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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아차 통상임금 판결:
통상임금 확대는 배부른 정규직 이기주의인가?

지난달 말 법원이 통상임금 소송에서 기아차 노동자들의 손을 일부 들어 줬다. 법원은 사측이 요구한 신의칙*을 적용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4천2백32억 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노동계는 즉각 환영 입장을 발표했다. 기아차 노동자들은 친구·친지들의 축하 전화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우리 속사정은 언론에 비춰지는 것과 다르다”고 말한다.

법원은 노조가 청구한 체불임금액의 37퍼센트만을 인정한데다, 이제 1심 판결이 나왔을 뿐이다. 사측은 곧바로 항소했다. 1심 판결까지 6년이 걸렸는데 앞으로 어떻게 판결이 뒤집힐지,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도 불확실하다.

이번 판결 직후 재계는 “기업 활동이 크게 위축되고 산업경쟁력이 떨어질 것”이라고 길길이 날뛰고 있다. 기업주들은 어떻게든 통상임금 문제로 이윤에 손해를 보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태세다. 한편으로는 법 개정으로 통상임금의 범위를 줄이고 신의칙 적용 기준을 넓히도록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상임금이 늘더라도 총 인건비에 변동이 없도록 임금체계 개편을 추진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이 효과적으로 관철되려면 정부의 지원이 뒷받침돼야 할 텐데, 문재인 정부는 기꺼이 그럴 의사가 있음을 내비치고 있다. 경제부총리 김동연은 법원 판결을 존중하겠다면서도 근로기준법 개정과 임금체계 개편 지원을 약속했다. 민주당 대표 추미애도 “기업의 애로사항에 대해 적극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거들었다.

실제로 법·제도 개정에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미 자유한국당과 민주당이 각각 발의한 근로기준법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돼 있다. 그런데 문제는 민주당의 법안조차 대통령령으로 통상임금의 범위를 축소할 여지를 남겨, 각종 수당은 물론 상여금에 대해서도 통상임금 인정이 어렵게 만들 위험이 있다는 데 있다. 금속노조 법률원의 김태욱 변호사는 민주당의 법안이 “시행령에 위임한 범위가 불분명”하다며, ‘고정성’*을 명시하지는 않았지만 통상임금의 범위를 축소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 이용섭은 지난달에 직무성과급제로의 임금체계 개편 방향을 제시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는 공공부문 성과연봉제 도입 지침을 폐기했지만, 정작 노동자들의 임금 상승을 억제하고 내부에 ‘경쟁’의 요소를 도입해 차등을 두는 제도 도입을 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되면, 통상임금이 확대되더라도 그 효과는 미미할 수 있다.

장시간 노동, 낮은 기본급

정부와 재계가 이토록 통상임금 확대 요구를 무시하며 오랜 시간 논란을 키워 온 것은 기업주들의 이윤 손실을 걱정해서다. 반대로, 이들은 노동자들이 지난 십수 년간 짊어져 온 부담은 무시하고 있다. 정부 통계만 봐도 노동자들이 그동안 도둑맞은 임금이 수십조 원에 이른다. 재계에 따르더라도 3년간 떼 먹은 임금만 33조 원이나 된다! 통상임금 정상화 요구는 완전히 정당하다. 경제 위기 상황에서 임금 인상은 매우 절실하고 중요하다. 그것은 현재의 생계비, 미래의 노후를 지탱시켜 줄 거의 유일한 수단이다.

기업주들은 통상임금 때문에 경제가 거덜날 것처럼 호들갑이지만, 30대 대기업의 사내유보금만 7백조 원이 넘는다. 현대기아차그룹은 1백21조 7천억 원의 유보금을 갖고 있다. 최근 5년 새 증가율이 55퍼센트나 된다. 기업주들이 쌓아 놓은 막대한 부, 매년 거둬들이는 영업이익에 견주면 미지급된 통상임금은 보잘것없는 수준이다.

무엇보다 통상임금 논의의 배경에는 장시간 노동과 기형적 임금체계라는 이중고에 시달려 온 노동자들의 고통이 자리잡고 있다. 기업주들은 저임금으로 장시간 동안 노동자들을 부리려고 기본급의 비중을 대폭 낮춰 왔다. 1백 인 이상 사업장 평균이 60퍼센트고, 제조업에서는 고작 40퍼센트다. 현대·기아차의 경우는 30퍼센트가 채 안 된다. 이 때문에 노동자들은 낮은 기본급을 벌충하려고 잔업·특근에 시달려 왔다. 한국이 OECD 최장 노동시간이라는 불명예를 안게 된 이유다.

그러다 보니, 기업주들은 일자리를 늘려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한쪽에서는 살인적인 장시간 노동으로 노동자들이 과로사 하는 일이 잇따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일자리가 없어 청년들이 비관 자살을 하는 비극이 벌어져 온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기본급을 대폭 인상하고 임금 삭감과 노동강도 강화 없이 노동시간을 대폭 단축해 일자리를 늘려야 한다.

중소하청 노동자

그런데 적지 않은 이들은 통상임금 문제를 그저 대기업 정규직의 ‘이기심’쯤으로 치부한다. 기아차 통상임금 소송을 맡았던 김기덕 변호사는 언론이 이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보면서 자신이 “협력부품업체 근로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 주는 짓”을 하는 “귀족 노동자 대변[자]”인 양 착각이 들 정도라고 말하기도 했다.

보수 언론이나 재계가 통상임금 확대 요구를 두고 자동차 협력부품업체 노동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 준다고 비난하는 것은 완전히 위선이다. 소득 격차로 치면 자본가들과 노동자들 사이에 진정한 분단이 있는데다, 그동안 저임금층과 비정규직을 확대해 온 책임은 정부와 사용자들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노동운동과 진보 운동 안에서도 이런 주장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최근 곽상신 워크인연구소 연구실장은 “정기상여금은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를 벌리는 악마 같은 존재”라며 사실상 대기업 정규직의 양보를 촉구했다. 노동운동 내 좌파도 그동안 통상임금을 ‘배부른 노동자 이기주의’로 취급하는 분위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이 빼앗긴 임금을 되찾으려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정당하다. 더구나 그것은 대기업 정규직뿐 아니라 주 40시간을 초과해서 일하는 노동자 모두에게 해당하는 문제다. 중소영세 부품사 노동자들, 버스 운전사들, 환경미화원들도 통상임금 소송에 참여한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만약 기아차와 같은 조직 노동자들이 통상임금을 되찾고 기본급을 대폭 인상시킨다면, 중소 영세업체·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통상임금을 요구하거나 노동시간을 단축시키는 논의를 할 때도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최근 대한상의는 통상임금 논의와 연동해 최저임금에도 상여금과 복리후생 수당 등을 포함시키자고 주장하고 있다. 최저임금과 별도로 책정된 각종 수당을 기본급에 산입해 인건비 부담을 줄이려는 꼼수인 것이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 사용자들의 협박에 긍정적 신호를 보내고 있다. 이는 명백히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 수준을 억제하려는 시도이므로, 노동운동은 단호히 반대해야 한다.

최근 한국노동사회연구소 김유선 선임연구위원은 저임금 노동자 대부분이 “기본급 외에 상여금, 수당을 받지 않기 때문에 별다른 타격이 없을 것”이라며 법률상의 기준(상여금 산입)을 일치시키는 게 좋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근로기준법(통상임금)과 최저임금법은 각각 별개로 존재하는데다, 어느 한쪽에 상여금을 산입한다고 해서 다른 한쪽도 그 기준을 따라야 하는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대학 청소 노동자 등 일부 노동자들은 그동안 투쟁을 통해 상여금과 수당을 얻어 냈다. 저임금 노동자들이 싸워서 따낸 성과를 별것 아닌 양 치부하며 희생을 감수하라고 해서는 안 된다. 법·제도상의 기준 일치는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다. 중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임금 조건을 지키고 개선하는 것이다.

소송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요컨대, 통상임금 문제에서 대기업 정규직과 중소하청·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해관계는 결코 대립되지 않는다. 오히려 통상임금 확대가 상대적으로 열악한 노동자들의 이익을 위해서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

조직된 정규직 노동자들이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적극 투쟁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대기업을 넘어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도 적용되도록, 즉 전체 노동자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가도록 요구해야 한다. 이번 기아차 통상임금 판결은 그런 투쟁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최근 기아차지부 김성락 집행부는 투쟁하기를 회피한 채, 또다시 소송으로 해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김성락 지부장은 “파업을 진행하지 않고 논리적으로 대응”했기에 이번 판결을 이끌어 냈다고 자화자찬까지 했다. 그러나 그동안 주요 노조들이 투쟁을 회피한 채 소송에만 기대온 탓에 관련 논의가 수년째 진전이 없었던 점을 봐야 한다.

현대·기아차지부와 금속노조 지도부가 일자리연대기금 제안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도 부적절하다. 수년째 답보 상태인 통상임금을 협상으로 해결해 그 일부를 일자리 창출에 내놓겠다는 것인데, 투쟁 없이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운다고 사측이 순순히 내줄 리 없다. 사측은 콧방귀도 안 끼고 있다. 일자리연대기금은 비정규직 정규직화, 일자리 창출의 지렛대가 되기보다, 도리어 임금체계 개악 시도 등 정부와 사용자들의 양보 압박에 힘만 실어 줄 것이다.

조직노동자운동은 법적 소송에만 기대지 말고, 저임금·장시간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한 투쟁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