁명의 지지자로 끌어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동계급] 여성들을 사회주의 운동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강조한 것도 바로 그 일환이었고, 그래서 혁명가들이 대중에 다가가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가 무슬림 여성 클럽 설립을 반긴 것도 그것이 혁명가들이 대중에 접근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이었고, 이런 접근법은 그가 코민테른의 여성 부문 활동에 관한 테제들을 작성할 때 기초가 됩니다.

같은 이유로 체트킨은 파시즘에 맞서는 공동전선의 필요성도 이해했습니다. 체트킨은 당시 독일에서 부상하던 파시즘의 위협을 매우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파시즘에 맞서는 일에 관해서 말씀드리자면, 당시 체트킨은 사민당 의원이고 독일 의회의 국회의장이었습니다. 독일 의회는 국회의장이 물러나면서 연설을 하는 전통이 있는데, 체트킨은 이 연설을 위해 1932년 8월 30일 소련에서 독일로 밀입국했습니다. 당시 그는 75세 고령에 병까지 앓고 있었고, 독일은 히틀러가 집권하기 불과 넉 달 전이었고, 의사당에서는 파시스트 의원들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체트킨은 열정적으로 독일 노동자들에게 단결을 호소했고,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저 파시스트들을 쳐부숴야 한다고 웅변했습니다. 이 연설을 마치고 체트킨은 의사당 뒷문으로 빠져 나가야 했습니다. 만약 파시스트들에게 붙잡혔더라면 리프크네히트와 룩셈부르크처럼 살해될 것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그로부터 6개월 뒤에 체트킨은 소련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당시 소련은 불과 5개월 전에 트로츠키를 쫓아냈는데, 체트킨은 어떻게 이런 소련에서 무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었을까?’

그 진실은 1926년 코민테른 대회에서 체트킨이 결정적이게도 좌익반대파에 맞서서 스탈린의 편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스탈린 등의] 일국 사회주의론을 비판하는 좌익반대파의 주장, 즉 러시아가 자본주의라는 바다에 둘러싸여 그 파도에 결국 침식될 것이라는 주장이 카우츠키의 주장과 유사하다며 거부했습니다. 체트킨은 레닌이 살아있었다면 좌익반대파에 반대했을 거라면서 국제주의를 내거는 좌익반대파를 현실과 동떨어진 세력으로 치부했습니다. 그는 단결이 필요한 시점에 좌익반대파가 분열을 조장한다고 봤고 그래서 혁명의 배반자들이라고 여겼습니다.

저는 어젯밤에 트로츠키가 이런 체트킨을 비판한 구절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썼습니다. “체트킨의 강점은 언제나 그의 괴팍한 기질뿐이었다. 그는 한번도 독자적으로 사고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오랫동안 그에게 정치적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은 로자 룩셈부르크였다. 룩셈부르크가 죽은 후에는 … [독일 공산당의 몇몇 지도자들을 거명하며 ― 실라 맥그리거] 새로운 정치적 방향타를 찾아 나섰다.

“[1923년 이래로] 체트킨은 첨예한 논쟁이 벌어질 때 대체로 입장을 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가진 전통이라는 권위는 … [스탈린이 자신이 원하는 일을 밀어붙이도록 해 주는 ― 실라 맥그리거] 가림막 구실을 해 준다.”

정제된 표현은 분명 아닙니다만, 저는 트로츠키의 말에 상당한 진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체트킨은 많은 쟁점, 특히 여성해방 문제에 있어서는 생각을 아주 잘 발전시켰다고 저는 평가합니다. 그러나 룩셈부르크의 정치적 예리함이 사라지자, 체트킨은 망망대해에 길 잃은 난파선처럼 헤매기 십상이었습니다. 레닌은 이런 체트킨과 어떻게 논쟁해야 할지를 이해하고 중요한 국면마다 논쟁을 통해 그를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데서 뛰어난 능력을 보였습니다. [레닌은 1924년 초에 숨을 거뒀다.]

결론을 내리자면, 저는 체트킨을 룩셈부르크나 레닌, 트로츠키, 마르크스, 엥겔스 같은 지도자들과 동렬에 놓고 비교하기는 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그가 여성 문제에 대한 주장을 개진하는 데서 대단히 크게 기여했고, 여성해방 문제에서 여성 노동자의 구실을 분명히 하고, 여성과 남성 노동자들이 단결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은 중요한 업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질의 응답

[서두에서 말씀하신 캐나다의] 존 리델은, 1920년대에 체트킨이 공동전선을 강조하면서 특권적 계층의 여성들하고도 함께 단결해 싸울 필요성을 강조했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맞는 주장인가요? 체트킨은 노동계급 여성운동이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에 대해서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이와 맞지 않는 듯해서 의아합니다.

저는 그가 무리하게 ‘재해석’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존 리델이 정확히 어떤 문구를 든 것인지는 확인해 봐야겠지만, 그 당시에 체트킨이 주장을 펼친 맥락은 경제 위기가 다양한 계층의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다루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경제 위기가 농민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 좀 더 전문적 일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미치는 영향 등을 다룹니다. 그리고 이런 경제 상황 때문에 사람들이 프롤레타리아 계층으로 내몰린다고 옳게 분석합니다.

체트킨은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이 지도력을 발휘하면 농민 등 다른 계층의 여성들을 노동계급 편으로 획득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러시아에서 노동계급은 3백만 명으로 상대적으로 소수였음에도 혁명 과정에서 전위로 활동하며 약 8천만~9천만 명 규모의 농민을 지도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제 생각에 체트킨이 노동계급 여성이 다른 계급 여성들과 맺는 관계에 대해서 말할 때도 비슷한 생각이었다고 봅니다. 체트킨은 지배계급이나 부르주아 여성이 노동계급 여성의 해방을 지지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존 리델의 재해석은 아주 고약한 재해석, 정확하게는 틀린 해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존 리델은 제가 발제 초반에 말한, 클라라 체트킨을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각색하려고 시도하는 사람 중 한 명입니다.

한편, 존 리델의 이런 해석에 대해 린지 저먼이 짤막하게 반박을 쓴 바 있습니다.[1]

발제 서두에 클라라 체트킨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채색하려는 시도를 말하면서 교차성 정치를 언급했는데, 클라라 체트킨의 어떤 점이 교차성 정치 이론가들의 구미에 맞는지 궁금합니다.

교차성 정치에 대해서 먼저 말씀드릴 것은, 그 정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떤 배경에서 출발하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막 급진화하는 청년들이 사회의 모든 차별과 억압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맥락에서 교차성 정치를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일보입니다. 반면, 차별과 억압의 원인이 계급에서 비롯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이 교차성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퇴보라고 할 수 있죠.

체트킨의 어떤 부분이 교차성 이론가들에게 차용되는가? 사실 그럴 만한 부분이 체트킨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보다는 체트킨이 여성해방 운동사에서 워낙 중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노동계급 중심성에서 뒷걸음질 치는 일부 사람들이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체트킨을 각색하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이 체트킨에게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1980년대에 로자 룩셈부르크를 다룬 [마가레테 폰 트로타 감독의] 영화 〈로자 룩셈부르크〉도 그런 사례고, 레닌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마르크스도 자신의 주장이 제멋대로 왜곡되는 것에 분노해서 “그게 마르크스주의라면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하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체트킨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로 각색하려고 하는 게 레닌주의 정당에 대한 공격과도 맞물려 있다고 했는데, 그 둘이 어떻게 이어지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그런 주장은 체트킨이 좌익반대파가 아니라 스탈린을 지지한 것을 근거로 삼습니까?

오늘날 체트킨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이 그가 좌익반대파에 반대했기 때문은 아닌 것 같습니다. 체트킨을 띄우려는 사람들이 트로츠키와 좌익반대파에 대해서는 체트킨과 입장이 다른 경우가 많고, 오히려 체트킨이 1926년에 스탈린을 편든 사실을 한사코 숨기는 방식으로 그녀를 띄우려고 합니다.

그 문제보다는 노동자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전망에 대해 자신감을 잃은 사람들이 [노동계급과 계급투쟁, 레닌이 건설한 방식의 혁명정당이 아니라] 각종 사회운동과 그 운동들에서 출현한 새로운 정치체(스페인 포데모스, 그리스 시리자 등)에 희망을 걸면서 벌어지는 일이라고 봅니다.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는 페미니즘이 상식처럼 통용됩니다. [그래서 체트킨을 각색하는 것이 유용한 것입니다.]

사회운동이나 그에 기반을 둔 정당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들은(사실 그런 조류들은 여성해방이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거나 세상을 어떻게 바꾸겠다고 제시하지도 않고 막연히 뭔가 개선하겠다고 말하는 정도에 그치지만), 노동계급 중심성과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라는 생각과 단절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