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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성공은 조직에 달려 있다

21세기 혁명을 고찰하는 크리스 하먼의 칼럼을 세 차례에 걸쳐 싣는다. 이번이 그 두번째이다.

지난 글(51호)에서 지적했듯이, 혁명은 단지 사회주의자 단체들의 노력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이 지적했듯이, 거대한 사회적 위기 때문에 “하층 계급이 더는 낡은 방식대로 살고 싶어하지 않고” “상층 계급”들도 “낡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질 때 혁명은 일어난다.

전 세계 모든 지역에서 지배 계급을 더 한층의 예측불능과 불확실성으로 이끄는 자본주의 세계화 때문에 21세기에도 그런 거대한 사회적 위기는 피할 수 없다.

자본주의의 정신 나간 동인 때문에 때로 “혁명적”이거나 “준혁명적”인 상황 같은, 사회적 격변이 더 많이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준혁명적인 상황”이 모두 사회주의 혁명의 성공으로 끝나지는 않는다.

대중 파업과 자생적인 봉기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정치적 삶으로 뛰어들게 되면 전에는 볼 수 없던 수준의 토론이 벌어진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면 어디든 끊임없이 정치에 대해 말한다. 버스 정류장에서, 가게에서, 공장과 사무실에서, 학교에서, 온갖 친목 모임에서 혁명적이지 않은 시기에 살던 사람들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토론이 벌어진다.

한편에서는 현 체제에 대한 혐오와, 다른 한편에서는 함께 파업하고 시위한 경험 덕분에,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집단적‍·‍민주적으로 사회를 책임질 수 있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갑자기 사회주의 사상들이 그들의 경험과 부합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혁명적 사회주의 사상만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배 계급의 분파들도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하기 위한 치유책을 찾기 마련이다.

그들은 군사 쿠데타를 꿈꾸는 장군들이나 대중의 고통이 종교적‍·‍인종적 소수자로 향하도록 애쓰는 정치적 모험주의자나 저급한 언론인들을 지원하기 시작한다.

사회가 자본주의가 아닌 방향으로 변해야 하지만, 직접적인 충돌이 아니라 타협과 합법 절차를 통해 천천히 변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두 극단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최초의 위대한 민중 봉기가 일어난 뒤에는 항상 이런 “개량주의적” 방식이 광범한 청중을 발견해 왔다.

봉기에 가담한 사람들은 계급 사회에서 자랐고, 자신들은 세상을 운영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는 말을 들어 왔다. 하룻밤 사이에 그들의 생각이 완전히 바뀌지는 않는다. 심지어 정부를 전복한 뒤에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그들의 요구에 덜 적대적인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정부에 희망을 걸 가능성이 높다.

진정한 사회적 위기는 “협력 관계”에 기초한 “평화적”이고 “온건한” 해결책이 가능하지 않은 상황을 뜻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혁명을 철처하게 밀어붙이는 것보다 이런 방식이 “더 효과적”이며 “덜 폭력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1917년 2월 러시아에서 자생적인 봉기로 짜르 체제가 무너진 뒤에도 사람들은 처음에는 전쟁으로 돈을 번 르포프 공이, 그 다음에는 자본주의를 고스란히 유지하는 데 헌신하던 변호사 케렌스키가 이끌던 정부를 신뢰했던 것이다.

2001년 12월에 낡은 자본주의 정치 체제에 속해 있던 네 명의 대통령을 끌어내린 아르헨티나에서도 민중은 결국 비슷한 배경을 가진 다른 두 명의 대통령 두알데와 키르히너를 받아들이게 됐다.

혁명적 격변에서 사람들이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 불완전한 해결책을 신뢰하는 중간 단계가 없었던 경우는 없다.

그 사이에 최초의 위대한 봉기를 낳은 그 모든 고통이 다시 쌓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 그 고통은 두 가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사회의 “질서 회복”을 위해 반동적인 방식을 모색하는 자본주의적 당파들을 지지하는 데로 나아갈 수도 있다. 아니면 혁명을 완성할 필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권력을 획득함으로써 정부 전복을 넘어 체제를 전복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오늘날 각기 자생적인 것처럼 보이는 운동들은 세 가지 경향으로 형상화된다 ― 그들이 정당이라는 말을 쓰든 안 쓰든 사실상 세 종류의 정당인 혁명 정당과 반동적인 정당, 그리고 이 둘 사이의 간극을 메우려고 시도하는 개량주의 정당이 존재한다.

혁명적 상황의 결과는 이 세 정당 사이의 투쟁에 달려 있다. 개량주의적 선택이 아무런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는 거대한 위기 상황에서 지지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전투가 벌어진다.

사상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사상 투쟁만은 아니다. 근본에서 이것은 실천 투쟁이다. 지배 계급은 우위를 차지하기 위해 노동계급을 분열시켜 집단적으로 세계를 운영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와해하는 데 의존한다.

혁명적 상황에서 노동 계급은 작업장과 거리에서 통제력을 장악하기 위한 투쟁 경험을 통해서만 그런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다. 가장 ‘비정치적인’ 노동자들조차 그들이 새로운 사회를 창조할 수 있는 운동의 일부라고 느끼게 되는 것이야말로 함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추동력이 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운동의 속도를 늦추려는 개량주의적 시도는 심각한 재앙이 될 수 있다. 개량주의자들은 노동자들의 자신감에 제동을 걸고 그리 되면 다시 분열이 찾아온다. 이 때문에 지배 계급 분파들이 퍼뜨리는 반동적인 사상이 다시 주도권을 잡게 된다.

따라서 혁명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거나 후퇴하기 시작하는 사활적인 순간을 맞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후퇴란 과거보다 더 나쁜 방식으로 낡은 자본주의 질서가 부활한다는 것을 뜻한다.

혁명을 시작하는 데에는 혁명 정당이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혁명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와 야만 사이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게끔 하는 혁명 정당이 반드시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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