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개신교회는 올해를 종교개혁 500년이 되는 해로 기념하고 있다. 특히 10월 31일은 1517년 독일에서 당시 아우구스티누스수도원 수도사 마르틴 루터(1483~1546)가 비텐베르크의 한 성당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인 사건에서 비롯한 기념일이다.

비덴베르크시의 한 성당 정문에 ‘95개 논제’를 붙이는 루터

그러나 이 기념 행위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교가 유일한 종교라거나 대표적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는 수많은 한국인들에게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는 주제넘은 말이다. ‘교회개혁’이 옳은 용어다.

둘째, ‘95개 논제’는 학술 토론을 목적으로 작성됐고 아직 가톨릭 교리의 경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성경만으로’라는 사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교황의 권위를 인정했고, 연옥의 존재도 인정했다. ‘믿음만으로 의롭다고 (신에 의해) 간주된다’는 사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선행이 필요하다고 했다. 심지어 ‘면죄부’(이하 사면부) 자체에 반대하기보다는 그것의 오·남용에 반대했다. 1518년 말까지도 루터는 이런 입장이었다.

셋째, 교회개혁은 이미 12세기 중엽 프랑스의 발도 파에서 시작됐다. 그리고 17세기 중엽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 교회개혁의 대미를 장식했다. 따라서 교회개혁은 약 500년에 걸친 장기적인 역사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루터가 활약하기 한 세기 반 전 영국에서 활동한 존 위클리프와 한 세기 전 체코에서 활동한 얀 후스 등이 교회개혁의 선구자 격인 인물들이었다. 위클리프는 죽은 뒤 이단으로 몰려,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어) 시신이 화형을 당했다. 그리고 후스는 산 채로 화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위클리프는 롤라드 파를 지지자들로 남겼고, 후스도 두 종파(온건파인 우트라크 파와 강경파인 타보르 파)를 지지자들로 남겼다. 이 모든 종파들이 아나뱁티스트들을 포함한 다른 많은 종파들과 함께 교회개혁 투쟁의 일부였다. 루터는 역사학상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일 뿐이다. 아마 그가 일으킨 교회개혁이 한 세기 남짓 동안 유럽 여러 곳에서 연쇄반응을 일으키며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개혁은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나타났다. 국가에 대한 태도가 기준이다. ⑴ 루터와 칼뱅 등에 의한 국가 연계 또는 국가 주도 교회개혁. ⑵ 아나뱁티스트들이 주도한 국가 반대 또는 국가 회피 교회개혁(현대의 아나키즘과 닮은 구석이 꽤 있다). ⑶ 가톨릭 교회의 자체 개혁으로, 예수회가 주도한 대항 교회개혁(흔히 “반反종교개혁”으로 잘못 번역된다).

지면 제약상 이 글에서는 500주년을 계기로 현재 회자되고 있는 루터의 교회개혁에 집중하기로 하자.

루터 사상이 대중적 호소력이 있었던 이유

악마 교황(왼쪽)과 악마 루터(오른쪽) 교황과 루터는 각각 상대방을 이처럼 악마로 묘사하며 자신이 악마를 물리치는 신의 진정한 대리자임을 주장했다

루터와 교회개혁가들의 시대는 봉건제의 태내에서 시장이 잉태되고 있던 ‘시장봉건제’가 발달하던 시대였다.

비록 더디기는 했어도 봉건제 전 시기를 아우른다면 생산력이 증대했다. 그 결과 상업용 작물의 수요가 증대했고, 도시 수공업과 매뉴팩처, 원거리 무역, 상업과 금융업 등이 성장했다. 상업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선대 제도를 이용해 관습 가격보다 저가로 팔기 시작했다. 선대 제도는 상인이 가내 수공업자에게 미리 원료와 도구를 대 주고 물건을 만들게 한 뒤에 품삯을 치르고 그 물건을 도맡아 파는 제도였다.

시장과 화폐 경제가 급속히 발달하고, 시장 관계들이 삶의 많은 측면들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이에 가톨릭 교회는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사면부를 상업주의적으로 판매하고, 십일조를 내라고 교인들을 압박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봉건적 힘들과 시장의 힘들은 서로 충돌했다. 전자는 황제와 국왕, 군주, 제후 등의 국가 지도층과 추기경·대주교·주교 등의 교회 지도층이 발휘하고 있었고, 후자는 상업용 작물을 재배하는 소지주·부농, 소상인, 장인, 신흥 사업가, 극소수인 노동자층(가족노동 종사자, 선원, 항운 노동자 등) 등이 발휘하고 있었다.

또, 가끔 도시 빈민이 궁핍화와 기근에 항의해, 그리고 농민이 지대 인상이나 과도한 조세 부담에 항의해 반란을 일으켰다.(안타깝게도 대부분 통찰력과 판단력이 있는 지도부를 세우지 못해 번번이 분쇄당했다.)

구체제는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재래 사상으로는 새로운 사회 현실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마치 요즈음, 친자본주의 경제학설들이 자본주의 경제 위기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근면과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지리상의 발견, 발명, 사업 창업, 인쇄술 발달, 기능 향상 등을 상당히 이룰 수 있었는데, 정태적인 중세 스콜라 신학보다는 르네상스(14세기부터 17세기까지) 인문주의가 이 상황을 더 잘 설명하는 듯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인간 개선 능력을 긍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16세기 전반부에는 라틴어 사용이라는 한계 때문에 소수 지식인 엘리트에 국한된 운동이었다.

반면 루터는 평민들의 언어인 독일어를 사용했다(개선된 형태로). 그래서 교회 당국에 의해 억압받고 착취받던 하층과 중간 계급들과 소통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부패한 교회 지도층을 혐오한 상층 계급 일부(가령 작센의 선제후 프리드리히 같은)의 지지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어떤 메시지가 폭넓은 민중의 지지를 받았을까? 무엇보다, 도덕주의적으로 선행을 강조하면서 위선적으로 사면부 장사를 하는 교회 당국의 부패와 비리를 루터는 신랄하게 규탄했다. 루터의 교회 지도층 비판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당시 지배계급의 매우 중요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었다.

또한 루터 사상은 교회 사제들이 인간 ‘구원’(죄와 고통에서 건져 내는 일)에서 하는 구실을 극소화하고 누구든 개인이 가톨릭 교회 사제 대신에 성경을 통해 신과 직접 만날 기회를 극대화했다.

이 점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이하에서 루터의 인간 해방(그는 ‘자유’라고 불렀다) 사상을 간단히 살펴보자.

루터 사상의 골자

루터에 따르면, 최초의 인간들이 신의 말을 불신하고 신에게 불복종하는 죄를 범하는 바람에 인간은 본성이 완전히 타락했다(원죄).

하지만 신은 인간 대신에 그리스도가 인간의 죄를 속죄하도록 하고자 했다(대속).

그래서 그리스도는 십자가형이라는 극한의 고통과 수난을 감내했다(‘십자가의 신학’).

그리스도는 부활함으로써 인간의 죄악에 승리했다(‘승리자 그리스도’).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정의가 일부 선택된 인간들에게 넘겨진다(‘그리스도 의義의 전가’).

이는 신이 일부 선택된 인간들은 정의롭다고 인정해 준 것이고(‘칭의’), 선택된 인간으로서는 그저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에게 전적으로 의탁하면 된다(‘오직 믿음’). 루터는 말했다. “칭의[신한테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기]를 위해 믿음만이 필요하다. 다른 모든 것들은 더는 명령 받거나 금지되지 않는 완전히 선택적인 것이다.”

칭의와 구원은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신이 거저 베푼 은혜인 것이다(‘오직 은혜’). 인간의 믿음조차 신이 베푼 은혜이다. 인간의 자유 의지에 따른 것이 아니다. “신과 관련해 그리고 구원이나 지옥행과 관련해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없고 신의 의지 아니면 악마의 의지에 예속된다.” 또, “우리가 하는 일은 모두 필연적인 것이다. ‘자유 의지’로 하는 일은 없다. ‘자유 의지’는 무력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위의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관한 진리를 어디서 발견할 수 있는가? 루터에 따르면,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 물론 성경에 위배되지 않는 교회 전통은 배격해선 안 된다. 고대 교회 교부들, 특히 아우구스티누스의 구원론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성경에 위배되거나 성경에 덧붙여진 전통은 교회 당국자들의 인위적인 첨가물일 뿐이다.

이러한 루터 사상과 개혁에 대해 마르크스는 이렇게 논평했다.

“루터는 경건의 굴레를 확신의 굴레로 대체함으로써 경건의 굴레를 극복했다. 그가 권위에 대한 믿음을 산산조각 낸 것은 믿음의 권위를 되찾게 했기 때문이다. 그가 사제들을 평신도들로 변신시킨 것은 평신도들을 사제들로 변신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인간을 외면적 종교성으로부터 풀어 준 것은 종교성을 내면의 인간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몸의 사슬을 풀어 준 것은 마음을 사슬로 맸기 때문이다.” (《헤겔 법철학 비판》, 1844)

이러한 개인화된(내면적) 신앙과 영성에 대한 루터의 강조가 어떻게 당대의 사회 갈등과 맞물렸기에 농민전쟁까지 일어났는가? 루터는 주로 신학 문제들에 관심이 있었고 사회·정치 문제들에서는 보수적이었는데도 말이다.

독일 농민전쟁

독일 농민전쟁(1524~1525)은 동 제목의 엥겔스 저서가 있을 만큼 근대 이전 유럽에서 일어난 가장 중요한 대중 반란이었다.

독일 농민전쟁은 도시의 교회· 사회 개혁의 자극을 받아 급속히 번져 갔다. 그러나 정작 루터는 농민들의 반대편에 섰다

1524년 중엽까지 루터의 개혁은 상공업자 시민들의 선동 덕분에 도시 당국(의회와 행정기구)의 후원으로 시행됐다. 독일 도시의 3분의 2가 루터 쪽으로 넘어왔다. 도시민들은 자신들에게 알맞고 효과적인 위안을 제공하지 못하는 부패한 기성 교회 지도층에 불만이 많았다.

이제 1524년 말 농민 반란은 도시의 교회·사회 개혁의 자극을 받아 마치 들불처럼 잇달아 농촌 도읍들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이미 50년 전부터 독일 남부에서는 농민 반란이 자주 일어났었다.

이탈리아 마르크스주의자 그람시는 《옥중수고》에서 독일 교회개혁이 절정기에 광범한 대중(농민)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을 부러워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도 대중(노동자와 농민)의 혁명이 일어나 사회의 심층과 근저를 뒤흔들어 놓기를 염원했던 것이다.

실제로 독일 농민들은 교회 개혁뿐 아니라 농노제 폐지, 봉건 과세 폐지, 영주의 자의적 재판 폐지 등등 다양한 사회 개혁도 강령에 포함했다.

그러나 농민의 강령은 혁명적이지 않고 오히려 엥겔스가 지적했듯이 “단호하지 못했다.” 이 단호함 결여와 온건함 때문에 농민들은 다양한 개량주의자들에게 휘둘렸다. 그리고 이런 개량주의자들로 말미암아 농민들이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하는 동안에 영주들은 양보하는 척하면서 용병을 동원해 농민을 공격했다.

농민들은 저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루터가 말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요구했다. 루터는 잠시 경청하는 듯하다가 주저하고 동요하더니 급기야 농민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렇게 (영주들에게) 요구하면서 말이다.

“누구든 반란군보다 더 유독하고 유해하고 악마 같은 것은 없음을 기억하면서 은밀하게든 노골적으로든 할 수 있는 한 그들을 세게 때리고 죽이고 칼로 찔러야 한다. 마치 미친 개를 그래야 하듯이 말이다. 당신이 그러지 않으면 그들이 당신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토지 전체도 덮칠 것이다.”

“농민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다. 마치 큰불을 끄는 것을 돕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미봉책으로는 안 된다. 그들을 바숴 버려라! 그들의 목을 찔러라! 오만 가지 수단을 다 써서라도 말이다.”

“끊임없이 채찍질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는 노새처럼 민중도 공권력으로 채찍질하고, 목 졸라 죽이고, 목 매달아 죽이고, 태워 죽이고, 목 잘라 죽이고, 고문해야 한다. 그래야 정당한 권세를 무서워할 줄 알게 된다.”

“나 마르틴 루터는 농민 반란 동안 그들을 몽땅 학살했다. 나야말로 그들을 때려죽이라고 지시한 장본인이다. 그들이 흘린 피는 모두 내 책임이다. 하지만 나는 그 피를 몽땅 내 주 하나님의 책임으로 돌렸다. 그분께서 내게 그러라고 시켰기 때문이다.”

농민들은 자신들이 처음에 철썩같이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했던 것이다. 그 친구는 저주받을 제후(영주)들의 확실한 친구가 돼 버린 것이다.

농민전쟁이 끝나자 교회개혁은 제후들의 지지를 받으며 역사학자들이 ‘제후들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변했다. 이는 애초에 루터가 전망했던 개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제후들은 1529년 슈파이어에서 개최된 제국의회에서 루터 파가 축출당한 것에 항의하며 루터를 지켜 줬다. 이제 루터와 그 지지자들은 교황의 오랜 영적 지배에서는 해방됐지만 그와 동시에 새로운 지배를 받게 됐다.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말한다. “반란이 패배한 뒤에 루터주의는 제후들에게 이중의 무기가 됐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권력을 침해하려 하는 가톨릭 황제에 대항하는 무기가 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피착취 계급들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지배를 유지하는 수단도 될 수 있었다.”(《민중의 세계사》)

이런 미온함과 소심함 때문에 루터의 교회개혁은 겨우 독일 북부와 동부, 스칸디나비아반도에 국한돼 제한된 성공만을 거둘 수 있었다.

제2의 종교개혁?

요즈음 한국 개신교 대부분의 상태를 보고 ‘제2의 종교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 점에서 ‘종교개혁 500주년’이 특별히 기념되고 있는 측면도 큰 듯하다.

한국 개신교가 대폭 개혁돼야 하는 건 당연하다. 하지만 루터는 다수 아나뱁티스트들에 비하면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주류 개혁가들인 츠빙글리와 심지어 칼뱅보다도 보수적이었다. 칼뱅조차 공화정에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루터는 여성을 주저없이 비하했다. “신의 말씀과 일은 명명백백하다. 여성은 아내가 되거나 성판매 여성이 되는 것이다.” 또, “나는 아내를 몇 명 두는 걸 금지할 수 없다고 인정한다. 성경과 모순되지 않기 때문이다.”

루터는 또한 유대인을 혐오했다. 인종적 이유에서라기보다는 신학적 이유에서였던 듯하다. 그는 유대인들이 세상 종말에는 가톨릭 교황의 지도를 받으며 투르크인들과 동맹해 그리스도인들을 절멸시킬 것이라는 피해망상도 갖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들을 죽이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고 했다. 유대인은 “악마의 자식들로 지옥에나 떨어져야 한다”고 했고, “유대인들은 개”라고도 했다. 또, 이렇게도 말했다.

“그들의 집을 산산조각 내고 파괴하라. … 그들의 기도서와 탈무드, 그들의 경전을 빼앗으라. 랍비가 교육을 하지 못하도록 하고, 불복하면 죽여라. 유대인들이 거리 왕래와 도로 통행을 하지 못하도록 하라. 그들의 고리대금업을 금지하고 돈과 금은 등을 다 몰수하라. 이런 일들로도 불충분하면 그들을 이 나라에서 내몰아라. 미친 개처럼 말이다.”

루터는 성소수자도 혐오했다. “남색자들의 비행은 비할 데 없이 엄청나다. 남색은 신이 인간 본성에 심어 준 자연스런 정념과 욕망을 벗어난 것인데, 인간 본성에 따르면 남성은 여성에게 정열적 욕망을 가진다. 남색은 인간 본성에 전적으로 어긋난다. 이 변태는 어디서 비롯했는고? 말할 것도 없이 악마다.”

비록 슬라보예 지젝 등 일부 신종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루터를 우호적으로 전용하는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 필자가 보기에 그건 별로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은 듯하다. 심지어 루터의 인간 해방 사상도 인간의 자력 해방을 부정하고 오로지 신에 의한 타력 해방만을 찬양·고무한다.

인터내셔널 가의 가사에는 이런 구절이 포함돼 있다.

“어디에도 위대하신 구원자는 없노라.

신도, 황제도, 달변가도.

노동자들아, 우리들 스스로를 구하고,

공동체의 구원을 선언하라.”

노동계급은 신의 선택과 예정, 칭의, 은총이 없어도 자력 해방을 이룰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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