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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가 추진하는 ‘공정임금’은 정말 공정한가?

‘공정임금’ 운운하며 최저임금 인상 무력화에 나선 문재인 정부 ⓒ출처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노동자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가로 임금을 받는다. 이것은 “자유롭고 공정한 교환”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신이 생산한 가치만큼 임금을 받지 못한다.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는 임금보다 훨씬 크다. 사용자는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의 일부만 임금으로 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가져간다. 바로 이것이 착취다. 그리고 바로 착취가 자본가들이 얻는 이윤의 원천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공정한 노동에 대한 공정한 임금’ 같은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정한 것처럼 보이는 교환의 이면에 감춰진 착취를 밝혀 냈다.

이 같은 방식으로 극소수가 다수인 노동자들을 일 시켜서 엄청난 이윤을 벌어들인다. 극소수의 수중에 부가 집중되고 빈부 격차가 증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흔히 사용자들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조직해서 ‘공정’하다고 인정되는 것 이상의 임금을 요구하는 탐욕을 부린다며 도리어 노동자들을 비난한다. 이런 ‘이기주의’가 경기회복을 가로막고, 임금 격차를 벌린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비단 기업인과 보수 정치인과 보수 언론만은 아니다. 문재인 정부의 인사들과 심지어 진보진영의 많은 개혁주의자들도 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주장을 한다.

대기업 임원과 직원 임금 격차(2014년) [확대]

대기업 노동자 임금이 ‘너무 많다’는 거짓말

문재인 정부는 임금체계 개편을 통해 “공정성”을 높이겠다고 한다. 일부는 너무 적게 받고 일부는 너무 많이 받는 불공정을 개선하겠다는 것이다.

그들이 기업 CEO나 임원의 봉급과 노동자 임금 사이의 격차를 얘기하는 것일까? 실제로 둘 사이의 격차는 어마어마하다. 삼성전자 임원 봉급은 직원의 80배가 넘고, 현대제철은 50배, 엘지유플러스는 40배가 넘는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얘기하는 임금 불공정은 이것이 아니다. 그들은 CEO나 임원(자본가 계급이거나 상층 중간계급에 속한다)의 고액 연봉을 문제 삼지는 않는다. 오히려 ‘전문성’과 ‘책임성’이 큰 직무는 보상받을 가치가 있다고 주장한다.

문재인 정부가 정조준하는 것은 대기업의 정규직과 근속연수가 많은 노동자들의 임금이다.

정부는 더 많은 보상을 받을 객관적 근거(직무 가치)도 없이 그저 규모가 큰 기업에 근무한다는 이유로 임금을 더 많이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많은 개혁주의자들은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마치 하청·중소기업 노동자들의 저임금에 기대어 대기업 CEO·임원들과 함께 잔치를 벌여 온 것처럼 주장한다. 〈한겨레〉〈경향〉은 이런 주장을 열심히 전파한다.

그러나 최근 한 통계는 실제로는 대기업 노동자들의 보상 수준이 매우 열악하다는 것을 보여 줬다. OECD가 발행한 〈한눈에 보는 기업가정신 2017〉을 보면, 한국 대기업(제조업)은 부가가치의 단지 28퍼센트만을 노동자들에게 임금으로 주고 있다.(다음 〈그림 1〉을 보시오.)

〈그림 1〉 한국의 대기업 노동자 보상은 OECD 꼴찌 수준 대기업 노동자들이 ‘충분한’ 보상을 받고 있다는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한국 대기업 노동자 임금은 부가가치의 단 28퍼센트다. 중소기업들도 OECD 꼴찌 수준(50퍼센트)이긴 마찬가지다. [확대]

프랑스가 76퍼센트, 독일이 73퍼센트인 것에 비하면 이것은 매우 낮은 수치다. 한국은 32개국 중 30위다.

보상 수준이 OECD 꼴찌 수준(29위)이기는 한국 중소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일부 노동자들이 임금을 너무 적게 받고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그것이 다른 일부 노동자들(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이 너무 많이 받기 때문은 아니다.

저임금층이 늘고 빈곤이 증대한 이면에서 부를 늘려 온 것은 기업주, 기업 임원, 은행가, 고위 정치인들이다. 재산은 차치하고 임금소득만 보더라도 2000년대 초반 이후에는 오로지 상위 1퍼센트만이 소득 상승 가도를 달렸다.

이런 불평등을 개선하려면 저임금층의 임금을 대폭 올리고 그 재원을 기업과 부자들이 대도록 해야 한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이 ‘불공정’하다고 문제 삼고 그들의 임금을 낮춰서 확립하려는 임금 ‘공정성’은 말만 번지르르 할 뿐 실제로는 진정한 불평등을 감추고 바닥을 향한 경쟁을 부추길 뿐이다.

직무급은 또 다른 방식의 임금 차등화를 합리화할 뿐

문재인은 11월 18일 일자리위원회 모두발언에서 임금체계를 직무 중심으로 개편하겠다고 말했다. “직무와 능력에 따라” 보상받고, “노력·성과·보상 간 연계성을 강화”하는 것이 “공정임금”이라는 것이다.

직무급을 대안 임금체계로 제시한 것이 문재인 정부가 처음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가 내놓았던 ‘합리적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에도 직무급이 포함됐었다.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문재인 정부가 직무급제에 진보 색칠을 더 잘 하고 그것을 홍보해 줄 진보계 인사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문재인 정부는 같은 일(직무)을 하는데도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중소기업에 다닌다는 이유로, 근속연수가 적다는 이유로 더 적은 임금을 받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며 차별받는 사람들 편인 것처럼 말한다. 직무급제가 노동운동이 오랫동안 요구한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가장 가까운 임금체계가 아니냐고도 덧붙인다.

그러나 첫째, 이전 정부든 현 정부든 직무급제를 도입하려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임금 억제다. 현 호봉제는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자동으로 오르기 때문에 기업들의 부담이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 직무 가치나 성과에 연동되지 않은 임금 인상에 제동을 걸려 한다.

직무 중심 임금체계 옹호자들은 초임 대비 30년 근속자의 임금이 유럽은 1.69배인 데 반해 한국은 3.78배나 된다며, 동일 직무 내 임금 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새 임금체계 아래서는 같은 직무에 20~30년 종사해도 임금이 거의 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뜻이다. 특히, 낮은 직무 등급에 속한 노동자라면 저임금에 고착될 수 있다. 또, 동일 직급 내 임금 격차는 줄어들지라도 직급 간 임금 격차는 더 커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연공 성격이 강한 한국의 경우 하위 직급 노동자의 근속연수가 올라가면 상위 직급 평균임금 수준에 다다를 수 있는 반면, 직무급 전통이 강한 영국의 경우는 하위 직급 노동자의 임금 분포가 끝나는 지점에서 바로 위 직급 노동자의 임금 분포가 시작된다.(다음 〈그림 2〉를 보시오.)

〈그림 2〉 직급별 임금 격차가 적은 한국의 연공임금 (영국 직무급과 비교) 연공 성격이 강한 한국의 경우 하위 직급 노동자의 근무연수가 올라가면 상위 직급 평균에 다다를 수 있다. 직무급의 경우(영국) 직급 간 임금 격차가 훨씬 크다. [확대]

능력주의라는 신화

둘째, “직무와 능력”에 따라 “노력·성과”와 연계해 임금을 정하는 것은 공정하기는커녕 또 다른 방식의 임금 차등화를 합리화하는 것일 뿐이다.

직무 중심 임금체계 옹호자들은 근속연수, 고용형태, 기업 규모에 따른 임금 격차는 불공정하다면서, 직무 가치를 분석해 직무 등급에 따라 ‘공정’하게 임금 차등을 두자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떤 직무의 가치가 높게 매겨질지는 뻔하다. CEO와 임원들이 부와 일자리를 창출해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는 ‘상식’에 따라 그들의 직무 가치가 최고로 인정될 것이다. 관리자와 고급 전문가들은 더 많은 “책임”을 지고 “전문성”이 있다고 해서 높은 직무 가치를 인정받을 것이다. 그들의 수억, 수십억 대 연봉과 스톡옵션은 정당한 것이 된다.

반면, 육체직과 단순 사무, 판매 등 많은 노동자들의 직무는 낮게 평가되기 십상일 것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의 계획대로 직무를 “세분화”하고 “성과·보상 간 연계성을 강화”하면 직장은 더 위계적이 되고 노동자 간 경쟁이 강화될 것이다.

문재인 식 ‘공정임금’은 모든 개인들이 능력과 노력에 따라 노동시장의 지위가 결정된다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누군가 불공정 거래로 시장을 훼손하지만 않는다면(가령 대기업 지불능력에 기댄 대기업 노동자의 고임금), 이런 시스템에 따른 보상은 공정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능력주의는 신화일 뿐이다. 사람들의 성과는 그들이 책임질 수 없는 요인들, 가령 부모의 재산과 소득, 유전적 재능, 시장의 변동, 제도 변화 등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가령 몇 년 전과 변함없는 능력을 가진 은행 노동자는 금융 위기로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될 수 있다. 어떤 시기의 취업준비생들은 수년 전 학생들과 다를 바 없는 실력을 가졌는데도 시장의 변동과 정부와 기업의 정책 때문에 비정규직이 되는 비율이 더 높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일단 직무 등급이 매겨지면 저임금과 그로 인한 빈곤은 그 개인의 탓이 된다. 직무와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다는 ‘공정임금’ 논리는 부의 대물림에 좌절하거나 절망한 청년들에게 한 줄기 빛처럼 보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냉혹함과 무자비함이 작용하고 있다.

동일 임금은 어떻게 성취할 수 있는가?

직무급이 된다고 해서 정말로 “직무와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도 아니다. 직무급이 정착된 유럽 나라들과 미국을 보면, 남녀 간, 인종 간 임금 차등이 유지되고 있다. 이것은 능력과 아무 관계없는 순전한 차별일 뿐이다.

가령 영국에서 흑인 대졸자 임금은 백인 대졸자보다 평균 24퍼센트 낮고, 런던의 남녀 임금 격차는 약 23퍼센트이다.

또, 직무급이 정착된 유럽 나라들과 미국에서 임금 격차와 소득 불평등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더 심화돼 왔다.

특히 미국의 경우, 바로 기업 고위임원·관리자와 일반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가 소득 불평등의 주요 요인이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한국을 미국의 보상 모델을 추종하는 나라로 꼽았다(《Global Wage Report 2016/17》).

임금체계를 특정한 방식으로 바꾼다고 해서 임금 평등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이윤을 위해 노동자들을 분열시키는 사용자들의 차별에 반대하는 투쟁이다. 이것이 호봉제 하에서라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설사 직무급제가 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이 명시된다 해도 실질적인 동일임금은 투쟁 없이 쟁취하기 어렵다. 기업과 정부는 동일노동에 대한 협소한 정의, 차별적인 직무등급제 마련하기, 대기업·정규직·남성 노동자들에게 희생 전가하기 등으로 빠져나가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도 남녀 동일임금에 한 걸음 다가간 것은 1968년부터 1970년대 초반 노동자 투쟁 상승 속에서였다. 당시 영국 등지에서 수많은 동일임금 파업이 벌어졌고, 남녀 노동자들이 성공적으로 연대한 경우 큰 성과를 거뒀다.

그러나 동일임금법 효력이 발효된 1975년 이후로는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동일임금 판단을 (투쟁 대신) 노사분규재판소에 맡기면서 노동자들은 성과를 보지 못했다.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이라는 진정한 강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OECD 최고 수준인 한국의 남녀 임금 격차를 줄이려면 남성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을 것이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려야 한다. ⓒ이미진

임금 삭감 없는 동일임금

문재인 정부의 인사들은 중소기업·비정규직·여성 노동자들이 적정임금을 받으려면 특히 대기업·정규직·남성 노동자들의 ‘협조’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공정성을 들먹이며 대기업·정규직노동자들의 임금을 공격하는 것이 마치 진보의 가치인 듯한 인상마저 풍긴다.

그러나 동일임금의 목표는 중소기업·비정규직·여성 노동자의 임금을 대기업·정규직·남성 노동자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지, ‘동일’함 그 자체가 아니다. 사용자들이 차별을 통해 노동자들을 이간질하는 이유를 생각해 봐도 이 점은 명백하다.

따라서 노동운동은 동일임금을 지지하면서도, 동시에 상대적 저임금 노동자들의 임금을 올리기 위해 상대적 고임금 노동자들을 희생시키는 방식을 일관되게 반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정부와 기업들은 동일임금을 위한 재원을 늘리지 않은 채 노동자 전체의 임금 수준을 하향평준화하려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97년 영국 공공기관에서 ‘단일 직위(single status)’ 협약을 맺은 이후 벌어진 일이다.

정규직 노동자인 남편의 임금을 낮춰 비정규직 노동자인 아내의 임금이 조금 오르는 것은 조삼모사일 뿐, 노동계급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 원청 노동자인 아버지의 임금을 삭감해 하청 노동자인 아들의 임금을 조금 인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임금 삭감 없는 동일임금이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