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증법과 최신 자연과학 이론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  바가반, 책갈피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은 유물론적 변증법에 대한 훌륭한 개설서다. 이 책 뒷표지에 적혀 있듯이,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마르크스주의의 특정 이론들(계급 투쟁 이론, 잉여 가치 이론, 국가 이론 등)을 한데 통합하고 그것들의 토대를 보강해 준다. 그리고 철학은 특히 역사적 전환점과 심각한 위기의 시기에 변혁적 사상과 지도에 매우 중요한 직접적 요소이다.

이 책의 지은이 바가반은 스리랑카의 변호사라는 매우 독특한 이력을 지닌 마르크스주의자이다. 1927년에 태어난 그는 세계적인 격동의 해인 1968년에 〈청년 사회주의자〉라는 잡지를 편집하고 있었다. 이 책은 지은이가 1987년에 이 잡지에 연재한 칼럼 모음이다. 그래서 문단이 짧은데, 일부 독자들에게는 지나치게 짧아 사고의 자연스런 흐름이 방해를 받는다고 느껴질지도 모른다.

표지 안쪽의 책 소개대로, 지은이의 독특한 이력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자연과학 지식이 넓고 정확하다는 점이다. 그는 자연과학자가 보기에도 타당한 방식으로 마르크스주의의 철학을 해설하고 있다. 이것이 이 책의 최대 장점이다.

대개의 통속적인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서는 자연과학 지식이 피상적이고 심지어 부정확하다. 하지만 바가반의 지식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본 전제를 뒷받침해 주기에 충분하다.

변증법에 대한 이해는 또한 역사에 대한 인식의 뒷받침을 받아야 한다. 헤겔 철학의 범주들을 환원주의적으로(즉, 매개 없이 직접적이고 추상적으로) 자본주의 역사에 적용한다면 사회의 특정한 모순들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분석은 이뤄지기가 힘들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인식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추상적일 수 있다. 이 경우 노동자 계급은 변증법이 구현된 것으로서 나타난다. 사회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에 근거하지 않고 또 노동자 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대한 추상적 인식에 기대는 이론은 행동 지침이 되지 못한다. 이론이 행동 지침 구실을 못 하면 노동조합 지상 운동(신디컬리즘)과 같은 실천에 빠질 위험이 있다.

책 표지 안쪽의 저자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을 끝낸 직후에 저자는 현대 세계의 특정한 모순들을 보여 주는 이 책의 속편을 쓰기 위해 경험적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노쇠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동유럽과 소련의 체제 붕괴에 충격을 받아 ― 안타깝게도 저자는 이 나라들을 관료적으로 퇴보했으나 그래도 노동자 국가인 것으로 여겼다― 바가반의 일은 제대로 진척되지 못했던 듯하다. 이것은 우리가 이 책을 미완의 것으로서, 도착점이 아닌 출발점으로 삼아야 함을 뜻한다.

소외 이론이 다뤄지지 못했다는 것도 아쉬운 점이다. 과학에서든 노동자 계급 의식에서든 세계가 그 실제 구조와 다르게 보이는 이유는 소외와 관계가 있다.

자본주의 아래에서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에 앞선 사회에서 노동하던 계급들 ― 가령 봉건제 하의 농노 ― 과 달리 생산 수단에 대한 아무런 통제력도 발휘할 수 없다. 바로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소외'다. 생산 수단에서 소외된 노동자는 생산 방법과 생산물에서도 소외됨은 말할 것도 없고 자신의 노동을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에서마저 소외된다. 이러한 소외된 노동은 노동자의 정신적·정서적 능력을 망가뜨린다(마르크스가 말한 "인간 본성으로부터의 소외"). 뿐만 아니라 심지어 같은 인간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자본가로부터 소외됨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모든 사람으로부터도 소외된다. 이처럼 소외는 생산 과정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 일반으로 일반화된다. 사회적 소외의 효과는 수동성, 분열, 협소한 시야, 부르주아지의 가치관을 받아들이는 쪽으로 기울어지는 경향 따위다.

노동의 소외는 노동 생산물을 자본가가 가져감을 뜻하므로 생산자 상호 간의 분리를 또한 뜻한다. 생산물의 분배는 오직 시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가 물건들 사이의 (교환) 관계로 위장된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상품 물신성"이다. 상품 물신성의 효과는 계급 착취가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마치 시장 기능의 불가피한, 불변의 결과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의 작용은 마치 자유롭고 공정하며 정의로운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생산 과정상의 소외에서 비롯한 것으로, 교환 과정상의 상품 물신 숭배에 의해 강화되고 확장되며, 사회의 나머지 부분인 정치 제도와 이데올로기의 토대가 된다.

노동자 계급의 자주적 활동에 대한 이론적 이해에 면밀하게 열중하지 못했다는 점과 소외론이 포함되지 못했다는 점이 이 책만이 남겨 주는 아쉬움은 아니다. 대부분의 기존 마르크스주의 철학 입문서도 변증법을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못했기는 마찬가지다. 그래도 이 책은 앞에서 지적했듯이 자연 세계에 대해서는 정확하고 넓은, 그리고 단연 탁월한 이론적 이해를 보이고 있다. 스리랑카보다 부실한 우리 나라의 교양, 특히 인문·사회과학도를 위한 자연과학 분야 대학 교육이 오히려 마음에 걸린다.

최일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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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적 결정론에 대한 통쾌한 고발장  《DNA 독트린》  리처드 르원틴 , 궁리 출판사

이 세상은 부자와 가난뱅이, 자신의 노동과 시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사람과 감시당하면서 할당된 일만을 해야 하는 사람으로 나뉘어 있다. 갈등이 빚어지면 지배자들은 사람들에게 이 사회가 최선의 사회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지배자들에게 순종할 것을 강요해 왔다. 근대 이전까지 유럽에서는 기독교가 이 역할을 담당해 왔다면 이제는 일부 '과학'이 불평등한 사회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DNA 독트린》은 계급 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 구실을 하고 있는 일부 '과학'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DNA가 인간의 본성을 결정한다는 사회생물학이 어떻게 이 사회의 불평등을 정당화하는지를 폭로하고 있다.

모든 것이 우리  유전자 속에 있다?

불평등한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고안된 생각 중 하나는 이 사회가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회'의 평등이 보장돼 있어서 누구나 같은 출발점에서 경쟁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사회생물학의 첫번째 기능이 드러난다. '기회'는 균등하므로 사람들이 잘 살고 못 살게 되는 결과는 사회의 불평등 구조가 아니라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결함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천성적인 능력 차이는 유전자의 차이에서 기인하며, 유전적 차이는 그 자손에게 유전되기 때문에 위계적 사회를 형성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각에는 몇 가지 모순이 있다.

첫째, 능력을 포함한 개개인의 특성은 유전자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유전자와 (특히 사회적) 환경 사이에서 일어나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다. 지능이 높은 고대의 수학자보다는 지능이 낮더라도 아라비아 숫자와 계산기를 쓸 수 있는 지금의 초등학생이 수학 계산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다. 유전적으로 새는 날 수 있고 인간은 날 수 없지만 과학 기술로 인해 인간은 우주까지 날아갈 수 있다. 유전적 차이에 의한 능력 차이는 얼마든지 극복될 수 있다.

둘째, 사회 계급 사이에 유전적 차이가 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인종이나 민족들 사이에서 행동, 기질, 지능 등의 특성과 연관된 유전적 차이를 강조하는 주장은 인종주의나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계급 사회를 정당화하기 위한 또 다른 논리는 인간 본성론이다. 인간 본성론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사회생물학 이론이다.

사회생물학자들은 일단 인간 본성이 어떠한가에 대해 말한다. 주로 인간은 쉽게 동화되고 혈통에 예민하며 이방인에 대한 적개심을 가진다는 등의 이야기를 한다. 남성 지배와 우월주의도 인간 본성의 일부라고 한다. 그런 '보편적인' 인간의 특성이 실제로는 우리 모두의 DNA 속에 부호화돼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왜 우리가 다른 유전자(여성을 존중하고 평화를 선호하게 하는 유전자)가 아닌 이러한 특성을 갖게 하는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는지를 자연선택설을 이용하여 설명하며 주장을 마친다.

이 주장이 맞다면 우리의 특성은 30억 년에 걸친 진화의 결과이므로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친 혁명이 우리를 변화시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서술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많은 예외와 우리 사이에서 평화를 선호하고 여성을 존중하며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왜 생기는지에 대해서 설명하지 못한다.

인간 게놈 프로젝트

오늘날 유전자가 사람의 건강이나 사회 문제들의 원인으로 거론되고 있다. 대다수 질병의 주요 원인은 유전자의 결함 때문이며, 유전자의 결함을 알아 내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것이다. 건강과 질병 여부를 결정하는 데 유전자가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 바로 인간 게놈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의 아이디어는 이렇다. 일단 '정상적'이라 분류되는 사람의 유전자를 알아 낸다. 이 '표준' 유전자와 질병을 가진 사람의 유전자를 비교하여 고장난 유전자를 찾아 낸다. 그리고 고장난 유전자가 어떤 단백질을 만들어 내는지를 알아 내 질병의 치료법을 알아 낸다. 이를 통해서 정신분열증, 조울증, 마약 중독 등의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을 연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많은 허점들이 있다.

첫째, '정상적인' 사람이라 해도 그들의 유전자(약 6십만 개나 되는) 배열은 제각각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유전자를 '정상적인' 유전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특정 인종이나 성의 유전자, 특정 사회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유전자를 '정상적인' 유전자라고 하는 데서부터 편견이 스며든다.

둘째, 이 프로젝트는 암 유전자를 암의 '원인'으로 들면서 다른 중요한 원인을 숨긴다. 암 유전자는 오염 물질의 섭취로 생겨나고, 오염 물질은 산업 공정에서 만들어지며, 이러한 산업 공정은 이윤 추구의 결과다. 암 유전자를 갖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 유전자가 발현되는 것은 주로 생활 환경과 습생의 차이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인간 게놈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는 사람들은 암 유전자만이 암의 원인이라고 말함으로써 환경의 요인을 무시한다. 

셋째, 단어가 문맥에 따라 여러 뜻을 갖듯이 유전자도 여러 기능을 발휘한다. 우리는 아직까지는 유전자를 이루는 단백질이 여러 기능 중에서 어떤 기능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또한 같은 질병이라고 해도 유전적 원인이 다를 수가 있다.

그럼에도 과학자들이 막대한 돈을 들여서 효율성도 확인되지 않고 유전자라는 단순하고 단일한 원인으로 방향을 몰고 가는 이 프로젝트를 강행하는 진짜 이유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것이 프로젝트에 투여되는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돈과 그들의 경력(영광스런 학위와 노벨상 등) 그리고 유전 정보를 독점함으로써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재량권 때문이라고 폭로한다. 실제로,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사람들은 이 프로젝트와 관련돼 있는 생명공학 기업의 주요 과학자들이거나 주요 주주들이다. '현대판 엘도라도'를 찾는 이 프로젝트는 생명공학 기업뿐 아니라 그와 관련된 화학적·기계 상품을 만드는 기업들도 이해관계 속에 끌어들이고 있다.

DNA 연구에 대한 장밋빛 낙관은 대규모 광고의 결과일 뿐이며, 이를 위해 대중은 엄청난 세금을 내게 될 것이다.

생물은 환경의 영향을 받지만 생물 자체가 환경을 구성하고 창조하는 존재다. 이 책의 저자는 인간이 다른 생물과는 다르게 변화를 계획할 수 있는 독특한 특성을 갖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변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어떻게 지금의 '조화로운(?)' 모습 그대로 보존할 것인가가 아니라 '사람들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는가', '사람들은 그런 삶을 어떤 방식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을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다.

황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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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추악한 본질에 대한 폭로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  노엄 촘스키, 아침이슬

얼마 전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파동은 일본 지배자들이 군국주의를 부추기는 데 학교 교육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보여 주었다.

그러면 미국 교육은 어떨까?

많은 사람들은 미국의 교육은 민주적이고 진실을 가르친다고 믿는다. 기성 언론은 미국이 민주주의와 인권을 중시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환상을 단번에 날려 버릴 훌륭한 책이 나왔다. 미국의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미국 외교 정책의 맹렬한 비판자인 노엄 촘스키가 쓴 《실패한 교육과 거짓말》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미국 지배자들이 교육 제도와 언론을 통해 자국 민중에게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지를 생생하게 폭로한다.

교육 ― 민주주의 신화를 주입하는 것

미국 보스턴의 라틴 스쿨에 다니는 12살 소년, 데이비드 스플리츨러는 "충성의 맹세"(미국인이 국기 앞에서 하는 서약)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 어린 소년 스플리츨러는 자신을 이렇게 변호했다.

"충성의 맹세는 억압받는 자와 억압하는 자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이다. 한쪽에는 멋진 자동차를 굴리고 멋진 집에서 살며 돈에 대해서는 걱정이 없는 사람들이 있지만, 다른 한쪽에는 못된 이웃과 살면서 나쁜 학교에 다녀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 충성의 맹세는 모두가 평등하다고 말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모두를 위한 정의는 없다!"

촘스키는 학교가 교화 기관, 즉 순종을 강요하고 독립적 사고의 가능성을 저해하기 위한 기관으로 전락했다고 주장한다. 학교의 역할은 통제와 억압 시스템 내에서 운영되는 하나의 제도라는 것이다.

미국의 학교는 노예제 합법화, 여성 참정권 거부, 원주민 학살, 그리고 인종 차별 정책에 대해서 침묵한다. 지금도 미국 교육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다른 집단이나 종족에게 저질렀던 야만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다.

재작년 3월 미국 정부는 세르비아를 폭격하면서 그것이 인종 청소를 막기 위한 "인도주의적 개입"이라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은 콜롬비아 정부가 인종 청소를 저질렀을 때는 침묵했다. 더구나 콜롬비아는 미국의 가장 많은 군사 지원을 받았다.

또 미국은 1990∼1994년까지 1백만 명 이상의 쿠르드 족한테 폭격을 퍼부었고 그들을 고향에서 쫓아낸 터키 정부를 지원했다. 이 기간 동안 터키는 미국에서 무기를 가장 많이 수입한 국가이자 세계 최대의 무기 구매자로 기록됐다.

이라크의 경우는 더욱 끔찍하다. 지난 5년 동안 미국의 폭격 때문에 무려 50만 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다. 지금도 매달 4천 명의 어린이가 죽어 가고 있다. 그러나 걸프전 당시 미국 부통령 댄 퀘일은 걸프전을 "고무적인 승리"라고 정의했고, 국무부 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는 "그 정도 희생은 당연한 것이다."고 말했다.

학교 교육은 미국의 만행을 민주주의에 대한 신화로 둔갑시켜 학생들에게 주입시켰다. 그것은 미리 결정한 "공인된 진실"만을 전달하는 도구로 이용됐다.

언론 ― 거짓말·왜곡·편파 보도

촘스키는 미국의 언론 또한 비판한다. 그는 미국 언론이 자국 정부의 잔혹한 행위를 간단히 무시해 왔을 뿐 아니라 왜곡·조작까지 해 왔음을 폭로한다.

대표적인 왜곡 보도가 미국의 니카라과와 엘살바도르 개입 보도다.

니카라과에서 미국은 세 차례에 걸쳐 반미 정부를 전복했고, 오랫동안 탄압을 해 왔다. 산디니스타는 미 점령군에 맞서 싸웠고, 미국의 버팀목이었던 소모사 독재정권을 물리쳤다. 미국은 니카라과를 중남미 전체로 국가 전복을 확산시키는 암적인 국가로 보았다.

1985년 11월 미국은 산디니스타가 콜롬비아의 법무성을 테러 공격한 M-19 게릴라에게 무기를 지원했다고 조작해 발표했다. <뉴욕 타임스>는 연이어 이틀 동안 산디니스타의 '폭력성'을 부각시켜 보도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는 미국이 니카라과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면서 무고한 시민들을 테러하고 산디니스타를 공격한 사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반면, 1988년 3월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가 콘트라 반군을 대대적으로 공격했을 때 미국 언론은 산디니스타의 '호전성'을 맹렬히 비난하는 기사를 연일 대서특필했다. <뉴욕 타임스>는 이 기간 동안 다른 모든 나라들에 대한 기사를 합친 것보다 니카라과에 대한 악의에 찬 왜곡 기사를 11배나 늘려서 보도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미국은 니카라과 노동자·농민을 대량 학살했다. 학살된 사람 수는 남북전쟁과 20세기의 모든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미국인 희생자를 훨씬 넘어섰다. 그런데도 <뉴욕 타임스>는 "미국의 페어 플레이의 승리"였다고 대서 특필했고 <타임>은 "니카라과에서도 민주주의가 시작되었다."며 만행을 찬양했다.

니카라과와 달리 엘살바도르는 미국이 지원하는 정부였기 때문에 반대 논조의 보도가 이루어졌다. 엘살바도르 정부는 반정부 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으로 일관했다.

몇몇 지역에서는 지독한 고문에 시달린 흔적이 뚜렷하고, 가슴이 잘려나가고 얼굴에 붉은 페인트가 칠해진 채 긴 머리카락이 나무가지에 매달려 있는 시체들이 발견되곤 했다.

로자 세베스 대주교 보좌 신부는 "고문당한 끝에 목숨을 잃은 두 노동자를 끌고 간 사람들은 제1포병여단 소속 대 게릴라 소대(미국이 훈련시킨 정예부대) 복장을 하고 있었다."고 폭로했다.

하지만 미국 의회는 엘살바도르를 지원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촘스키는 미국 언론의 역할을 이렇게 표현했다. "[언론은]대중의 마음을 공공의 일들로부터 떼어내 피상적인 일, 끊임없는 소비에 묶어 놓는 것을 업무로 한다.

사실, 이것이 현대 정치학의 핵심이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대부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자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그런 일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할 일이니 나는 새 구두나 사러 간다는 식으로(<한겨레> 2001년 5월 15일 자 인터뷰)" 만들려 한다.

하지만 그는 기성 언론의 악의에 찬 시도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도 함께 주장하고 있다.

"노동자의 항거가 활기에 넘쳤고 거리낌이 없었던 1950년대까지 미국에서 전성기를 구가하던 지방 언론의 목소리는 솔직하기 이를 데 없었다. … 새삼 강조하지만 강력한 노동운동이다."

이 책은 미국의 지배자들이 어떻게 교육을 통해 자신들의 만행을 정당화하고 있는지, 언론을 통해 자신들의 외교 정책을 정당화하는지를 생생한 사례를 통해 입증하고 있다.

최영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