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난 5월 30일 인도네시아 국회(국민협의회 : MPR)가 와히드 대통령 탄핵을 결정할 특별총회를 개최하기로 함에 따라 와히드 정권이 ‘궁정 쿠데타’로 조기 퇴진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와히드 대통령의 정치적 기반인 국민계몽당(PKB)은 국회 의석의 1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다.

이 번 탄핵 움직임은 민주투쟁당(PDI-P)의 메가와티 부통령이 가세하면서 급진전되고 있다. 와히드 탄핵의 이유는 그가 조달청 공금횡령 의혹 사건인 불록 게이트와 브루나이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 지배자들 내에서 만연된 부정부패로 볼 때 이러한 이유는 핑계에 지나지 않는다.

5 월 30일 국회 주변에는 와히드 지지 세력들이 탄핵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을 빚었다. 최근의 인도네시아 위기는 친와히드 세력과 반와히드 세력 간의 갈등처럼 보이지만 그 원인은 더 근본적인 것이다.

1999 년 10월 와히드는 수하르토 체제에서 집권당이었던 골카르당과 개혁파로 알려진 아미엔 라이스 사이에서 이뤄진 타협의 산물로 등장했다. 보수파와 개혁파 사이의 타협의 산물이란 점에서 와히드의 기반은 허약하다. 지난 2000년 2월 와히드가 군부 내 실세인 위란토를 제거할 때도 쿠데타 설이 끊이지 않은 점은 그가 지배 계급 내에서 갖고 있는 기반이 그만큼 취약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더욱이 와히드와 메가와티 사이의 권력 투쟁이 작년 8월 메가와티의 권력 분점 요구와 와히드의 개혁 실종에 대한 국회 사과로 이어지면서 지배계급 내분이 첨예해져 왔다.

와히드가 대통령이 된 뒤로 정치·군부 개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아 대중의 불만은 날로 증대돼 왔다.

와 히드 체제 이후 인도네시아 경제는 여전히 위기 상태를 극복하지 못해 또다시 동아시아 경제 위기의 진원지가 될 것이라는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IMF와 해외 투자가들은 개혁 실종과 계속되는 항의 시위로 인해 인도네시아에서 빠져나갔고 루피아 화는 폭락했다.

1998 년 5월 장기 집권하던 수하르토가 노동자와 학생 들의 항의 시위로 물러나면서 인도네시아 혁명은 시작됐다. 인도네시아 민중들은 지배자들의 부정부패, 빈부격차, 경제위기로 인한 궁핍화에 반대하며 총체적 개혁을 원했다. 수하르토가 물러나고 하비비에서 와히드로 정권이 바뀌었지만, 학생과 노동자 들이 요구했던 어떤 변화도 이뤄지지 않았다.

수하르토의 몰락

1997 년 말 동아시아 경제위기는 인도네시아에 혁명을 초래했다. 인도네시아 통화인 루피아 화가 붕괴하자 기업들이 도산했다. 경제 위기가 그 전에도 가난했던 보통의 인도네시아인들에게 미친 결과는 무지막지했다. 서방 정부들이 후원하는 IMF는 430억 달러의 긴급 융자를 제공하는 대신에 내핍 정책을 강요했다. 그래서 수백만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어야 했다.

식료품 부족, 물가 폭등, 실업 등은 수하르토가 물러나기 전부터 항의 시위와 폭동을 촉발시켜 왔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IMF 내핍 계획에 포함된 연료 보조금 삭감이었다.

학생들은 수하르토의 사(私)기구나 다름없었던 국민협의회와 골카르당에 의해 수하르토가 대통령으로 재선출된 것에 항의해 저항을 시작했다. 1998년 5월 노동자들의 시위 참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대중 항쟁이 일어나자, 지배계급은 분열하여 국방장관 위란토는 수하르토의 사임을 요구했다.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에 사임했다.

수 하르토의 후임 하비비는 언제나 수하르토에 의존했다. 그는 독립적인 정치 기반이 없기 때문에 불안정성과 취약성을 태생적으로 갖고 등장했다. 더욱이 그는 1998년 3월에 대중의 불신을 받는 국민협의회와 골카르당에 의해 부통령으로 선출됐었다.

하비비 정권이 1998년 11월 인도네시아 정치 개혁과 총선 일정 등을 논의할 국민협의회를 개최했을 때, 학생과 노동자들의 격렬한 시위에 부딪혔다.

많은 사람들이 하비비가 수하르토의 꼭두각시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비비 정부는 한편으로는 군부로부터의 압력과, 다른 한편으로는 민중 항쟁으로 말미암아 권력을 잃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1999 년 6월 총선 이후에 등장한 체제는 인도네시아 사회의 모순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수하르토를 퇴진시킨 노동자와 학생 들은 변화와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민주투쟁당을 지지해, 메가와티의 민주투쟁당이 제1당이 됐다. 하지만 수하르토 체제 하에서 온갖 특혜를 누렸던 골카르당이 두번째로 많은 표를 얻음으로써 구 체제가 온존하고 있음을 보여 주었다.

메가와티의 한계

와히드는 수하르토 일가가 집권 기간에 저지른 부패와 축재에 대해 "관용과 용서"를 주장함으로써 그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다.

많 은 사람들이 수하르토를 처벌하고 그의 가족 재산을 몰수하기를 원하는데도 수하르토는 여전히 자카르타에 살고 있다. 그는 사임하기 전에 수십억 달러를 외국 은행으로 빼돌렸고, 재임 32년 동안 3천2백 개의 인도네시아 기업들과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1998년 5월 당시 투쟁에 나선 학생들은 정부와 군대의 ‘개혁’을 요구했지만 인도네시아 군대는 여전히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와히드는 동티모르 독립 이후 아체 등지에서 제기되는 분리독립 요구를 이전의 수하르토나 하비비 정권과 마찬가지로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수하르토와 하비비를 물러나게 했던 노동자와 학생 들의 투쟁에서 최대 수혜자는 온건 야당인 민주투쟁당의 메가와티였다. 와히드가 물러나게 된다면 메가와티가 권력의 전면에 등장할 것이다.

하 지만 메가와티는 수하르토를 물러나게 하는 투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수하르토가 하비비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것이 가능했다. 메가와티는 하비비에게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수하르토 이후 인도네시아를 관리해 온 것에 고마움을 표현할 정도로 수하르토 체제의 지배자들에게 유화적이다. 메가와티는 1986년 필리핀에서 코라손 아키노가 했던 방식으로 운동을 지도하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에서 메가와티나 아미엔 라이스 같은 정치인들이 대표하는 자유주의적 부르주아지는 1998년 5월 이래로 벌어진 인도네시아 혁명에서 소심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를 보였다.  

인 도네시아에서 부르주아지가 보인 모습은 1905년 러시아 혁명에서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당인 입헌민주당(카데츠)이 했던 역할을 상기시킨다. 그 당시 부르주아지는 짜르 전제정에 대한 불만이 많았을지라도 노동자 투쟁이 부상하자 짜르편으로 돌아섰다. 그들은 짜르에 대한 반감보다는 노동자 투쟁에 대한 두려움을 더 크게 느꼈다.

지 주 계급에 기반을 둔 짜르 전제정 아래서도 노동자 투쟁에 직면하게 되자 자신들의 역사적 과제조차 내던지고 짜르의 품안에 들어갔던 부르주아지가 인도네시아에서는 급진적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숫소에게서 젖을 구하는 일일 것이다.

와 히드가 집권하던 기간에 노동자와 학생 들이 요구했던 개혁의 실행이 그토록 더뎠던 것은 와히드의 개혁 의지 부족보다는 그의 지지 기반의 계급적 한계가 훨씬 더 크게 작용했다. 이러한 한계는 메가와티에게도 해당할 것이다. 메가와티가 와히드에 이어 권력을 장악할지라도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와 국가 기구를 공격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인도네시아 같은 상대적 후진국에서 사회의 근본적 변혁은 고사하고라도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조차 부르주아지가 아니라 노동자 계급만이 일관되게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변화의 동력

수 하르토를 물러나게 만든 것은 학생과 노동자 계급의 항의 투쟁이었다. 노동자 계급은 수하르토 퇴진 이후 3년이 지나면서 급진화했고, 전투성과 투쟁의 규모면에서 성장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수하르토 체제에서 정치조직은 고사하고 독립적 노동조합조차 없이 투쟁에 나섰지만 이제는 노동조합 연맹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또,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 사이에 극복할 수 없는 간극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많은 노동자들은 경제 위기로 인해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경제적으로 박탈당한 삶을 살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자 계급은 조직된 부문을 중심으로 진정한 단결을 이룰 수 있다. 농촌의 빈민은 다를 수 있다. 이들의 일부는 이슬람 근본주의나 반(反)화교 인종주의 같은 사상에 이끌릴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서 벌어진 투쟁의 규모와 전투성은 근본적 변혁을 주장하는 정치 조직이 성장하기 좋은 조건이다. 실제로 학생들로 이루어진 여러 조직들이 노동자나 도시 빈민 지구에 들어가 정치 조직을 건설하고 있다.

와히드와 메가와티 사이의 갈등은 와히드 정권 이후에도 자신들의 희망이 실현되지 않아 불만에 찬 노동자와 학생 들의 투쟁을 촉발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수 하르토 재산의 완전 몰수와 처벌, 군대가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혁, 족벌 체제의 청산, 부패 구조의 개혁 등은 인도네시아 민중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요구다. 노동자와 학생 들은 이런 요구들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자본주의 구조에 대한 근본적 변혁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를 느낄 공산이 크다.

1965 년 수하르토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인도네시아 노동자 조직들은 완전히 파괴됐다. 하지만 그를 물러나게 하는 투쟁을 전개하면서 노동자 계급은 영웅적으로 부활하고 있으며, 메가와티를 넘어서는 투쟁을 할 투사들을 창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