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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중국’의 실체는 한족 제국주의

최근 중국 지배자들은 경제 성장을 바탕으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서 중국의 국제적 위상을 드높이려 애쓰고 있다. ‘일대일로’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그 일환이다. 다른 한편, 중국의 영토 확장 노력은 주변국들과의 갈등과 분규로 이어지고 있다. 남중국해, 동북공정, 서부대개발, 인도·러시아·베트남·일본 등과의 영토 갈등이 대표적이다.

그리고 중국은 홍콩과 대만에 대해서는 일국양제를, 티베트·신장 위구르 등지에 대해서는 중국의 고유한 영토임을 내세우고 있다. 이 둘을 아우르는 개념이 바로 ‘하나의 중국’이다.

오늘날 중국은 제국주의 국가로 발전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은 소수민족을 억압하고 분리 독립 움직임을 무력으로 제압해 왔다. 대표 사례는 1959년 라싸 봉기의 49주년을 기념해 2008년 3월 10일 티베트 각지에서 벌어진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일이다. 또, 2009년 7월 신장 위구르의 우루무치 시에서 벌어진 위구르족 독립 움직임에 중국 정부는 탄압으로 일관했다. 중국 정부는 위구르족 분리독립 운동의 배후로 ‘동투르키스탄 이슬람운동’이라는 단체를 지목하고 테러 조직으로 규정해 탄압한다.

중국 지배자들이 주장하는 ‘하나의 중국’의 실체는 한족 민족주의이다. 중국 지배자들은 ‘사회주의’ 중국에서 억압받는 민족은 없다고 주장하지만,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반복되는 갈등과 탄압이 그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소수민족 억압 사례 하나만 봐도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마오쩌둥은 중국이 1840년 아편전쟁 때부터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받아 불평등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고, 중국 영토가 갈가리 찢겨졌지만 1949년에 식민지 해방을 이룩했다고 주장한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제국주의 지배로부터의 민족해방인 것은 맞다. 그렇지만 중국에 사는 모든 민족이 “해방”된 것은 아니었다.

티베트인들의 저항을 진압하는 중국 경찰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부정하는 중국 정부의 행태는 다른 열강들과 다를 바 없다 ⓒ출처 SFTHQ (플리커)

중화민족

중국 지배자들은 청 제국 말기와 장제스의 중화민국 시기에 형성된 ‘중화민족’ 개념을 이어받아 중국 내 소수민족들을 그 개념 안에 욱여넣었다. 하지만 ‘중화민족’은 사실 한족 중심의 민족주의 사상에 지나지 않았다.

민족 개념이 근대 사상의 산물임을 염두에 둔다면, 중국에서도 19세기 말 열강의 침략에 직면해 민족주의 개념이 형성되고 발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근대에 형성된 중국 민족주의는 양면적 성격이 있었다.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지배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저항적 민족주의라는 성격과 팽창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함께 있었던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 때의 민족해방 혁명가 쑨원은 “국가의 근본은 인민에 있다. 한족, 만주족, 몽고족, 회족, 장족의 땅을 합하여 일국으로 하고 한, 만, 몽, 회, 장 여러 민족을 합하여 일인으로 한다. 이것이 민족의 통일”이라고 주장했다. 중화민국의 임시약법에 포함된 5족공화론은 반대에 직면해 급히 사라졌지만, 중국의 근대 사상가들의 민족주의 이념에는 티베트나 위구르 등과 같은 소수민족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1921년에 등장한 중국공산당은 러시아 볼셰비키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소수민족의 민족자결권을 옹호했다. 또한 국민당의 장제스가 주장한 ‘중화민족’ 개념이 한족의 동화정책에 기반한 한족의 대민족주의라고 옳게 비판했다. 중국공산당은 중국을 ‘다민족국가’로 보며 연방제를 대안으로 여겼다. 그러나 1925~27년 중국 노동자 혁명 패배 이후, 1930년대 중국공산당은 점차 한족 민족주의 세력으로 변해 버렸다.

사회주의 대가정

마오쩌둥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자가 된 뒤로 ‘대한족주의’를 비판하고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보장한다고 밝히면서 조선족과 몽골족 등 일부 소수민족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중국공산당은 집권할 즈음에는 제국주의 세력의 위협을 명분으로 연방제 공약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고 ‘민족구역자치제도’를 실시했다. (오늘날 광시 좡족, 네이멍구, 닝샤 후이족, 티베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존재한다.) 그리고 중국공산당은 중국이 다민족국가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보다는 중국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개념이 ‘중화민족’이라고 주장했다. (1939년 마오쩌둥은 ‘신단계를 논함’이라는 글에서 “중화민족은 중국 국경 내 각 민족을 대표하는 총칭”이라고 말했다.)

‘중화민족’ 개념은 오늘날 중국 지배자들에게 ‘사회주의 조국의 대가정(大家庭)’이라는 용어로 변형돼 수용되고 있다. 중국 내 소수민족들은 중화민족이라는 큰 가정의 구성원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은 다민족이 우애 있고 협력하는 대가정(大家庭)”이라는 것이다.

더욱이 중국 내 모든 소수민족이 공식적으로 소수민족 지위를 인정받은 것도 아니었다. 중국 정부가 ‘민족식별’ 조사를 통해 55개 소수민족에게만 소수민족의 자격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이 자격을 얻은 소수민족은 자신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고, 민족구역자치를 보장받았으며, 한 자녀 정책을 따르지 않아도 됐다. 그런데 이런 ‘민족식별’ 조사와 소수민족 지위 부여 권한은 한족으로 이뤄진 중국 정부와 중국공산당에게 있었다.

국경선 문제(이른바 변강 문제)에서도 중화인민공화국과 장제스의 중화민국 사이의 강력한 연속성이 보인다. 대표적인 예가 티베트다. 1951년 인민해방군이 무력으로 티베트를 점령하기 전까지 티베트는 중국과 조공 관계였지만 사실상 독립 지역으로 볼 수 있었다. 티베트는 청나라의 원정으로 청 제국에 편입됐지만 종교적(그리고 정치적) 자율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청나라 말기 티베트 지역은 청조의 약화와 영국 세력의 영향력 하에서 사실상 독립 상태가 됐다.

1951년 신중국 정부는 티베트 정부 대표단과 ‘티베트의 평화적인 해방에 관한 17조’ 장정을 맺었다. 이 장정의 핵심은 티베트를 독립 국가가 아니라 중국 내의 한 민족구역자치 지역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해 11월 이 장정을 근거로 인민해방군이 라싸에 입성해 무력으로 지배하게 됐다.

신장 생산건설병단

1958년부터 시작된 대약진운동과 1966년부터 시작된 문화대혁명으로, 소수민족들에게 제공되던 알량한 자치권마저 축소되거나 없어졌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민족적 차이는 없어져야 할 구분이며 종교에 기반한 자치도 변화시켜야 할 계도 대상’이라는 주장이 그 명분이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마오쩌둥 시절에 만들어졌고 대부분 한족으로 구성된 준군사조직 신장 생산건설병단(生産建設兵團)이 유명하다. 이 기구는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소수민족들을 감시할 뿐 아니라 농업과 목축업에서 공업과 관광업까지 이 지역 경제활동의 전반을 장악하고 있다.

마오쩌둥이 사회주의를 내세워 강제로 소수민족을 통합하려는 정책을 추진했다면, 덩샤오핑 이후의 소수민족 정책은 무력 외 경제력을 통해 소수민족을 고사시키는 정책이 추가됐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티베트 자치구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는 지하자원이 많이 매장돼 있을 뿐 아니라 중앙아시아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중국 정부에게 경제적·정치적·군사적으로 중요한 요충지다. 서부대개발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많은 한족이 이주했고, 많은 지역이 개발됐다. 하지만 이 지역 개발로 한족들은 부유해졌지만, 소수민족들은 생활 터전을 잃고 변방으로 내몰렸다. 중국에서는 계급 간 양극화도 심화되고 있지만 한족과 소수민족 간 격차도 벌어지고 있다.

1991년 옛 소련이 붕괴하면서 소련 연방에 속해 있던 많은 소수민족들이 정치적으로 독립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중국 내 소수민족들도 분리 독립 움직임을 보일까 봐 두려웠던 중국 지배자들은 ‘신권위주의’에 기반한 민족주의를 크게 장려했다. 1996년에는 《No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인》이라는 책이 크게 유행했고, 199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주재 중국 대사관 피폭 사건에 대한 애국주의 물결이 일었으며, 1999년에는 댜오위다오 사건으로 일본과의 갈등이 첨예하게 부각됐다.

1997년 중국이 영국한테 홍콩을 반환받으면서 일국양제를 실시하고, 대만에 대해서는 ‘하나의 중국’ 정책을 강조하고 있는데, 이런 정책의 이면에는 바로 한족 중심의 중화민족주의가 자리잡고 있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이 세계적 경제 대국으로 부상하고 정치적·군사적 영향력이 확대되자 중국 제국주의의 세계적 확장을 정당화하는 논리까지 등장했다. 바로 중국의 국익에 따라 관여하는 영역이 확대된다는 이익변강(利益邊疆) 이론이 그것이다.

2009년 1월 4일 인민해방군의 기관지 〈해방군보〉는 아덴만 해적에 대한 대책을 명분 삼아 중국 해군 함대가 소말리아 해협에 파견된 것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했다. “국가 이익이 확대된 모든 곳에서는 우리 군의 사명 역시 확대된다. 새로운 역사적 사명의 요청에 기초해, 우리 군은 국가의 영토 경계뿐 아니라 ‘이익 경계’도 방위해야 한다.”

‘하나의 중국’ 이데올로기의 바탕이 되는 중화민족주의는 사실상 한족 민족주의다. 그리고 중화민족주의가 서부대개발과 동북공정 같은 영토 확장과 ‘일대일로’ 프로젝트 같은 제국주의적 팽창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중화민족주의는 중국 제국주의의 또 다른 표현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