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진화심리학을 비판한 글이다.


지난 맑시즘 때, 필자가 ‘마르크스주의와 진화심리학’을 주제로 발표한 것에 대해 민병우 씨(이하 존칭 생략)가 비판을 제기했다. 민병우는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이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주장하며 결코 ‘생물학적인 결정론의 관점에서 인간본성을 설명하고 있지 않다’는 요지로 필자의 주장에 이견을 제시했다. 또한 진화심리학류의 인간본성론은 우파 이데올로기와 무관하다고도 주장했다. 민병우의 주장은 우리가 진화론과 인간본성을 둘러싼 핵심 쟁점을 명확히 하는 데 기여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민병우가 제기한 지엽적인 이야기까지 모두 다루기보다 우리의 이해를 넓히는 데 기여하는 그의 핵심적인 주장,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관한 주제에 집중하고자 한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필자는 맑시즘 때 이미 언급했던 바와 같이, “유전자가 아니라,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의식적인 행위의 주체”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강조할 것이다.

이 글은 크게 두 가지 내용으로 구성돼 있다. 먼저 민병우의 문제 제기와 관련해서,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이 말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에 담긴 본래의 의미와 유전자 중심 가설에 기초한 인간본성론과 지배 이데올로기 사이의 관계를 다룰 것이다. 그 다음으로 도킨스와 윌슨 등 진화심리학자들의 인간본성론을 받아들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인간 본질에 대한 과학적인 이해가 가능하며 더 합리적이고 신뢰할 만한 설명 체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조명하고자 한다. 이 주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찰스 다윈의 본래의 사상과 이론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인간본성과 관련해서 다윈의 사상과 이론을 검토해야 하는가.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현재 인간본성론자들이 다윈의 지적 권위를 이용하여 인간 본성은 고정불변적이라는 자신들의 신념(myth)을 과학적으로 포장하고 있는데, 정작 다윈은 이런 류의 주장에 맞서 인간 본성의 가변성을 과학적으로 규명하는 일에 평생을 바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다윈의 진화론을 계승한다는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을 정면에서 반박하는 것은 다른 어떤 이론도 아닌, 바로 다윈의 이론이다.

그렇다면 다윈의 사상이 진화심리학 경향의 사람들의 관점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또, 우리가 다윈이 본래 말하고자 했던 인간 본질, 그의 용어로는 ‘의식’에 관한 이야기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다윈이 인간 본질을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을 제공했다는 데 있다. 다윈은 본능적인 행동과 의식적인 행위의 층위를 구분하여,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이 아니다”라는 것과 “인간 정신은 두뇌 활동의 산물이지만, 두뇌나 유전자와 같은 생물학적인 물질 그 자체로 환원될 수 없다”는 변증법적 사유에 바탕을 둔 과학적인 통찰을 제시했다. 이러한 다윈의 통찰은 19세기의 고루하고 낡은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 분자생물학의 한 분야인 ‘후성유전학’(epigenetics)을 통해 계승되고 있다는 점에서 현재에도 유용한 과학이론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이 왜 ‘거짓 이론’인지, 그 논리적 모순을 ‘폭로’(debunking)하고 인간 정신, 특히 ‘의식’(consciousness)을 과학적으로 설명하는 대안 이론으로서 다윈과 마르크스의 핵심 요지를 정리하며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인간은 자유의지를 갖는가? 마르크스는 기계적 유물론과 관념론을 모두 뛰어 넘었기 때문에 인간이 역사 발전의 주체임을 밝혔다. 마르크스와 청년 헤겔주의자들을 묘사한 그림

진화심리학 경향의 ‘유전자-환경의 상호작용’ 주장은 쟁점 흐리기일 뿐이다

본격적인 논의에 앞서,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한다”고 말하는 도킨스나 윌슨, 그리고 진화심리학자들은 이들의 주장을 별 의심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달리,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조화로운 균형’과 같은 소박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겠다. 또한 지난 40년간 “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비판이 제기돼 왔던 이유 자체가 바로 인간이 아니라 유전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한다고 주장한 데서 비롯했다는 점도 미리 언급해 두고자 한다. 즉, 1990년대 초반에 등장한 진화심리학의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론’은 40년 전,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 가설’과 윌슨의 ‘사회생물학’이 제기한 “유전자가 인간의 문화적 행위를 결정한다”는 주장에 바탕한다.

도킨스나 윌슨이 상호작용론을 압축적으로 담아 내기 위해 만들어 낸 용어들인 ‘밈’(meme), ‘문화복제자’, ‘문화유전자’(culturgene)는 여전히 유전자가 중심적이며 결정적이라는 이들의 집착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상식적으로도 ‘호박고구마’는 호박이 아니라 ‘고구마’이고 ‘희망고문’은 영혼 없는 희망의 메시지로 사람들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고문’이듯이 ‘문화유전자’는 문화가 아니라 ‘유전자’에 핵심 주장이 반영돼 있는 용어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자문해 보라. 유전자와 환경이 상호작용한다고 할 때, 만약 유전자 중심의 관점을 지지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유전자의 영향이 환경적 요인보다 50퍼센트보다는 높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유전자 중심의 관점에서 ‘상호작용’이나 ‘환경의 영향’ 같은 표현들은 단순한 수사(修辭, rhetoric)이지 중심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문화유전자’ 같은 용어들은 “유전자가 인간 행위의 근저를 이룬다”는 생물학적 결정론의 메시지를 담고 있을 뿐이다.

또한 이들은 실체가 불분명한 ‘밈’이나 ‘문화유전자’와 같은 추상적인 용어들만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명확한 문장으로도 자신들의 본심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밝혀 왔다. 이를 테면 윌슨은 40년 전, 문화유전자 개념을 중심으로 한 ‘후성규칙’의 아이디어를 제안할 때부터 “유전자가 문화의 고삐를 쥐고 있다”든가 “개인이 특정한 문화유전자를 채용할 것인지 여부는 뇌가 지니는 특징에 달려 있으며 … 유전자 편향에 의존한다”고 명확히 밝혔다.[1] 윌슨만이 아니라 도킨스와 진화심리학 경향의 사람들도 아무리 환경이나 문화를 언급하지만 결국 인간 행동의 근저에는 유전자라는 생물학적 요인이 결정적인 힘을 발휘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40년 전에 제기된 유전자 결정론의 쟁점이 근본에서 해소되지 않고 현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생물학적 결정론의 쟁점만이 아니라 ‘본성 vs 양육’을 둘러싼 논쟁도 40년 간 이어져 왔는데, 그 어느 쪽도 인간 행동에 미치는 요인이 ‘유전자만 100퍼센트’ 혹은 ‘문화적 요인만 100퍼센트’라고 하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주장하지 않았다. 다들 상호작용을 언급하며 선천성과 후천성의 조화로운 균형을 표현하는 수사들을 사용해 왔다. 가령 유전자 중심에 바탕을 둔 인간본성론자들이 유전자가 인간의 문화적 행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를 공유한 반면, ‘유전자-문화 공진화’이론이나 ‘문화진화론’자들은 유전자보다는 문화적 과정이 인간 행동에 대한 더 큰 설명력을 지니고 있으며 문화가 유전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해 왔다. 이를 테면, ‘유전자-문화 공진화’이론은 1976년 펠드먼과 카발리-스포르차라는 연구자들이 도킨스의 주장과 다른 맥락에서 유전자와 환경 사이의 상호작용을 계량적으로 연구한 데서 시작됐다. 즉, 낙농업 문화에서 우유나 유제품을 소비하는 문화적 행위들이 락토오스라는 젖당(유당)을 분해하는 효소인 락타아제를 만들어 내는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2] 이 연구는 낙농업 문화와 락타아제 유전자 사이의 관련성을 규명하여, 문화적 요인이 유전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관점에서 도킨스나 윌슨이 유전자가 문화를 선택한다는 이른바 유전자 중심설을 비판하는 도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이처럼 본성론자들과 양육론자들은 모두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하면서, 실제로는 유전자와 문화 사이의 ‘상대적 중요성’을 놓고 설전을 벌여 왔다. 그래서 쟁점의 본질은 형식적으로 ‘상호작용’이라는 문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상호작용에서 그래도 무엇이 더 결정적이고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지를 둘러싸고 본성론자들과 문화론자들의 지적 다툼이 계속돼 왔던 것이다. 따라서 생물학적 결정론의 관점에서 말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은 쟁점을 흐리거나 생물학적 결정론이라는 당장의 비판을 모면하고 자신들의 주장에 대한 대중들의 경계심을 풀기 위한 것이지, 학문적 정직성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렇다면 ‘유전자가 환경과 상호작용한다’ 혹은 ‘문화유전자’와 같은 말 속에 담겨 있는 진정한 쟁점은 무엇인가. 만약 유전자와 환경이, 그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작용하지 않고 각기 절반씩 공평하게 인간의 심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맑시즘 때 정리 발언에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어떻게 유전자가 인간을 대신해서 의식적인 행위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있다. 다윈도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최고의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3]이라고 주장했던 바와 같이, 인간이 모든 의식적 행위의 주체라는 것은 명명백백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전자가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행동의 주체이며 문화라는 인간 행위의 산물도 ‘밈’이나 ‘문화유전자’라는 용어를 통해 설명하려는 인간본성론자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아래에서는 유전자 중심 가설에 기초한 인간본성론이 어째서 ‘유전자’나 ‘자연선택’과 같은 과학용어들을 빈번하게 사용함에도 불구하고, 비(非)과학적이며 비(非)다윈적인 분석에 기초한 ‘거짓 이론’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유전자 중심의 인간본성론은 현대 분자생물학 연구와 무관하다

먼저 도킨스가 사용하는 유전자 개념이나 인간 행동의 유전에 관한 그의 설명은 현대 분자생물학이나 유전학과는 그다지 관련이 없으며, 도킨스의 머릿속에나 존재하는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도킨스를 비롯해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이 어떻게 유전자 개념을 이용해서 인간본성의 고정불변적인 속성을 설명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만약 인간의 심리와 행동이 유전된다면 어떤 방식으로 자손에게 전달될까. 도킨스식 설명은 이기적이거나 이타적인 인간의 의식적 행동을 지시하는 유전자들이 대물림되면서 타고난 본능을 결정한다고 본다. 그럼 실제 현실에서 도킨스가 주장하듯 우리의 심리와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유전자가 존재하며, 그것들이 유전의 법칙에 따라 후대에 대물림된다는 경험적 근거가 존재하는가. “없다!” 이 대답은 필자인 내가 한 것이 아니라 아래 인용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충격적이게도, 바로 도킨스 자신이 한 것이다.

이타적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란 이타적으로 행동하도록 신경계의 발달에 영향을 주는 유전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이타적 행동이 유전된다는 실험적 증거가 있을까? 없다. 그러나 놀랄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어떤 행동에 대해서든 그 유전학적 연구는 거의 수행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4]

도킨스는 거의 궤변에 가까운 무책임한 말을 늘어놓고는 그 다음에 꿀벌의 행위에 관한 실험을 달랑 하나 소개하면서, “유전자에서 행동에 이르는 배(胚, embryo) 발생의 화학적 인과 관계의 사슬이 어떻게 되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 무슨 무슨 행동에 대한, 무슨 무슨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라고 말한다 해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라며, 꿀벌과는 비교도 안 될 인간의 복잡한 행동을 꿀벌 수준으로 환원시켜 일반화하고 있다.[5] 주목할 점은 도킨스가 인정한 것처럼 오늘날 분자생물학 혹은 유전학 분야의 실험실에서는 인간 행동을 지시하는 유전자의 존재를 규명하는 실험이나 도킨스식 인간 행동의 유전 메커니즘을 분석하는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도킨스의 유전자 중심 가설을 공유하는 사회생물학 및 진화심리학의 인간본성론 역시 현대 유전학 연구와는 그다지 관련이 없다.

그런데도 어떻게 분자생물학자도 유전학자도 아닌 도킨스가 인간 행동의 유전에 관한 권위자가 될 수 있었는가. 주된 배경 가운데 하나는 1953년 DNA 이중나선 구조의 발견자 중에 한 명인 프랜시스 크릭(F. Crick)이 향후 생명과학 연구는 ‘유전자’를 중심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공표한 데서 시작됐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현대 분자생물학은 유전자를 중심으로 연구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동물 실험을 통해 유전자를 조작하고 일부 연구자들은 법이 허용하는 테두리 안에서 인간의 줄기세포 연구 등을 통해 유전자를 분석하기도 한다. 이들의 연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이러한 연구들이 대부분 신체 형질과 관련된 연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실험실 현장에서는 주로 암이나 유전병에 관한 연구를 하지, 인간의 심리나 행동에 관여하는 유전자를 규명하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생명과학 연구자들은 암이나 유전병이 발생하는 기전을 설명하기 위해 세포에서 세포핵, 염색체, 유전자(그리고 그 옆에 붙어 있는 히스톤 단백질), 뉴클레오티드라고 불리는 DNA 염기 서열의 구성 요소들인 A(아데닌), T(티민), C(시토신), G(구아닌) 같이 가장 단순한 형태의 물질로까지 나누고 쪼개서 분석한다. 이를 두고 환원적 연구 방법이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생명과 질병에 관한 연구로서 유전학이나 이를 연구하는 방법인 환원적 연구 방법론을 근본에서 부정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도킨스나 윌슨, 그리고 진화심리학자 같은 유전자 중심의 인간본성론자들이 암이나 유전병 같이 신체 형질에 관한 분석을 통해 이룬 현대 유전학의 성과들을, 갑자기 인간 행동이나 사회에 관한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인 양 둔갑시킨다는 데 있다. 다시 말해 유전자를 직접 다루는 실험실의 연구자들은 이기적인 혹은 이타적인 행동을 지시하는 유전자나, 윌슨이 말한 문화유전자를 찾는 연구를 수행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도킨스와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은 생명체의 눈 색깔을 지정하는 대립유전자나 유방암을 일으키는 유전자의 존재를 규명해 온 현대 유전학의 무대 위에다, 규명된 적 없는 인간의 심리나 행동에 관여하는 유전자가 존재하는 것으로 연막을 치고, 유전자가 지배하는 인간 본성이라는 허구의 스토리로 각색된 대중 공연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도킨스도 인정했듯이. 현실 세계에는 인간의 의식적 행동을 코딩(coding)하는 유전자란 존재하지 않는다. 비슷한 맥락에서 진화심리학의 중심어 가운데 하나인 인간 심리의 ‘모듈’(modules) 개념도 생물학적 실체가 불분명하다.[6] 요컨대 도킨스나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자들이 사용하는 유전자나 두뇌 같은 용어들은 지극히 현대적인 과학용어로 들리지만 실제 담겨 있는 의미는 현실의 물질 세계에서 검증하기 어려운, 이들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개념일 뿐이다.

도킨스, ‘유전자’라고 쓰고 ‘신’이라고 읽는다

도킨스가 사용하는 유전자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DNA 염기서열’의 물질적 의미를 훨씬 넘어서는 추상적 개념이다. 도킨스는 유전자를 ‘복제자’로 해석하여, 대물림되는 유전을 조상 세대의 형질이 고스란히 후손에게 전달되는 이른바 ‘고정 불변적인’ 현상으로서 이해한다. 이러한 생각 역시 유전이 DNA 염기서열의 무작위적인 변화로 인한 차이(변이)를 만들어 내는 과정이라는 유전학의 기초 상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한 부모에게서 같은 유전자를 물려받은 형제자매들이 한 배에서 태어나지만 외모만이 아니라 성격도 제각기 다른데, 어떻게 유전자가 붕어빵을 찍어 내는 것과 같은 ‘복제자’라는 개념으로 설정될 수 있는지, 기본적인 개념부터가 의심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7]

실체도 불분명하고 현대 유전학에서 검증되지도 않은 도킨스의 유전자(복제자)가 도대체 어떻게 인간의 행동을 지시하며 문화적 행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단 말인가. 이쯤 되면 도킨스의 유전자는 거의 창조론자들의 관념에나 존재하는 ‘신’과 동급의 지위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도킨스는 아래 인용문 같이 마치 창조주가 인간을 만든 것처럼, “유전자가 인간의 궁극적인 주인”이고 “우두머리 프로그래머이며 자기의 생명을 위해 프로그램을 만든다”고 주장한다.[8]

의식이란, 실행의 결정권을 갖는 생존 기계[인간–필자]가 그들의 궁극적 주인인 유전자로부터 해방되는 진화의 정점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이타적이든 이기적이든 동물의 행동은 유전자의 제어 하에 있으며 그 제어가 간접적이기는 하나 그와 동시에 매우 강력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생존 기계와 신경계를 조립하는 방법을 지시함으로써 유전자는 생존 기계의 행동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그러나 다음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순간순간 결정하는 것은 신경계다. 유전자는 일차적 정책 수립자이며 뇌는 집행자다.[9]

이 인용문에는 아주 중요한 두 가지 내용이 담겨 있다. 하나는 인간본성론자들이 말하는 ‘유전자와 환경의 상호작용’의 핵심 메시지가 결국 ‘유전자 결정론’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데 있다. 다른 하나는 인용문 첫 줄의 ‘유전자가 궁극의 주인’이라는 문구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도킨스의 유전자 관념의 실체가 신학적 세계관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사실, 도킨스 지지자들은 도킨스가 말하는 유전자를 현대 분자생물학의 DNA 염기서열의 유전자를 지칭한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도킨스 자신은 ‘유전자’라고 쓰고 ‘신’이라고 읽고 있다. 이게 무슨 말인가.

도킨스가 말한 ‘유전자가 궁극적 주인’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기독교 사회에서 모든 피조물이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을 창조주에서 찾는 ‘궁극적인 원인’과 같은 의미이다.[10] 과격할 정도로 종교를 비난해 온 도킨스의 정신 세계에는 종교적 관념을 과학적 관념으로 대체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는 야망이 서려 있다. 그래서 그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창조주’의 역할로 간주되어 온 생명의 프로그램을 ‘유전자’가 담당하는 것으로 설정한다.[11] 다시 말해 도킨스의 관점에 따르면, 유전자는 마치 신이 설계한 프로그램에 의해 인간이 창조됐듯이, 유전자가 뇌를 만들고 그 뇌가 유전자로부터 명령을 받아 집행하면 인간의 행위가 이루어지니 유전자가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의도하는 것처럼 유전자가 우리의 행동과 운명을 결정짓고 있는 셈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창조론이 ‘신학적 세계관의 결정론’이라면, 도킨스식 유전자 중심 가설에 바탕을 둔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은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양자는 결정론의 세계관을 공유한다.

결정론적 세계관이 문제의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목적론(teleology)으로도 불리는 결정론적 세계관은 보수적 지배 이데올로기와 동전의 양면처럼 불가분 관계에 있다. 종교가 지배하는 시대에는 신학적 세계관의 결정론이 인간의 운명과 존재 이유를 설명했다. 비슷한 맥락에서 유전자 같은 생물학적인 요인으로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생물학적 결정론’도 현 체제의 모순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결정론적 관점은 신학이나 생물학만이 아니라 물리학이나 사회이론 같은 다양한 분야에도 존재해 왔으며, 무엇보다 지배자들만의 전유물도 아니었고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형태로만 존재하지도 않았다. 결정론적 세계관은 소위 ‘기계적 유물론’의 형태로 좌파나 진보 진영 내에서도 강력한 힘을 발휘하곤 했다.

그래서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 같은 혁명가들이 결정론적 세계관에 맞서 투쟁한 것이다. 예를 들면 엥겔스는 독일 사회주의노동당 내에 영향력 있는 정치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인 오이겐 뒤링의 기계적 유물론에 맞서 《반(反) 뒤링론》과 《자연변증법》을 집필했고, 레닌은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핵심 리더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플레하노프와 그가 지지하는 마흐주의의 기계적 유물론에 맞서 《유물론과 경험 비판론》을 출판했다. 마르크스는 박사 논문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를 통해 기계적이고 결정론적인 자연철학의 지적 원류를 분석했으며, 《독일이데올로기》나 《신성가족》 등을 통해 당시 독일 진보 진영의 주요한 부위였던 청년 헤겔파의 관념적 급진주의를 비판했다. 이들 혁명가들은 결정론적 세계관이 인류가 처한 부조리한 현실을 숙명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주어진 삶의 조건을 바꾸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를 박약하게 한다는 점에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반동(反動, anti-movement)적인 사상으로 규정했다.

물론 생물학적 결정론의 인간본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홍준표나 트럼프 같은 보수적 우익 정치인들과 동일하게 대할 수는 없다. 진화심리학 경향의 사람들이 정치인의 손에서 놀아나는 꼭두각시는 아니지만, 스탈린 정권 하의 뤼센코의 유전학이라든지 파시즘의 우생학과 같은 부도덕한 과학적 이데올로기의 만행이 과학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고 있는 만큼, 과학 활동과 보수적인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순진한 발상이다.

이데올로기를 무엇으로 정의하든 간에 과학이론을 수립하는 사람이 어떤 형태의 세계관으로부터 완전히 독립해서 과학 활동을 수행할 수 있다는 생각은 과학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본 상식과도 부합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누구도 가설 없이 이론을 수립할 수 없으며 그 가설의 일부는 사회정치적으로 일반화된 세계관이든,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는 지배계급의 사상이든, 평범한 사람들이 상식이나 통념이라고 말하는 것이든, 어떤 형태이든 간에 당대의 주류적인 세계관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 그런 맥락에서 1970년대 신자유주의라는 완전 자유경쟁의 시장 논리가 확산되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그리고 인종차별이 버젓이 존재하던 미국 남부의 앨라배마 대학교에서 학부 시절을 보낸 윌슨의 개인적 경험들이 인종차별의 생물학적 근거를 찾고자 하는 그의 사회생물학 가설이 만들어지는 과정과 완전히 무관하다고 볼 수 없다.

그래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1차적 기능은 지배 이데올로기와 뒤범벅돼 있는 지식 체계나 담론에 비판적인 물음을 제기하며 경험적으로 부합하는지를 엄밀하게 따져 묻는 데 있다.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은 이론 수준에서든 경험적 연구에서든 이런 엄밀한 분석에 바탕하지 않는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도킨스가 복제자로서 설정한 유전자에 인간 행위가 코딩되어 유전된다는 경험적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즉, 현대 유전학 연구는 유전자 중심설에 바탕을 둔 인간본성론의 연구와 그다지 관련이 없다.

무엇보다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은 다윈의 진화론을 계승한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다. 먼저 다윈은 인간의 행위를 크게 무의식적으로 행해지는 본능적 행동과 의식적 행동이라는 두 층위로 구분하여, 필수적인 생명 활동인 먹고 자고 위험을 피하는 등의 본능적 행동은 반사 반응에 관여하는 신경계통(도킨스는 이를 유전자라는 가장 작은 단위로 환원시켜 접근한다)을 통해 유전된다고 보았다.[12] 그러나 다윈은 의식적 행위는 본능과 마찬가지로 두뇌라는 신경계에서 주로 관장하지만, 의식적인 행동들이 두뇌에 각인돼 후대에 전달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즉, 의식은 두뇌라는 생물학적 토대를 갖지만 의식의 본질은 신경계통의 물질이 선천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후천적인 인간 행위를 통해 형성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두뇌라는 생물학적 물질을 열심히 들여다봐봤자 인간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은 의식도 본능과 동일하게 유전자라는 생물학적 물질에 코딩되어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불변적 속성으로 간주하는데, 이는 다윈의 분석과는 완전히 다르다. 또한 다윈은 ‘자연선택’의 발견자였지만 지질학적인 시간대에서 일어나는 점진적인 ‘적응’의 메커니즘인 ‘자연선택’ 개념을 본성과 같은 정신적인 속성을 설명하는 데 적용하기보다 ‘신체 형질’에 한정해서 주로 적용할 것을 《종의 기원》 5판의 서문과 《인간의 유래》에서 거듭 강조했다.[13] 하지만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은 다윈이 하지 말라는 방식 그대로 인간본성의 고정불변적 속성을 주장하기 위해 점진적 적응에 관한 자연선택 개념을 남용하면서 다윈주의를 계승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다윈은 본성의 지배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동물 수준에서도 타고난 본능적인 행동은 “생물학적인 요인에 완전히 종속돼 있지 않으며 비교적 쉽게 한두 세대라는 짧은 시간 동안 변할 수 있고, 보편적이라고 할 만한 본능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종의 기원》 (1859) 첫 판본 때부터 6장과 7장에서 많은 지면을 할애해 설명했다. 하지만 진화심리학자들만이 아니라 이들과 이론적 동맹 관계에 있는 스티븐 핑커나 대니얼 데닛 같은 인지철학자들 역시 ‘보편적이며 쉽게 변할 수 없는 인간본성론’을 주장하고 있다.[14] 더불어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다윈은 《종의 기원》을 출판하기 20년 전인, 1838~39년에 자연선택 개념을 발견할 때부터 “인간의 본질은 두뇌라는 견고한 성(citadel)을 공략함으로써 파악될 수 없다”[15]는 점을 명확히 했지만, 소위 다윈주의를 계승한다는 에릭 칸델 같은 신경학자들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대뇌피질의 앞쪽 띠이랑’에 존재한다는 프랜시스 크릭의 두뇌 중심적 관점을 공유한다.

다윈의 이론만이 아니라 진화심리학은 자신들의 학문적 원류인 인지심리학 분야에서 빌려온 모듈 개념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도 그 개념의 창시자인 제리 포더(Jerry Fodor)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심리철학자이자 현재 진화심리학의 중심어 가운데 하나인 ‘모듈’ 개념 및 계산주의 심리학 이론을 정식화한 포더는 스티븐 핑커를 비롯해 진화심리학이 모듈 개념을 잘못된 방식으로 적용하는 데 크게 반발하며 그들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을 출판하기도 했다. 포더의 책 제목인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는 핑커의 《마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비판할 명확한 목적 하에서 제시됐다. 포더는 진화심리학, 핑커, 그리고 헨리 플롯킨이 주도하는 인지철학 내의 ‘심리학적 선천론과 신다윈설의 진화이론’을 결합하는 방식, 그리고 인간의 마음을 컴퓨터의 정보 처리와 동일시하는 접근법 등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포더의 비판이 “일반적으로 신종합설이 인지에 관하여 내놓는 적응주의 주장들은 믿을 만한 구석이 거의 없다[16]는 관점에서 출발하는 만큼, 진화심리학의 이론적 틀 자체가 근본에서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을 말해 준다.

다윈의 변증법적 통찰: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이 아니다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이 다윈의 주장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는 근거들은 차고 넘친다. 그러나 인간 본질에 관한 다윈의 관점과 진화심리학자들 사이의 가장 큰 불일치는 바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한다. 즉, 다윈은 인간은 동물이면서 동시에 동물이 아니라는 변증법적 관점에서 인간을 이해했지만, 결정론적 세계관을 공유하는 인간본성론자들은 인간은 동물이거나 동물 수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한 석기 시대 원시인 정도로 간주한다. 이런 관점의 차이 때문에 다윈은 인간 본질의 역사성과 가소성(plasticity)을 옹호하는 결론에 이르렀지만,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은 인간 본성이 유전자에 의해 프로그램화되어 후천적으로 쉽게 변할 수 없다는 불변성에 천착하게 됐다. 즉, 다윈은 인간만이 지닌 고유한 정신 능력인 ‘의식’이 ‘사회적 본능’(social instinct)이라는 동물 세계에서 유래했지만, 사회적 본능이 일정 단계로 발전하여 의식으로 전환되면 그 이후부터 자연선택 같은 생물학의 법칙이 아니라 오로지 사회문화적인 영향을 받아 변한다고 주장했다.[17] 그러나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자들은 인간의 본질을 동물적인 본능의 직접적인 결과로 인식한다.

그래서 윌슨이 《사회생물학의 승리》를 외친 책의 핵심 주장인 “새도 바람 피운다”는 여러 여성과 성적 관계를 원하는 남성의 난교 성향이 자연적 본성이라는 논거로서 제시되며, 진화심리학류의 책들은 “양복 입은 원시인”을 주된 타이틀로 삼아 아직도 인간이 야만인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묘사한다. 또한 도킨스는 이런 이야기들에 ‘유전자’ 개념이 포함된 수사들을 갖다 붙이면서 과학적 설명인 양 포장한다. 이들은 자연선택, 유전자, 동물 행동 등의 개념을 이용하여 생물학의 영역을 벗어난 인간의 의식을 다시 유전자의 지배를 받는 본성으로 규정하고 생물학의 법칙 하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다윈은 오직 인간만이 동물 세계에서 유일하게 의식을 지닌 존재로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고 이에 기초하여 행동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자유의지에 따라 행동한다고 강조했다. 도킨스와 사회생물학 및 진화심리학은 성매매, 강간, 살인, 이기심, 이타심, 협동, 우애 등을 타고난 본성으로 규정하여 후천적 요인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사례들은 다윈의 관점에 따르면 본성이 아니라 인간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의식의 영역에 해당된다. 즉, 현대인은 누구나 성매매 · 강간 · 살인 등이 나쁜 행위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때론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으로 옮긴다. 이를 테면 무고한 사람을 끔찍한 방법으로 살해한 소위 미치광이 범죄자로 불리는 사람들도 자신들의 행동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완전 범죄를 계획하거나 사이코패스로 규정되어 감형되길 바라는 것이다. 다윈이 말한 바와 같이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최고의 판단을 내리는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다윈은 유전자가 행위의 주체라는 도킨스와 달리 인간이 의식적인 행위의 주체라는 점을 명확히 했다.

그래서 다윈의 관점에 따르면, 수컷 새가 여러 암컷과 교미를 하든 혹은 한 암컷에 충실하든 이러한 동물들의 행동이 인간의 외도 성향이나 일부일처제에 대해서 말해 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왜냐하면 외도를 하는 것이 나쁜 것이고 일부일처제가 좋은 것이라고 사회적으로 규정된 이상, 사람들은 외도가 옳고 그른 행동인지를 사회적 규정에 따라 판단하여 외도를 할지 말지 스스로 결정하는 이른바 의식의 영역에서 접근하기 때문이다. 또한 다윈은 “보편적인 도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한 사회의 도덕적 가치관이 시대와 문화적 조건에 따라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18] 즉, 외도는 나쁘고 일부일처제가 좋은 것이라는 인식은 하나의 진리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특정 사회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되는 것이며 사회제도가 바뀌면 또 그 나름의 도덕의 기준이 마련되고 사람들은 이에 기초해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행동할지 말지를 스스로 결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다윈의 관점은 진화심리학자들이 석기 시대 대형 초식 동물을 쫓던 사냥꾼으로서의 남성 원시인의 역할을 현대의 남성 중심적인 사회의 진화적 기원으로 삼는 관점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 다윈은 남성이 여성에 견줘 태어날 때부터 철학이나 과학과 같은 깊은 사고력을 요구하는 지적 능력이 더 뛰어나다고 주장할 때조차, 생물학적 결정론에 경도돼 있는 진화심리학과는 다르게 접근했다. 그는 실제 여성들이 처해 있는 사회적 현실을 반영해서 접근했는데, 남성과 여성이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성인이 된 이후에도 동동한 교육 기회를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특히 성인이 된 이후에 여성이 심오한 사고력을 발전시키고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강조했다.[19] 즉, 어릴 때 또래 남자들과 똑같이 교육받더라도 성인이 된 후에 여성이 결혼과 출산, 유아와 사회적 편견 등의 이유로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거나 고도로 추상화된 사고력을 훈련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려했던 것이다. 실제 학업 성적이나 대학수학능력 시험, 혹은 변호사나 행정고시 수석 등에서 여성이 괄목할 만한 능력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오랜 숙련 기간을 거치는 전공 분야의 교수나 병원의 외과 과장직 혹은 기업이나 공공분야의 고위직에는 오르지 못하는 현실은 여성의 지적 능력이 갑자기 감퇴해서 벌어진 일이 아니다. 성인 여성이 지적 훈련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여성에게 전담되어 있는 가사와 육아 문제를 사회가 해결하는 데 달려 있다. 다윈의 이러한 통찰은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이 석기 시대부터 육아에 진화적으로 적응한 데서 비롯했다는 진화심리학의 졸렬한 이야기와는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다윈은 《비글호 항해기》의 마지막 장인 21장에서 노예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20] 그는 당대 저명한 과학자로 알려진 훔볼트와 같은 사람들이 노예제라는 사회 체제의 모순이나 불평등을 자연의 법칙으로 설명하는 것에 커다란 분노를 느끼며 이러한 주장의 윤리적 측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일침을 가했다. “가난한 자들의 비참함이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제도에 의한 것이라면, 우리의 죄가 크다”[21] 여기서 다윈이 죄를 범한다고 말하는 ‘우리’는 “이웃을 제 몸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을 기도하는 바로 그 사람들”로서 노예제라는 끔찍한 “행위들을 저지르고 변명”하는 사람들이다. 다윈은 하느님을 믿으면서 노예제를 자연의 법칙으로 옹호하는 바로 ‘훔볼트 같은 과학자들’의 죄가 훨씬 더 사악하다는 점을 역설했다.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은 다윈이 비판한 훔볼트 같은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비판받아 마땅하다.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은 개념이나 이론 수준이든 경험적 연구이든 신뢰할 만한 근거들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불평등의 문제를 자연의 법칙으로 정당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의 본질을 분석하는 데 있어 생물학적 결정론의 관점을 비판해 온 다윈의 사상을 생물학적 결정론의 인간본성론을 옹호하는 과학이론으로 왜곡하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이는 단지 다윈 개인의 명예에 관한 문제를 넘어 우리가 인간 본질에 대해 합리적이고 과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하나의 유용한 설명 체계로서 다윈의 사상을 훼손하기 때문이다. 그런 맥락에서 ‘유전자가 아니라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의식적인 행위의 주체’라는 다윈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들을 정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짓고자 한다.

먼저 우리가 진화심리학 경향의 인간본성론과 관련해서 다루는 주제들은 사람들이 초콜릿 같은 단 것을 좋아하는 이유나 음식을 불에 익혀 먹으면서 두뇌가 커졌다는 이야기, 혹은 소를 길들이면서 젖당을 분해하는 효소와 관련된 유전적 변이가 발생한 이야기와 같이 인간이 음식물을 섭취하는 문화적 행위와 신체 형질의 관계에 관한 주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다. 진화심리학과 사회생물학, 그리고 도킨스가 인간의 심리와 행동, 혹은 인간의 의식에 관해 말해 온 것들이 핵심 쟁점이다. 가령 이들은 배우자 선택에 있어 여성은 남성의 경제적 능력을 중시하고 남성은 여성의 외모와 젊음을 선호하는 것이 진화적 기원에서 비롯한 것이며,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게 된 이유가 석기 시대 사바나 초원에서의 진화적 적응 때문이고, 남성이 성매매나 외도와 같은 난교를 선호하는 경향이 동물의 본능에 적용되는 동일한 생물학의 법칙의 지배를 받아서이며, 배우자를 살해하는 범죄 행위도 유전자의 생식 전략의 일환이고,[22] 살인 · 강간 · 폭력과 같은 반(反)사회적 행동들도 두뇌나 유전자에서 기인하여 후천적으로 쉽게 변할 수 없고 어느 시대나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본성이라고 주장하는데, 과연 이러한 이야기들이 정말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지를 다루는 데 있다.

다윈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들은 본성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판단 대상이 되는 ‘의식’의 문제이다. 비록 의식은 동물 세계에서 유래했지만, 생물학의 법칙이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보편적이지 않으며 시대와 문화적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즉, 인간이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의식의 변화도 겪고 도덕적 가치관에 대해서도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과거에 옳았던 행위가 지금은 옳지 않은 것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이야기를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의 6번째 테제에서 압축적으로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인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라 그 현실의 사회적 관계들의 총체이다.” 즉,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대뇌피질 앞쪽 띠이랑을 MRI로 스캔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을 이어 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맺게 되는 생산 관계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산관계를 변화시키는 것처럼 거대한 변혁을 겪은 ‘나’는 이전의 의식과 다른 새로운 의식을 갖게 된다. 다시 말해 ‘나’는 유연한 감각 기능이 내재된 두뇌라는 첨단 물질을 이용해 외부 세계에 변화된 환경에 잘 적응하는 수동적인 반응을 구사할 수도 있고, 아예 외부 세계를 근본에서 바꾸는 능동적인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의 의식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 프랑스 혁명이나 러시아 혁명 같은 대격변만이 아니라 그보다 낮은 수준의 사회적 변화들 혹은 막장 드라마와 같은 대중매체도 ‘나’의 의식에 이런저런 영향을 미치며 ‘나’라는 존재를 계속해서 재구성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다윈은 의식이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았으며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인간의 의식이 유의미한 변화를 겪고 재구성되는 과정을 과학적으로 설명했다. 즉, 진화이론으로 자연 세계에서 의식의 출현을 분석한 다윈이 동물 세계에서 유일하게 호모 사피엔스만이 생물학의 법칙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역사를 갖는 유일한 종(種, species)이라는 사실을 규명했다면, 마르크스는 현재의 ‘나’와 사회가 과거 인간들의 의식적 행위의 산물(더 구체적인 용어로는 계급투쟁의 산물)이라는 ‘역사적 유물론’의 관점에서 우리 자신과 인간 사회를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대안적 이론을 제시했다.


참고할 만한 자료들

  1. 다윈의 본능에 관한 진화이론
    • 다윈의 《종의 기원》, 6~7장 그리고 《인간의 유래1》 3~4장.
    • 박성관의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 7장.
  2. 결정론적인 세계관과 유물주의 자연철학
    • 칼 맑스의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의 부록의 ‘역자 해제’
    •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 1장.
    • 존 벨라미 포스터 외, 《다윈주의와 지적 설계론》의 3~6장.
    • 리처드 요크 외, 《과학과 휴머니즘》.
  3. 인간의 의식과 뇌과학 이론과 관련하여
    • 데이 리스 외, 《새로운 뇌과학》 2~3장.
    • 힐러리 로즈 외, 《급진과학으로 본 유전자, 세포, 뇌》.
  4. 유전의 다양한 메커니즘에 관한 유전학 관련 도서
    • 이블린 폭스 켈러, 《유전자의 세기는 끝났다》.
    • 리처드 르윈틴, 《DNA 독트린》.
    • 리처드 C. 프랜시스, 《쉽게 쓴 후성유전학》.


[1] 케빈 렐런드 · 길리언 브라운, 《센스 앤 넌센스》 (동아시아, 2014), 131, 137쪽.

[2] Eva Jablonka and Marion J. Lamb, Evolution in Four Dimensions: Genetic, Epigenetic, Behavioral and Symbolic Variation in the History of Life (The MIT Press, 2005), pp. 293-296; 요점이 정리돼 있는 번역본으로 케빈 렐런드 외, 《센스 앤 넌센스》, 327쪽 참고.

[3] 다윈, 《인간의 유래1》 (한길사, 2006), 184쪽.

[4]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서울: 을유문화사, 2010), 124쪽.

[5] 도킨스, 위의 책, 125~126쪽. 꿀벌에 관한 실험은 로센불러의 실험을 말하며, 실험의 구체적인 내용은 꿀벌이 병에 걸린 애벌레를 찾아서 갖다 버리는 행동이 유전된다는 것이다.

[6] 진화심리학의 모듈 개념은 종종 그 생물학적인 실체로서 두뇌나 유전자를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도킨스가 존재하지 않는 이기적 유전자를 가정한 것처럼, 진화심리학의 모듈 개념도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두뇌와는 다른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대뇌피질의 각 영역을 세분화해서 다양한 인간의 심리가 각기 다른 영역에 배치되고 그 영역의 작용은 독립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즉 두뇌의 각 부분에 특정한 심적 능력을 위해 전문화된 모듈이 존재한다고 말하는데, 가령 언어, 기억, 수학적 능력, 얼굴 인식 등에 모듈이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하는 사람을 찾아내는 모듈도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선천성과 모듈성(modularity) 사이에는 논리적이든 생물학적이든 필연적 관련이 없지만, 심리적 메커니즘의 모듈은 종종 ‘선천적’이라거나 ‘본능’으로 설명된다. 진화심리학의 모듈 개념은 다윈이 비판한 19세기 골상학자들의 관점과 매우 유사하여 현재에도 진화심리학의 모듈 개념이 골상학적인 분석에 바탕한다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골상학적인 아이디어에 기반한 모듈주의에 관한 비평은 데이 리스, 스티븐 로즈, 《새로운 뇌과학》 (한울, 2010), 90~95쪽 참고.

[7] 리처드 요크, 브렛 클라크, 《과학과 휴머니즘》 (현암사, 2016), 181~190쪽.

[8] 도킨스, 위의 책, 127쪽.

[9] 도킨스, 위의 책, 123쪽.

[10] 다윈의 진화사상은 바로 신학적 세계관의 ‘궁극의 원인’으로 표현되는 결정론과 목적론을 부정하는데서 출발했다. 다윈은 《종의 기원》 (1859)을 출판하기 20년 전에 작성한 미출판 노트들, 특히 인간정신을 유물론적 관점에서 정리한 《M》과 《N》 이라는 노트들에 ‘궁극적인 원인’의 결정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문구들을 가득 적어 놓았다. 가령 다윈은 “이러한 관념은 설명이 아니며, 자연의 법칙이라고 할 수도 없고, 전혀 쓸모없는 것”(존 벨라미 포스터, 《다윈주의와 지적설계》, 162쪽)이라고 강하게 비판하는가 하면, 플라톤의 궁극의 원인으로 표상되는 이데아 개념을 비판하는 맥락에서 ‘플라톤을 원숭이로 고쳐 읽어라’(Darwin, 1838, 〈M〉, p. 532, 551)라고 하고, 로크의 관념적 물질이론에 맞서 “개코원숭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로크보다 형이상학에 더 커다란 공헌을 할 것이다”(Darwin, 1838, 〈M〉 p. 539; 데스몬드 외, 《다윈평전》, 436~437쪽)라고 비유적 표현을 들어 비판했다. 그런데 황당하게도 이러한 문구들은 다윈의 1차 문헌에 기초해서 진화론을 분석하지 않는 진화심리학 경향의 연구자들의 의해, 마치 다윈이 개코원숭이의 동물 행동을 인간 정신을 이해하는 기초로 삼았다는 식으로 재해석되고 있다(장대익, 《다윈의 서재》 (2015)).

[11] 도킨스가 유전자를 프로그래머에 비유하는 것은 19세기 창조론자들이 신을 프로그래머에 비유했던 것과 매우 유사하다. 산업혁명기 영국의 자연신학자들은 창조주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완벽하게 세계를 창조했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시계, 쥬크 박스, 오르간, 계산기 등의 기계장치 프로그래머로도 불렀다. 최초의 계산기를 발명한 찰스 배비지(C. Babbage)는 창조주를 계산기의 프로그래머에 비유하며 창조의 과학적 설계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H. Gruber, Darwin on Man: A Psychological Study of Scientific Creativity (London: Wildwood House, 1974), pp. 208-209, p. 230.

[12] 다윈은 당시 첨단 과학으로 불리던 19세기 신경과학의 토대 위에서 인간 정신의 진화사적 맥락을 분석했다. 이와 관련한 다윈의 연구는 그의 후기 저작 가운데 하나인, 《인간과 동물의 감정표현에 관하여》 (서해문집, 1997)의 1~3장에 잘 정리되어 있다. 그러나 19세기 신경과학의 내용에 관한 배경지식이 없다면 다윈의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13] 다윈, 《인간의 유래1》, 40, 117쪽; 《종의 기원》 (동서문화사, 2009), 26쪽.

[14] 진화심리학류의 주장을 공유하는 언어철학자 스티븐 핑커의 책, 《빈 서판》 부록에는 도널드 E. 브라운이라는 연구자가 정리한 수백 가지의 ‘보편적인 인간본성’의 리스트가 있다. 이 리스트에는 진화심리학이나 사회생물학, 그리고 이기적 유전자 가설 등이 자주 언급해 왔던, 남성의 외도성향이나 포르노 및 성매매를 탐닉하는 경향, 남성이 여성보다 더 공격적이고 사회·경제적인 영향력(권력 및 리더쉽 등)을 획득하는 경향, 혹은 살인 및 강간과 같이 극단적인 반(反)사회적 행동 등에 관한 항목 외에도, ‘검은색’이나 ‘10~70개의 범위에 있는 음소의 수’와 같이 정말 생각지도 못할 내용들이 보편적인 본성으로서 규정돼 있다. 그 가운데 다윈이 인간만이 지닌 옳고 그름을 구별하는 의식이라는 정신 능력만이 아니라 지배와 복종, 텃세, 민족주의, 경제적 불평등, 성(性)별 노동 분업 등과 같이 현 체제의 모순들도 어느 시대나 문화에 존재하는 ‘보편적인’ 인간 본성으로 규정돼 있다. 자세한 내용은 스티븐 핑커, 《빈 서판》 (사이언스북스, 2004), 761~767쪽 참고.

[15] C. Darwin, N5, “N notebook”(1838) in Charles Darwin's Notebooks, 1836-1844: Geology, Transmutation of Species, metaphysical Enquiries, Transcribed and Edited by Paul H. Barrett, Peter J. Gautrey, Sandra Herbert, David Kohn and Sydney Smith (UK: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7), p. 564; Howard E. Gruber, Darwin on Man (London: Wildwood House, 1974), pp. 201-217, p. 361.

[16] 제리 포더, 《마음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알마, 2013), 170쪽.

[17] 다윈, 《인간의 유래1》, 222쪽.

[18] C. Darwin, op. cit., 〈M〉 notebook, pp. 75-76.

[19] 다윈, 《인간의 유래 2》, 496~98쪽.

[20] 다윈, 《비글호 항해기》, 701~703쪽.

[21] 위의 책, 703쪽.

[22] 최재천, 장대익 외, 《살인의 진화심리학: 조선 후기의 가족 살해와 배우자 살해》 (서울대학교출판부,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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