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전인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회를 낳았다. 본지는 러시아 혁명을 주제로 한 기사를 연말까지 번역 연재하려고 한다.


러시아 혁명 중에 활약한 블라디미르 레닌이나 레온 트로츠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 같은 저명한 혁명가들은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역사가들이 거의 거론하지는 않지만 혁명 과정에서 지도적 구실을 했던 혁명가들도 많다.  

이바르 테니소비치 스밀가는 1892년 [러시아의 지배를 받는] 라트비아에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20세기 전환기에 급증하는 노동자 투쟁을 경험하면서 그는 어린 시절의 보수적 사고에서 벗어났다.

스밀가(아랫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 인물)가 트로츠키 등 좌익반대파와 찍은 사진

스밀가의 아버지는 1905년 혁명 당시 토지 점거 운동에 참여하고 나서 지주들의 무자비한 보복에 시달려야 했다. 그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고문당한 뒤 처형됐다.

스밀가는 14세부터 볼셰비키 조직과 관련 맺었고 그 뒤 수차례 투옥과 유배를 겪었다.

그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석방된 뒤 볼셰비키 중앙위원으로 선출됐으며, 크론시타트 수병을 조직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어 핀란드로 파견된 스밀가는 볼셰비키가 노동자위원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또 스밀가는, 볼셰비키가 이끄는 노동계급이 임시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아야 한다는 레닌의 주장이 지지받는 데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봉기

레닌은 스밀가에게 핀란드와 발틱 함대의 군대를 동원해 페트로그라드 봉기를 지원하는 책임을 맡겼다.

스밀가는 “규제 세력을 보내라”는 암호 전보를 받고 중무장한 수병 1500명을 페트로그라드로 보냈다. 그런데 페트로그라드에서 봉기는 간단히 승리해서 스밀가의 병력이 도착했을 때 남은 일은 동궁을 장악하는 것뿐이었다.

스밀가는 반혁명 세력에 맞선 내전에서도 지도적 구실을 했다.

나중에 스밀가는 노동자 국가의 관료화에 반대하는 좌익반대파에 가담했다. 그리고 이오시프 스탈린의 부상에 맞서 트로츠키를 지지했는데, 이 때문에 당에서 쫓겨나고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으며 결국 총살당했다.

아나스타샤 데비앗키나는 12세의 나이에 군수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04년에 볼셰비키에 가입했고 선동 활동으로 체포돼 감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데비앗키나는 1917년 2월 혁명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녀는 혁명에 불을 당겼던 여성 노동자와 병사 아내들의 초창기 시위 중 하나를 이끌었다.

그리고 나서 데비앗키나는 지역 노동자 평의회(소비에트)에 선출돼 활동했다. 데비앗키나는 10월 혁명에서도 권력 장악을 위해 싸우는 부대들을 조직하는 중요한 일을 했다.

아리시나 크루그로바도 중요한 볼셰비키 여성 노동자였다. 크루그로바는 제1차세계대전 당시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볼셰비키의 전단을 수류탄 상자에 담아 몰래 옮겼다.

크루그로바는 2월 혁명 때 전투적인 시위들을 이끌었다. 차이나 미에빌은 자신의 책 《10월》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프로메트 공장 노동자들이 한 여성을 따라 행진하는 것을 보고 코사크 장교가 ‘할망구를 따르는 무리’라고 조롱했다.

그 여성은 볼셰비키였던 아리시나 크루그로바였다. 그녀는 큰소리로 자신은 주체적인 여성 노동자이며 전선에 있는 병사들의 아내이자 누이라고 맞받아쳤다.     

그녀의 기세에 눌려 대치하던 병사들이 겨누던 총을 천천히 내려놓았다.”

크루그로바는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소비에트 두 곳에서 대표로 선출됐고, 혁명을 방어하는 적위대를 조직하는 일을 했다. 또 부자들의 주거지를 수색해 무기를 접수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혁명에는 지도력이 중요하다. 당의 지도력과 개인의 지도력 둘 다 필요하다. 볼셰비키는 두 영역에서 모두 지도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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