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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세계대전:
전례 없이 끔찍하고 길었던 대량 살육전

사라예보의 총성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일로, 독일에서 프랑스로,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이어지면서 연쇄 충돌을 낳았다. 유럽 전체가 단 1주일 만에 전쟁의 회오리 속으로 급속히 빨려 들어갔다.

처음에는 애국주의 열풍이 전 유럽을 휩쓰는 듯했다. 서로 죽이지 못해 안달하는 유럽 지배 계급들은 대중가요, 소설, 철학자의 선언 등 다양한 방식을 이용해 대중 속에 자신의 의지를 퍼트렸다.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따분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전쟁이란 익숙한 것과 오랫동안 혐오했던 것들이 무너지고 뭔가 새롭고 특별한 것으로 여겨졌다.”

누구든 전쟁을 반대하거나 참전을 거부하면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전쟁 참가 독려 포스터의 문구들은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 준다. “누가 빠졌는가? 당신인가?”, “영국의 여성들은 말합니다. ‘가세요!’”

심지어 독일 사민당, 영국 노동당의 ‘사회주의자’들마저 기존 결의를 뒤집고 자국의 전쟁을 지지했다. 러시아 볼셰비키와 세르비아 사회주의자들만이 전쟁을 비타협적으로 반대했다.

영토 한 조각과 맞바꾼 수백만 명의 목숨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를 단 몇 주 만에 패배시킨 독일 황태자는 이번 전쟁 또한 “밝고 즐거운 전쟁”이 되리라 예견했다. 사람들은 ‘조국’이 나쁜 상대 국가를 쉽게 혼내 주고 돌아올 것이고, 전쟁은 “크리스마스 때쯤이면 다 끝날”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하지만 그 믿음은 얼마 안 가 와장창 깨져 버렸다.

제1차세계대전은 전례 없는 규모의 대학살과 파괴, 폐기물을 양산하는 강대국들의 총력전이었다. 발전한 산업 기술은 더 효과적인 학살을 연구하는 데 사용됐고, 병력 규모도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 규모로 도약했다. 예컨대 1914년 서부전선의 독일 군대 규모는 1500만 명이었다. 독일보다 인구가 적은 영국은 미성년자까지 징집했다.

강대국들은 패배하지 않기 위해 (민중의 수많은 목숨을 포함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그 결과는 끝이 안 보이는 교착 상태와 소모전이었다.

독일군이 프랑스 북부로 진격했으나 파리 앞에서 멈춰야 했고 48킬로미터 후퇴한 뒤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구축했다(서부전선). 프랑스는 이 과정에서 한 달 만에 참전 병력의 4분의 1을 잃었다.

러시아군은 독일 동부의 프러시아 지역으로 진격했으나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패배한 뒤 쫓겨나 마찬가지로 참호를 파고 방어선을 쳤다(동부전선).

양측은 상대방이 참호를 파고 지키는 강력한 방어선을 뚫으려 할 때마다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결국, 4개월이면 끝날 것이라고 예상했던 전쟁은 4년 넘는 소모전이 됐다. 이탈리아, 오스만 제국(터키), 미국 등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전선은 오히려 확대됐다.

사상자 숫자는 참혹할 정도로 늘어났다. 전쟁이 시작된 뒤 단 5개월 만에 35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5개월에 걸친 베르됭 전투에서는 참가한 200만 명 가운데 절반이 죽었다. 1916년에 4개월 동안 벌어진 솜 전투에서는 100만 명이 죽었는데 전투 첫날 2만 명이 죽었다. 솜 전투 동안 독일군 사상자는 약 50만 명, 영국군 사상자는 약 42만 명에 이르렀다. 그런 전투로는 겨우 몇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적에게서 얻어냈을 뿐이었다.

1917년 7월부터 3개월간 벌어진 파스샹달 전투에서도 100만 명 이상이 죽거나 다쳤다. 그러나 전선은 역시나 고작 몇 킬로미터 이동했을 뿐이었다. 어떤 전투도 교착 상태를 타개하지는 못했지만 전쟁은 계속됐다. 한 병사는 이렇게 썼다.

“인간은 미쳤다! 현 사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미친 것임에 틀림없다.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내가 받은 인상을 전달할 말을 찾을 수가 없다.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프랑스 보병 알프레드 주베르가 1916년 5월 23일 적은 일기, 《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존 엘리스, 마티, 2009) 중)

그러는 동안 전선과 후방에서 병사들과 민중이 겪은 고통의 깊이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땅속의 일상

병사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참호와 굴을 파놓은 지하에서 살았다.

땅을 파면 지표에서 1미터만 들어가도 물이 솟아 나왔다. 비라도 내리면 참호는 온통 진흙탕으로 변했다. 독일의 화가 오토 딕스는 참호의 광경을 찢겨 흩어진 사지와 거꾸로 박힌 시체, 피범벅의 진흙탕으로 그렸다. 실제로 수많은 부상자들이 주변의 포탄 구멍으로 숨어들었다가 차오르는 흙탕물에 익사했다. 그러면 진흙과 살덩이를 구별할 수 없는 지옥 세계가 펼쳐졌다.

군의관은 병사들을 참호에 48시간 이상 투입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처사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한 스코틀랜드 대대는 참호에서 연속 38일을 보냈고 한 영국 대대는 연속 51일을 버텨야 했다.

병사들은 참호의 처참한 환경과 굶주림뿐 아니라, 언제 개죽음당할지 모른다는 공포와 상시적인 긴장감, 그로 인한 피로에 완전히 절었다. 모두가 지하에 숨어서 지루할 만큼 고요하던 전장에는 어느 날 갑자기 포탄이 마치 우박처럼 쾅쾅 쏟아졌고 스멀스멀 흐르는 독가스는 콧구멍을 통과하고서야 감지됐다.

포탄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으로 인한 전쟁신경증 ‘셸 쇼크’

포탄에 대한 두려움과 무력감으로, 심하면 기억상실증까지 동반했던 전쟁신경증 ‘셸 쇼크’(shell shock, 포탄 충격)는 1917년 10월경 군대에서 방출된 병사 7명 중 1명의 방출 사유일 정도로 만연했다. 하지만 군대는 이 질환을 ‘겁쟁이나 의지박약자의 병’ 정도로 치부했고 치료는커녕 해당 병명으로 진단하는 것을 한때 금지하기도 했다.

한 병사는 이렇게 썼다. “참호에서의 죽음은 무작위적으로, 비논리적으로 발생한다. … 혼자 야간 경계 근무를 설 때면 자주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때마다 이게 현실인지, 혹시 자면서 이상한 꿈을 꾸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삶의 모호함 속에서 모든 게 사라져 버렸다.”(《참호에 갇힌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시인인 윌프레드 오언은 병사들을 관찰한 뒤 이렇게 말했다. “모든 병사들의 얼굴에 나타난 기묘한 표정은 절망이나 공포가 아니었다. 아니, 그것은 공포보다도 더 끔찍했다. 그들의 얼굴은 마치 죽은 토끼의 얼굴처럼 무표정하고 공허했다.”

“전쟁은 부자들을 위한 것”

후방의 궁핍과 혼란도 극심했다. 전쟁에서 이기려면 모든 국가 자원을 전선으로 돌려야 했고, 그것이 보통 대중의 생활 수준에 미칠 악영향은 고려되지 않았다. 소비재를 생산하던 기업들은 군수품 생산으로 전환됐고, 극심한 식량 부족을 초래하는 한이 있더라도 농업 노동자들은 징집됐다. 포탄이 아닌 영양 부족으로만 무려 75만 명이 죽었다!

각국 정부는 군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화폐를 찍어내야 했다. 물가가 폭등했다. 생활 수준이 재앙적이라 할 만큼 하락했다. 독일에서 1917년 무렵 남성 노동자의 평균 ‘실질’임금은 반으로 깎였다. 파업 등의 저항 행위는 일체 금지됐고, 이를 어기면 전쟁터로 끌려가는 가혹한 처벌이 뒤따랐다.

노동계급 여성은 남성들이 비우고 떠난 공장에서 장시간 고강도 노동을 하면서 아이들까지 길러야 했다. 여성들은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다.

제1차세계대전은 약 1000만 명의 사망자와 800만 명의 실종자, 2000만 명의 부상자를 낳았다. 패전국인 독일 등에서 800만 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하지만 승리한 연합국에서도 550만 명이 사망하고 400만 명이 실종됐다. 프랑스는 전투 연령의 남성 5명 중 1명을 잃었다. 세르비아는 전쟁 전 인구의 4분의 1을 잃었다. 종전일인 1918년 11월 11일에도 1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조국의 승리’를 위해 수많은 병사들이 전쟁터에 끌려나가 죽어갔다. 병사들과 민중에게 남은 것은 시신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개죽음, 전쟁 트라우마, 장애, 가족 잃은 고통뿐이었다.

하지만 장군과 장교들은 전쟁터에서조차 병사들의 시중을 받으며 좋은 음식과 포도주, 좋은 숙소를 누렸다.

한 탈영병은 이런 시를 남기고 떠났다. “이것은 모두 사기다. 전쟁은 부자들을 위한 것. 중간계급은 항복해야 한다. 민중들은 시체를 내놓아야 한다.”

축적된 절망과 가진 자들의 풍족한 삶이 주는 박탈감은 들끓는 민중의 분노로 바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