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특히 1917년 11월 7~8일(구력 10월 25~26일)에는 20세기 유일하게 노동자 국가를 수립한 10월 혁명이 벌어졌다. 본지는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연말까지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우파들이 그리는 역사에서 러시아혁명은 흔히 볼셰비키당과 그 지도자 레닌이 벌인 쿠데타로 묘사된다.

차르 체제 하에서 민주주의가 아예 없었다는 점을 우파들은 지나가는 수준으로만 언급한다. 그 대신 볼셰비키가 독재 체제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며 처음부터 그 체제는 끔찍한 스탈린주의 체제로 귀결될 운명이었다고 볼셰비키를 맹비난한다.

임시 정부는 제헌의회 선거를 약속했으나 거듭 미뤘고, 정작 선거는 소비에트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 실시됐다. 1917년 여름, 제헌의회 선거 포스터를 보는 페트로그라드 시민들.

그러나 레닌은 다음을 분명히 했다. “봉기가 성공하려면 음모에 기대거나 한 정당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선진 계급에 기대야 한다. 이것이 첫째로 중요한 점이다. 봉기는 대중의 혁명적 분출에 의존해야 한다.”

레닌이 봉기 돌입을 설득하며 들었던 근거는 “압도 다수의 민중이 우리 편”이라는 것이었다.

10월 혁명을 수행한 것은 한 줌의 음모가들이 아니라 러시아의 수도인 페트로그라드 전역에서 떨쳐 일어선 노동자와 병사들이었다.

혁명적 대중에게는 이미 그 자신의 민주적 조직이 있었다. 노동자와 병사 대표들의 평의회인 소비에트가 바로 그것이다.

1917년 여름이 지나고 많은 소비에트들이 선거를 새로 실시해 볼셰비키가 대표의 다수가 됐다. 노동자들은 임시정부 타도를 분명히 했던 정당에 투표했다.

10월 혁명 이후 제헌의회를 새롭게 구성하기 위한 선거가 전국적으로 치러졌다. 볼셰비키가 이끈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 1월에 제헌의회를 해산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제헌의회 해산을 들며 볼셰비키를 비난한다. 

10월 이전에 ‘제헌의회 소집’은 당시 권력보다 더 민주적 대안을 만들어 혁명을 전진시키려는 요구였다.  

그러나 10월 혁명 이후에는 바로 그 권력이 사라진 만큼 상황이 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제헌의회는 소비에트 통치를 거스르는, 소비에트의 대체물 구실을 할 우려가 있었다. 민주주의를 완전히 없애 버리기를 원했던 자들이 제헌의회를 지지하며 결집할 가능성이 있었다.    

혁명의 중심지였던 곳들, 즉 도시와 해군, 군대 일부에서는 [제헌의회 선거에서] 볼셰비키가 압도적으로 많은 표를 얻었다.

그러나 러시아 인구 다수는 농촌 지역에 분포했고, 이 지역들에서 계급 투쟁의 수준은 훨씬 낮았다.

농민에 기반한 사회혁명당이 전체 의석에서 380석을 얻었다. 볼셰비키는 168석을 얻었다. 그러나 이러한 결과는 급속히 변하고 있던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미 사회혁명당은 둘로 쪼개진 상태였다.

사회혁명당의 한쪽은 혁명을 지지하고 볼셰비키와 함께 새 연립정부에 참여했다. 이 사회혁명당 좌파가 우파보다 농민들 사이에서 인기가 훨씬 더 많았다.

그러나 사회혁명당 후보들 중에는 우파가 압도적이었다. 더욱이 이들은 제헌의회 내 다수파라는 점을 이용해서 소비에트 통치를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역사란 가차 없는 것이어서, 1918년이 되자 제국주의 국가들이 혁명을 포위했다. 제헌의회 다수파는 이 불구대천인 혁명의 적들과 타협을 시도했다.  

제헌의회는 혁명의 엔진에 제동을 거는 구실을 했으며 혁명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냈다. 심지어 그들 중 일부는 독일과 다시 전쟁을 시작하고자 했다.  

볼셰비키만 이러한 위험성을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사회혁명당 좌파였던 마르크 나탄손도 볼셰비키인 레온 트로츠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만약 선택을 해야 한다면, 제헌의회를 무력으로 해산하겠습니다.”

1919년 12월에 레닌은 당시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 시대의 역사적 조건에서는 농촌이 도시와 똑같을 수가 없다. 도시는 불가피하게 농촌을 지도하고, 농촌은 도시를 따를 수밖에 없다.”

“진정한 문제는 ‘도시’ 계급들 중 어떤 계급이 농촌을 이끌고 이런 임수를 수행할 것인지, 그리고 도시가 어떤 형태로 지도할 것이냐다. “

레닌이 지적한 것처럼, 제헌의회를 방어한 이들은 “계급 투쟁의 근본적 문제가 투표 행위로 해결될 수 있다는 선입견”에 갇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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