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시대에는 노동조합운동이 달라져야 한다”는 주문이 많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와 달리 문재인 정부가 “노동 존중”을 약속한 만큼 이제 노동조합도 새로운 환경에 맞는 전략을 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개혁주의자들의 주문인데, 한마디로 말하면 문재인 정부의 “파트너(동반자)”가 되라는 것이다. 노동조합이 더는 “반대 투쟁에만 급급”해선 안 되고, 정부와 협력해 “개혁을 주도”해야 한다고 한다.

가령 이병훈 교수는 노동조합이 “노동정책 구체화 과정을 돕”는 “정부의 주요 파트너가 될 것을 제안”한다. 우파로부터 “정부를 엄호”하고 노동 쪽으로 “견인”하라는 것이다.

민주노총이 주최한 ‘1987년 노동자 대투쟁 30주년 기념 토론회’에서도 유사한 제안이 나왔다. 김공회 교수는 노동조합이 “국가기구 안의 공적 의사 결정 과정”에 안정적으로 참여하는 “노동운동의 제도화”를 더 깊게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정책 개입력 강화”를 추진한 것이 한두 해 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문재인 정부 하에서야말로 노조가 진짜 ‘국정 파트너’로 대접받을 수 있게 됐다고 개혁주의자들은 기대한다.

노동조합 지도자 상당수와 개혁주의자들은 이를 통해 빈곤과 양극화 등 신자유주의가 낳은 폐해를 완화하고 노동조합의 사회적 위상도 대폭 강화할 수 있다고 여긴다.

7월 28일 재벌 총수들을 청와대로 초대한 문재인. 이 역겨운 파티에 노동조합이 들러리가 되선 안 된다 ⓒ출처 청와대

‘사회적 대화’는 노동자 양보를 얻어 내기 위한 것

그러나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노동계와 정부 사이에 국정 파트너로서의 관계를 복원하는 것이 중요하고 시급하다”고 강조하는 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일자리 창출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명분으로 노동조합의 양보를 얻어 내는 것이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재인은 “조금씩 양보하고 짐을 나누는” 사회적 대타협을 강조한다. 한국이 “도약할 미래”가 이것에 달려 있다면서 말이다.

처음으로 노동조합을 “동반자(파트너)”라고 부른 김대중도 IMF 경제 위기 극복이 사회적 대타협에 달렸다며 노동계의 양보(특히 정리해고와 파견 법제화)를 요구했었다.

당시 사회적 대타협 옹호자들은 ‘사회협약’을 통해 재벌개혁, 노동기본권 보장, 복지 확충을 얻을 수 있었다며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양보를 정당화했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시간의 검증을 견디지 못했다. 그 뒤 재벌들은 더 부유해졌고, 비정규직과 빈곤층이 늘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높아진 것도 아니다.

‘사회협약’ 변호자들은 당시는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는 시절이었으므로 김대중 정부도 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고 변명한다. 김대중 정부가 ‘사회협약’을 지키지 못한 것은 기반이 약해 우파의 공격에 취약했기 때문이라고도 덧붙인다.

그러나 그런 결과는 ‘사회적 대타협’의 예외적 사례가 아니다. 세계 여러 나라들에서 이뤄진 사회적 대타협은 거의 다 그런 결과를 낳았다. 그것은 자국 자본주의를 효율화하기 위해 노·사·정이 협력해야 한다는 사회적 파트너십 정신의 자연스런 귀결이다. 특히 경제 상황이 나쁠 때 노동자들에게 더한층의 양보가 강요되기 마련이다.

문재인 정부가 네덜란드의 사회적 대타협을 모델로 제시하는 것을 보면, 저성장이 “노멀”(정상적)이 된 시대의 문재인 호가 노동자들에게 어떤 양보를 요구할지가 잘 드러난다. ‘네덜란드 모델’의 핵심은 일자리 확충을 명분으로 정규직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을 삭감하는 것이었다.

네덜란드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1982년 여성과 청년의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라며 임금 양보를 수용하고 바세나르 협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협약의 결과는 시간제 일자리 폭증과 저임금 노동자 증가, 그리고 여성 빈곤 확대였다.

양보는 노동자들의 처지를 악화시키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출처 <금속노동자>

노동조합이 양보하면 사회적 위상이 높아질까?

상당수 노동조합 지도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양보 요구에 화답할 태세인 듯하다. 그들은 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을 양보해 일자리 문제 해결을 위한 재원을 보태겠다고 한다.

공공노조 지도부는 1600억 원 성과연봉제 인센티브를 반납했고, 금속노조 지도부도 일자리연대기금 2500억 원 출연을 제안했다. 보건의료노조 지도부는 인력확충과 정규직화를 위해 임금을 억제하겠다고 했다.

온건파들은 이런 선도적인 양보 전략으로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면 ‘대기업 노조 이기주의’라는 낙인찍기와 ‘고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 노동자들 사이의 격차를 줄여 계급 동질감을 회복하고, 노동조합이 (낮은 조직률을 넘어) 사회적 위상을 높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회적 합의를 추구해 온 서구의 많은 나라 노동조합들이 지난 30여 년 동안 조직 규모가 점점 축소되고 위상이 전만 못해진 것만 봐도 이런 장밋빛 전망은 미덥지 못하다.

사실, 사회적 합의는 (시장 지향적) 경제 개혁을 위해 노·사·정이 협력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에, 단지 노동자 일부(대기업 정규직)뿐 아니라 노동자 전체에 희생을 요구한다.

가령 문성현 노사정위 위원장은 “[중소기업] 노조가 중소기업 지불 능력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중소기업 노사가 하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문재인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꺼번에 다 받아내려 하지 말[라.]”

정부가 사회적 파트너십(동반자 관계, 즉 대타협)을 추구하는 목적은, 단지 정규직 노동자들의 양보로 일자리 마련과 비정규직 문제 해결의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파트너십의 진정한 목적은 한국 자본주의의 (효율화) 개혁을 위해 노동조합 지도자들의 협조를 얻고, 협조적인 노동조합 지도부를 통해 노동운동을 무장 해제시키는 것이다.

노조의 양보는 노동자 원자화를 부추길 뿐

사회적 파트너십은 조합원들이 상층 논의를 쳐다보며 수동화되도록 만들고, 노사·노정 간 계급 협조주의를 부추겨 노동자 투쟁을 억제한다. 가장 잘 조직된 부문이 양보를 강요받으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면, 나머지 노동자들이 그렇게 하기는 더 어렵다. ILO(국제노동기구)가 지적했듯이, 정규직의 ‘과보호’가 공격받은 곳에서는 한결같이 비정규직의 처지도 더 어려워졌다.

사회적 합의의 결과가 노동자 전체의 처지를 악화시키는 것인 한, 합의에 참가한 노동조합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기성체제의 가치관이라는 면에서 덕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오히려 평범한 노동자들은 사용자나 기성 정치인들과 자연스럽게 마주 앉게 된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의심의 눈으로 쳐다볼 것이다.

노동조합의 위상이 진정으로 강화되는 때는 노동자들이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을 통해 강력한 힘을 보여 주는 때다. 그런 때 미조직을 포함해 더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으로 뭉쳐 노동조건을 개선하길 기대하게 된다.

노동조합이 이런 희망을 보여 주지 못하면 노동자들은 개인적 자구책에 기대게 된다. 우리는 모두 시장에서 경쟁하는 원자화된 개인들이라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제한된 파이를 놓고 동료와의 경쟁에 나서게 된다.

선도적 양보와 사회적 대화가 계급 동질감을 회복하고 연대를 강화하는 길이 결코 될 수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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