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찰총장 문무일이 “권위주의 정부 시절 일부 시국사건에서 적법 절차 준수와 인권 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한 점에 대해 국민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린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표적인 사건으로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사건(1964년, 1974년),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1991년), 전북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2000년)을 언급했다.

세 사건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가 밝혀졌고, 검찰의 잘못도 드러났다. 그러므로 사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앞으로도 이런 일이 줄기를 바란다. 이런 과거사 사과는 현 정부의 검찰 개혁 의지를 과시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물론 훨씬 이전의 정권들에서 처리된 사건들이고 시간이 흘러 검찰 내에 직접적 책임자들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황도 작용했을 것이다.

문무일 검찰총장 ⓒ출처 대검찰청

그런데 말로만 사과한다고 문제가 해결됐다고 할 수 있을까? 국가의 폭력적 수사와 판결 때문에 목숨을 잃고, 암을 얻어 투병을 하고, 감옥에서 청춘을 다 보낸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보상받아야 하는가? 당시 사건 조작에 그 누구보다 앞장 선 자들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승승장구한 자들도 있다.

유서 대필 조작사건 당시 검찰총장이었던 김기춘은 이후 법무부장관, 박근혜의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내며 권력을 휘둘렀다. 담당 검사였던 강신욱은 대법관이 됐고, 강기훈 씨에게 잠 안 재우기 고문을 한 검사 곽상도는 박근혜의 민정수석을 했다. (관련자들이 박근혜 정권 하에서 특별히 출세한 것도 시사적이다.)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담당한 검사가 이후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을 담당했다는 것도 아이러니하다.

위 세 사건 외에도 검찰이 사과해야 할 사건은 너무나 많다. 멀리는 조봉암 사형, 동백림 사건, 재일동포 형제간첩단 사건 등 각종 간첩단 조작 사건, 남민전 사건, 미네르바 구속, 〈PD수첩〉 제작진 수사, 삼성 X파일, BBK 와 내곡동 수사 사건, 집회 참가자들을 무더기로 기소하기, 통합진보당 해산, 세월호 참사 부실 수사, 백남기 농민 살해 사건,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구속 등등등.

진정으로 과거사를 청산하려면, 모든 노력을 기울여 사과를 하고 책임자를 처벌하고 진상을 규명해야 할 텐데 검찰은 알아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설사 하더라도 구 여권 세력의 똘마니 몇몇을 건드리는 정도의 시늉에 그칠 공산이 크다.

권력의 시녀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다가 미군정에 빌붙어 다시 또 민족과 민중을 유린하고, 군사독재와 문민독재에 아부하며 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 온 것이 검찰 백 년의 역사”다(경상대 법대 이창호 교수, ‘검찰 개혁의 방향과 과제’).

이는 검찰이 태생 자체가 억압 기능으로 체제의 “법과 질서”를 지키는 데 앞장서는 대표적인 국가기관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지금까지 “부자와 우파의 수호신”임을 자임해 왔다.

또한 검찰은 혼맥, 인맥 등을 통해 자본가, 고위 정치인과 그물처럼 엮여 있다. ‘떡검’, ‘섹검’ 등은 모두 그런 부패의 한 단면을 일컬은 표현이다. 노동자 파업이나 투쟁, 대중의 시위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는 냉혈한이 돼서 탄압을 하지만 재벌과 권력자들에게는 한없이 너그럽다.

이런 검찰이 뒤늦고 부족한 사과라도 한 것은 박근혜를 퇴진시킨 거대한 운동에 힘입은 바 크다. 아래로부터의 대중행동이 이처럼 중요하다.

검찰이 사과한 사건들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독재 정권이 두 차례나 자행한 대표적 공안 조작 사건이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4년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정권 퇴진 투쟁으로 확산되는 것을 차단하려고 용공 조작 사건을 발표했다.

그것이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이다. 인혁당을 두고 북한의 지령을 받아 “국가 사변을 기획[한]” 반국가단체 조직이라고 했지만 당시 사건 담당 검사들마저 증거가 없다며 기소를 거부할 정도였다. 결국 첫 발표보다는 축소됐지만 반공법으로 처벌을 받았다.

2차 사건은 박정희의 유신체제 선포와 연관이 크다. 박정희는 유신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저항이 커지자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고는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주장했다. 당시 박정희는 민청학련 “수사가 본격화되지도 않았고 인혁당 관련 인물이 한 명도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상태”인 1974년 4월 3일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정 아래 ‘인민 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담화문’에서 주장”했다(《사법부》, 한홍구, 돌베개).

조작된 혐의로 고문 수사가 시작된 지 1년 후인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관련자 8명에 대해 사형이 확정되고 18시간 만에 사형이 집행된다. 그래서 이 사건은 “사법 살인”이라 불리는 야만적 국가 폭력이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선포했다.

2007년 32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재판부는 “당시 진술은 고문, 구타,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던 재판에서 자백이 허위라는 판결은 이 사건이 “살인마 박정희”와 검찰, 경찰, 중앙정보부 등 국가권력이 저지른 악랄한 살인이었음을 밝힌 것이다. 그런데도, 이 결정에 따라 배상금을 준 국가는 최근 이자 계산이 잘못됐다며 줬던 배상금을 뺏어 유가족들의 “집마저 앗아가”는 짓을 했다.

2012년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를 규탄하는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가족들 ⓒ고은이

강기훈 유서 대필 조작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이 사건은 노태우 정부가 “1991년 5월 전국민족민주연합의 사회부장 김기설의 분신 자살에 대해 검찰이 그의 친구 강기훈이 유서를 대필하고 자살 또한 방조했다”며 강기훈 씨를 처벌한 사건이다(《사법부》, 한홍구, 돌베개).

1991년 봄은 명지대 1학년생 강경대 열사가 집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하고 이를 계기로 투쟁이 폭발한 시절이다. 분신, 투신, 의문사가 이어졌다. 저항이 커지자 지배자들은 “분신을 배후에서 조종하는 세력이 있다”며 마녀사냥으로 반격했다. 그것이 이 사건인 것이다. 당시 검찰은 강기훈 씨를 “목적을 위해서 동료의 생명까지도 혁명의 도구로 사용하는 좌경혁명분자로서의 비인간적·반인륜적 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낸 천인공로할 범죄자”로 낙인을 찍었다. 법원도 검찰의 기소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여 징역 3년을 선고했다.

이 사건도 2015년 재심을 거쳐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선고를 받았다. 강기훈 씨는 현재 암 투병 중이다.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피살 사건은 영화로도 제작될 정도로 그 억울함이 널리 알려진 사건이다. 최근 개봉해 화제가 된 영화 〈재심〉의 모티브가 됐다. 택시 기사 피살 사건의 목격자가 경찰의 억지 강압 수사로 살인범이 돼 버렸다. 이 사건의 피해자였던 당시의 10대 청소년은 10년을 살인범으로 감옥에서 살아야 했다. 당시 경찰은 경찰서도 아닌 여관에 목격자를 감금하고 “살려주세요”라는 말이 나올 때까지 구타해서 거짓 자백을 받아 냈다. 심지어 담당 검찰은 그 뒤인 2003년에 진범이 잡혀서 자백을 했는데도 증거가 부족하다며 재수사하지 않았다. 결국 이 사법 피해자가 만기 출소 후에 재심을 청구해 2016년 광주고법에서 무죄를 받았다. 지금 이 사건의 진범에 대한 재판 중이다. 법원은 5월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