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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죄 폐지 알맹이 빠진 청와대 답변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낙태죄 폐지와 자연유산 유도약(미프진) 합법화 및 도입’을 요구하는 청원에 공식 답변을 내놓았다.

청와대는 낙태죄 폐지 여론을 의식해 낙태죄가 여성에게만 책임을 전가한다는 점, 처벌 강화 위주 정책의 부작용, 현실과 법의 괴리 등을 언급했다. 또한 OECD 국가 중 낙태를 부분 합법화한 사례와 2007년 노무현 정부가 검토한 안(처벌 예외 조항에 사회경제적 사유 추가 안)을 소개했다.

‘이명박근혜’ 정부는 낙태 단속·처벌을 강화하려 했고 ‘가임기 여성의 출산 지도’나 만들었다. 그에 비해, 문재인의 청와대가 청원에 “친절한 답변”을 내놓고 ‘낙태 비범죄화’를 주장한 바 있는 조국이 발표자로 나선 것은 많은 여성들에게 기대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주류 여성단체들은 정부의 답변을 긍정적 신호로 여기는 듯하다.

낙태죄 폐지와 낙태 권리 성취를 위해서는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 ⓒ조승진

그러나 청와대 발표는 “전향적 태도”라기에는 알맹이가 너무 없다. 청와대는 정작 낙태죄 폐지에 관해서는 확언한 게 없다. 낙태약(미프진) 도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청와대가 하겠다는 것은 실태조사뿐이다. 이를 통해 ‘사회적 논의’를 시작하자며 말이다. 하지만 이는 매우 모호할 뿐 아니라, 정부 자신의 책임을 흐리는 것이다.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사회적· 법적 논의를 통해 판단하겠다는 유보적 태도는 아쉽다”고 옳게 논평했다.

실태조사야 나쁠 건 없지만, 실태를 몰라서 낙태죄 폐지 여부를 결정 못하는 건 아니다.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 여성들(특히 노동계급 여성들)이 어떤 고통을 받아 왔는지, 현실과 법의 괴리가 얼마나 큰지는 이미 세계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충분히 알려져 있다. 이미 23만 명이 낙태죄 폐지 청원에 동참한 것 자체가 “실태”를 보여 준다.

실태조사가 꼭 낙태죄 폐지에만 힘을 실어 준다는 법도 없다. 낙태 반대 운동을 벌이고 있는 천주교도 “현실을 정확히 파악해야” 낙태를 근절할 수 있다며 정부의 실태 조사 결정에 찬성했다. 이들은 실태조사 결과를 얼마든지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해, 오히려 낙태하는 여성이 비도덕적이라고 공격하는 데 사용할 것이다.

아슬아슬한 줄타기

조국은 “태아 vs 여성”의 대립 구도를 넘어야 한다고 했다. “태아의 생명권과 여성의 자기결정권 둘 중 하나만 택해야 하는 제로섬으로는 논의를 진전시키기 어렵[다.]”

하지만 “태아의 생명권은 소중한 권리”(조국)라고 인정하면 여성의 결정권을 온전하게 옹호하기 어렵다. 태아는 독립적 인격체가 아니라 임신한 여성 신체의 일부일 뿐이므로, 여성의 권리를 지지한다면 태아의 생명권 논리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자세한 얘기는 본지 이번 호 기사 ‘그리스도교 우파의 태아 ‘생명권’ 논리를 반박한다 : 낙태는 "살인" 아니라 여성의 자기 결정권’ 참조). 또한 낙태는 태아를 인위적으로 제거하는 행위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태아의 생존이냐 여성의 낙태 결정권이냐의 대립은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서 여성의 낙태결정권을 분명히 지지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폐지 운동과 낙태 반대 세력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는 것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일 뿐이다. 이런 어중간한 태도는 문재인 정부가 얼마든지 우파의 압력에 타협할 수 있음을 뜻한다. 반낙태 그리스도교 우파들은 알맹이 없는 ‘사회적 논의’조차 반발하며 대대적인 낙태죄 폐지 반대 운동을 예고하고 있다.

이미 청와대는 천주교의 강한 반발을 달래려 조국 수석을 보내 낙태 반대 입장을 “겸허히 청취”하게 했다. 그 전에 문재인은 참모진에게 “청와대가 낙태죄 폐지를 예단하지 않는다는 점을 오해없도록 잘 설명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독립적인 낙태 권리 운동을 건설하자

조국이 답변에서 OECD 상당수 국가에서의 부분 합법화 모델을 자세히 소개한 것을 보며 청와대가 낙태 합법화를 전향적으로 검토하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도 생기고 있다. 문재인 정부 일각에서는 독일식 방안을 검토하고 있는 듯하다. 독일식 방안을 “태아 vs 여성”의 대립, “전면금지 vs 전면허용”의 대립을 넘어설 묘수로 여기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이 방안의 문제점은 본지 229호, ‘낙태죄 없애고 낙태 권리 보장하라’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사유나 기간 제한이 있는 부분 합법화는 현행법보다는 낫다. 하지만 낙태죄 폐지가 자동으로 이뤄지지는 않고, 여성의 온전한 결정권을 보장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요청만으로 합법적으로 낙태를 할 수 있도록 낙태 결정권을 조건 없이 보장해야 한다. 또한 낙태 시술에 의료보험을 적용해 무상으로 낙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낙태가 합법화돼도 비용이 지원되지 않거나 시술 병원(과 의사)을 찾기 힘들면 낙태 권리는 사실상 무의미해지기 때문이다.

한편, 조국이 부분 합법화 방안을 언급했다고 해서 청와대가 이를 추진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청와대는 내년으로 예정된 헌법재판소 낙태 위헌 심판이 “새로운 공론의 장”이 될 것이라며 헌재에 떠넘기거나 공론화위원회 카드도 사용하려 한다. 여당인 더민주당은 “공론화위원회를 구성해 낙태죄 폐지 여부를 묻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도 했다.

이런 얘기는 정부의 부담은 피하고 헌재와 ‘공론화위원회’ 등에 공을 떠넘기며 시간을 벌겠다는 심산으로 보인다. 정부는 헌재에, 헌재는 또다시 ‘공론화위원회’에 서로 눈치보고 떠넘기며 무한정 연기될 공산도 있다.

신고리 핵발전소 문제에서 우리는 이미 ‘공론화위원회’가 “소통”이라는 그럴 듯한 모양새를 앞세워 정부의 책임을 떠넘기고 개혁 약속을 뒤집는 꼼수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그 일에 진보적 시민단체들이 들러리 서는 뼈아픈 경험도 했다. 낙태죄 폐지 운동은 이런 전철을 밟아선 안 된다.

낙태 문제는 지배자들에게 매우 민감한 쟁점이다. 자본주의 체제가 굴러가는 데서 매우 중요한 노동력 재생산 문제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가족제도에서 경제적·이데올로기적 이득을 보는 것은 단지 우파들만은 아니다.

특히 저출산 위기에 직면한 문재인 정부가 보수 세력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낙태죄 폐지를 단행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이진성 헌재 신임 소장과 일부 헌법재판관들이 ‘제한적 낙태 허용’에 우호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이들은 지배자들 전체의 이해관계를 고려하는 보수적인 국가기구 헌재의 재판관들이다. 아래로부터 압력이 막대하게 크지 않다면 헌재가 낙태죄를 폐지할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렵다.

세계 낙태권 운동의 경험으로 보건대 낙태죄 폐지와 여성의 낙태 결정권을 쟁취하기 위한 손쉬운 지름길은 없다. 무엇보다 정부로부터 독립적인 대중 운동을 건설해야 한다. 그리고 진정한 대중 운동이 되려면 특히 노동계급 여성과 남성의 동참을 이끌어 내려 애써야 한다.

2017 검은시위

그러니까 낙태죄 폐지

일시 : 12월 2일(토) 오후 2시

장소 : 세종로공원 앞 인도

주최 :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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