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는 죄가 아니다. 여성이 결정할 권리다 ⓒ조승진

낙태(임신 중단*)를 둘러싼 사회적 논쟁이 더욱 첨예해지고 있다.

12월 2일에는 청와대 답변 이후 첫 낙태죄 폐지 시위가 열렸다. 여성단체, 진보정당, 좌파단체 회원들 등 250여 명이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당당하게 행진했다.(관련 기사: 본지 231호 ‘수백 명이 당당하게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행진하다’)

그리스도교 우파가 청와대의 알맹이 없는 ‘사회적 논의’ 운운에조차 반발하며 대대적 낙태 반대 운동을 예고했음에도 단호하게 낙태죄 폐지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낙태죄 폐지 여론이 높아졌지만 여전히 낙태에 대한 도덕적·종교적 비난 앞에 위축될 수 있음을 고려하면 이 시위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

여성들이 시위에 앞장선 가운데, 남성들과 노동자들도 여성의 낙태권을 옹호해 참가했다. 낙태죄는 여성 문제이자, 노동계급과 빈곤층 여성에게 특히 큰 영향을 미치는 계급 문제이기도 함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위에서는 청와대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나왔다. 문재인 정부가 낙태죄 폐지에 대해 확언한 게 없을 뿐 아니라 낙태 반대 세력에 타협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기 때문이다. “청와대는 우리에게는 ‘친절하게’ 영상으로 답변하고, 천주교에 찾아가서는 고개 숙였다. 우리는 ‘친절’에 속지 않는다”는 사회자의 일침에 적잖은 참가자들이 호응했다.

“태아 생명권” 논리 자체가 여성차별적

낙태 반대 세력도 반격을 시작했다. 낙태죄 폐지 시위 다음날 천주교의 전국 16개 교구가 낙태죄 폐지 반대 100만 서명운동을 시작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명동성당에서 ‘생명 수호’ 미사를 주례한 뒤, 첫번째로 서명했다.

염수정 추기경은 미사에서 “잉태된 순간부터 태아는 여성 몸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한 인간”이고 “인간[태아] 생명은 여성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보다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낙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에 대한 끔찍한 폭력이자 일종의 살인행위”라고도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여성차별의 발로일 뿐이다. 염 추기경 주장과 정반대로, 태아는 모체에 모든 것을 의존해야만 하는 여성 신체의 일부이지 독립적 인격체가 아니다. 따라서 “태아의 권리”라는 말도 성립할 수 없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태아가 이미 자신의 삶을 사는 인간인 여성의 자기 결정권보다 우선한다는 것은 결국 여성을 태아의 인큐베이터로나 보는 견해일 뿐이다.

임신과 출산은 여성의 삶 전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여성에게 낙태 결정권이 없다면 여성이 자기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말은 공문구일 뿐이다. 여성해방 운동의 오랜 구호처럼,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다.

역사적으로 여성들은 낙태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자신과 가족의 삶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는 임신을 중단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여성들이 비위생적이고 안전하지 못한 낙태로 치명적 상처를 입거나 뒷골목에서 죽어가야 했다. 이게 무슨 “생명 존중”인가?

한국에서 병원 낙태 시술은 꽤 광범하게 이뤄져 왔다. 처벌된 비율도 매우 낮다. 하지만 불법이기에 많은 비용을 치러야 하고, 단속이 강화되면 그 비용이 폭등한다. 이는 여성에게는 낙태 접근을 어렵게 하는 장애물이 된다.

뿐만 아니라, 불법 낙인이 두려워 낙태 사실을 쉬쉬해야 하고 낙태 후 휴식도 취하지 못한 채 일해야 한다.

이처럼 낙태죄가 여성의 건강과 삶에 얼마나 큰 해악인지를 직시한다면, “태아 생명권” 운운하며 여성의 낙태권을 부정해선 안 된다.

12월 2일 낙태죄 폐지 시위 ⓒ조승진

낙태 반대 세력은 최근 ‘왜 여성에게만 낙태 책임을 묻느냐’는 여성운동 측의 항변(그리고 청와대 조국 수석의 답변)을 의식했는지, ‘남성 책임도 강화하자’는 얘기를 들고 나왔다. 염 추기경도 이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낙태죄 폐지 문제를 남성 개개인의 책임 문제로 비틀어, 낙태죄 폐지 요구를 무마하고 국가 책임을 흐리는 본질 회피에 불과하다.

설사 모든 남성이 무책임하다손 치더라도, 국가가 여성의 낙태 권리를 보장해야만 여성의 안전과 삶을 지킬 수 있다. 국가가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의 낙태권을 보장하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세계 낙태권 운동의 역사는 이를 쟁취하는 데 있어서 여성과 남성이 단결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진보계의 낙태권 논의

한편, 진보계 내에서도 낙태죄 폐지와 그 대안을 둘러싼 논의가 더 활발해질 듯하다. 청와대 청원 직후 법률 개정안 발의를 약속한 정의당은 12월 12일 ‘형법상 낙태죄 폐지와 모자보건법 개정’을 주제로 당원토론회를 개최한다(정책위원회와 디지털소통위원회 주최).

정의당 정책위원회는 토론회 발제문 ‘낙태죄 폐지 관련 정책입법 방안’(이하 정책위 안)도 이미 당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물론 아직 검토 중인 안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정의당 지도부의 대략적 방향성은 보여 주는 듯하다.

정책위 안의 요지는 이렇다. 형법상 낙태죄 폐지. 12주 이내 초기 낙태의 경우에는 상담 절차를 거쳐 여성의 요청에 의한 낙태 허용. 사회·경제적 사유의 낙태 허용(임신 12주~24주의 경우), 우생학적 사유는 의학적·사회적 적응 사유로 대체하고 배우자 동의 조항은 폐지. 위의 허용 조건 외의 낙태는 임부와 의사에 대한 처벌 규정을 둠.

이 안은 대부분의 낙태가 금지된 현행법보다는 훨씬 낫다. 그럼에도 기간과 사유의 제한을 둠으로써, 그 조건의 충족 여부를 결국 국가나 의사 같은 제3자가 판단하도록 한다는 문제가 있다. 이는 여성에게 낙태 결정권을 온전히 주는 게 아니다. 형법상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면서도, 일정 허용 조건 밖의 낙태는 처벌하자는 내용도 마찬가지 난점이 있다. 또한 어떤 식으로든 처벌 규정을 남겨 두면 낙태는 여전히 죄가 될 수 있다.

12주 이내 초기 낙태의 경우에는 (사유를 불문하고) 여성이 요청하면 낙태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장점이 있다. 그러나 상담절차 의무화를 전제조건으로 제안한 것은 지지할 수 없다. 서구의 경험을 보면, 낙태 반대론자들은 상담 의무를 낙태 선택을 어렵게 하는 수단으로 이용해 왔다.

한편, 24주 이후의 후기 낙태에 대해선 매우 예외적인 경우에만 허용을 검토할 수 있다고 한다(태아에게 심각한 이상이 있거나 출산이 모체에 직접적 위험을 주는 경우). 우파들은 “태아의 독자 생존능력” 운운하며 후기 낙태를 비난해 왔다. 이 때문에 낙태 허용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도 후기 낙태는 대체로 금지돼 있다. 그러나 어떤 태아도 독립된 인격체일 수 없다.

후기 낙태가 여성의 건강에 부담이 되기 쉽지만, 그럴 때조차 일부 여성들은 낙태를 선택한다. 그만큼 절박하고 불가피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 후기 낙태를 금지하면 자가 낙태를 시도하다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따라서 후기 낙태도 처벌해선 안 된다. 후기 낙태 문제에서도 낙태가 여성이 결정할 권리라는 점은 일관되게 적용돼야 한다.

앞으로 천주교를 비롯한 낙태 반대 세력은 낙태 반대 운동을 끈질기게 벌일 것이다. 게다가 문재인 정부는 벌써부터 진보와 보수 사이에서 줄타기에 여념이 없다. 따라서 문재인 정부 하에서도 아래로부터의 압력이 크게 형성되지 않는다면 낙태죄 폐지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낙태죄 폐지 진영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운동을 건설하려 애써야 한다. 노동자 운동도 낙태가 바로 자신의 문제라는 인식을 실행에 옮겨 진지하게 대규모로 동원돼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