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이명박·박근혜 시절 국가정보원의 정치 공작 실체와 고위 인사들의 비리가 계속 폭로되고 있다. 이에 발맞춰 국정원은 조직 이름을 ‘대외안보정보원’으로 바꾸고 대공수사권을 이관하겠다는 ‘개혁’안을 내놨다. 국정원 개혁은 문재인의 대선 공약 중 하나였다.

국정원 정치 공작의 양상에서 오히려 드러나는 국가기관 내 국정원의 위상을 볼 때, 이런 일들은 순전히 박근혜를 쫓아낸 아래로부터의 대중 투쟁 덕분이다. 촛불 운동은 탄압과 사찰로 횡포를 부린 국정원도 표적의 하나로 삼았다.

일부 NGO와 개혁주의 세력, 〈한겨레〉 등은 국정원이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의 완전한 분리”로 “국가 안보와 대외활동만 집중하는 순수한 정보기관”으로 개혁돼 “진정한 국익을 위한 기구”로 거듭날 기회라며 문재인 정부의 ‘개혁’에 일정 정도의 기대를 보낸다.

이름뿐인 ‘개혁’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국정원이 내놓은 자체 ‘개혁’안은 ‘개혁’이라고 부를 건더기조차 찾기 어렵다.

현재 국정원은 국가정보원법의 시행령인 ‘정보 및 보안업무 기획조정 규정’에 따라 12개의 정부 부처와 관련 기관들에 대한 조정 권한을 갖고 있다. 업무 범위는 국가기본정보정책의 수립, 국가정보의 중장기 판단, 정보예산 편성 등 광범하다. 이런 권한으로 국정원은 각 부처에 개입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고리 삼아 엄청난 자금을 융통할 수도 있다. 군 사이버사령부의 댓글 사건이 국정원의 지휘 아래 진행된 점만 봐도 그렇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국정원의 권한은 전혀 건들지 않은 채 형식뿐인 ‘대공수사권 이양’만 말하고 있다. 이는 사실상 대중을 제일 분노하게 했던 국내 정치 개입은 건들지 않으면서 기만하는 조삼모사일 뿐이다.

또, “국내 개입 파트 삭제”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국가안보 관련 수사 역량의 훼손을 최소화하기 위해” △형법의 내란·외환죄 및 내란 예비·선동 등의 죄 △군형법의 반란죄 및 암호부정사용죄 △군사기밀보호법 위반죄 △국가보안법 위반과 북한과 연계된 안보 침해 행위에 대한 정보수집을 직무 범위로 추가했다. 즉, 말로는 수사권을 넘기겠다지만 수사권 관련 범위를 “안보 침해 행위 정보”로 규정해 여전히 광범한 국내정보 수집 및 사찰의 근거를 그대로 둔 것이다.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국정원이 자행한 온갖 인권침해와 탄압을 가능하게 한 핵심 명분이 ‘간첩 잡기’였는데도, ‘간첩 잡기’를 위한 조사와 내사, 수사와 관련한 권한은 사실상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공공기관 대상 사이버공격 예방도 국정원의 직무 범위에 포함했다. 문제가 된 구 여권의 정치공작(여론 조작) 중 드러난 것들의 주된 양상이 사이버 심리전이란 명목으로 저질러진 마당에 이 정도면 너무 뻔뻔한 것 아닌가 싶다. 은밀한 감시와 사찰이 가능한 사이버 공간을 핵심 국가기구인 국정원이 계속 관리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런 점들을 따져 볼 때, 정의당이 국정원의 자체 ‘개혁’안을 지지한다고 한 것은 유감스럽다.

“순수한 정보기관?”

국정원과 국가보안법은 효과적인 세트로 작동해 왔다. 가령, 국가보안법 덕분에 국정원이 탈북민들을 자의적으로 감금하고 수사하는 북한이탈주민보호센터(옛 합동신문센터)를 운영할 권한을 갖는다. 지난해 제정된 테러방지법도 국정원의 권한을 강화하는 법이다. 국정원이 대공수사권을 포기하면 “간첩은 누가 잡느냐”고 길길이 날뛰는 우파의 호들갑은 과장일 뿐이다.

그런데도 문재인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북한의 존재 때문에 국가보안법이 필요하다는 뻔한 논리로 국가보안법 폐지를 지지하지 않았다.

이처럼 문재인의 국정원 ‘개혁’은 대중들의 염원에 턱없이 못 미친다. 단지 조삼모사 문제가 아니다. ‘대공수사권’을 다른 기관으로 이전해도 달라질 건 없다. 국정원의 일부 수사권을 경찰에게 넘긴다는 계획은 억압적 국가기관들 사이에서 오가는 권한 이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에게 순수한(계급 간에 공정한) 국가 권력 기구 따위는 존재할 수 없다. 정보기관과 수사기관이 이원화된 “선진국형”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

미국 CIA가 불법 사찰이나 감청으로 자국민의 일상을 통제한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미국 FBI와 경찰은 정부의 통치 위기 때마다 자국 내의 인종차별을 강화해 유색인종을 테러범으로 몰아가기 일쑤다.

영국에서 국내 안보는 MI5, 국외 활동은 MI6으로 나눠져 있지만, 지난해 3월 영국 정부는 '수사권 법안 수정안'을 발표해 MI5, MI6 두 곳 모두의 수사권을 강화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수정안에는 이들이 인터넷 접속 기록을 열람하고 전자기기를 도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까지 포함됐다.

사찰과 억압을 담당하는 국기기관 ‘개혁’이 갖는 이러한 근본적 한계는 자본주의 국가의 본질적인 성격 때문이다. 국가는 “계급 대립의 화해 불가능성의 산물”이다. 소수가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 다수를 억누르기 위한 억압 기구들의 네트워크가 국가의 본질이다. 이 중 국정원, 검찰, 경찰, 군대 내 사찰기관 등이 이른바 비밀경찰의 일을 수행한다.

또한 ‘국가 안보’도 간접적으로 이윤 지상주의 원리의 지배를 받는다. 개별 국가의 위상은 그 국가와 연계된 자본들의 크기와 상당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자국 내에서 노동계급을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것이 경쟁 국가들을 이기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모든 계급을 초월한 ‘국익’은 존재하지 않고, 이를 위한 ‘국가안보’도 노동계급의 이해관계가 아니다.

그러므로 국가들끼리 서로 감시하며 벌이는 정보 경쟁 등의 ‘대외 정보 활동’은 해당 국가 내에서의 착취 문제 그리고 이를 둘러싼 국내 정치와도 분리하기 어렵다.

국정원 개혁을 약속했던 노무현 정부의 사례가 이를 보여 준다. 2004년에 한나라당은 송두율 교수를 “건국 이후 최고위급 거물 간첩”, “북한의 구라파 간첩 총책”이라고 마녀사냥 했다. 노무현 정부의 법무부 장관 강금실도 “[검찰의 의견과] 다를 게 뭐 있겠냐”며 동조했다. 그러나 판결에서 이것이 터무니없는 부풀리기였음이 드러났다. 그 뒤에는 노무현 정부가 개혁 염원 배신 때문에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지자, 국정원은 북핵 실험으로 경색된 국면을 이용해 (나중에 왜곡·과장이 드러난) ‘일심회’ 사건을 터뜨리기도 했다.

국정원은 해체돼야 마땅하고 정치 공작 관련자들은 처벌받아야 한다. 하지만 설사 기능을 분산하거나 없애도 그 본질적 기능이 국가기구 안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민주적 권리를 확대하려면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고무해 지배계급을 압박하는 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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