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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m - 구원의 시간 ┃ 주먹이 운다

주먹이 운다 ┃ 류승완 감독

〈친구〉, 〈살인의 추억〉, 〈올드 보이〉,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달콤한 인생〉〈주먹이 운다〉까지 한국영화 흥행작들의 주인공들은 남성들이다. 반면에 여성들은 부차적이고 덜 치밀하게 형상화됐다.

호화스런 조폭들이 짝사랑하는 첼리스트를 두고 벌이는 치정 학살극 〈달콤한 인생〉이 더 심각하지만, 〈주먹이 운다〉도 이런 면에서 자유롭지는 않다. 그러나 〈주먹이 운다〉의 남성들은 최고급 승용차를 몰거나 호텔 라운지에서 빈둥거리는 불한당들이 아니다.

그들은 코너에 몰린 하층민들이다. 두 주인공 강태식(최민식)과 유상환(류승범)은 인생 막장에 다다라 권투에 헌신한다. 강태식은 한때 아시안게임 은메달리스트였지만 40대에는 빚더미에 앉아서 노숙자가 될 형편이다. 많이 맞아서 손상성 치매 증상이 있는데도 거리의 ‘인간 샌드백’이 돼 하루하루 맷값을 벌며 살아간다.

영세민 아파트에 할머니와 함께 사는 유상환은 가끔씩 들르는 일용직 노동자 아버지를 소 닭 보듯 한다. 상환은 십대 범죄자의 초상이다. 폭행 사건으로 합의금이 필요해지니까 다시 강도 짓을 하는 식이다. 결국 소년 교도소에 들어간다. 그리고 아버지는 작업장에서 벽돌더미에 깔려 죽는다.

다음으로 할머니도 쓰러져 온전한 정신을 놓아 버린다. 불행은 늘 가난 주위에 맴돈다.

태식에게도 악습들이 있다. 그는 아내를 자주 때렸고 한 장면에선 아내한테 쌍욕을 한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넋두리에 주정. 아들과 소통하는 것에도 미숙하다. 그러나 눌어붙은 패배의식과 악습들, 줄지 않는 빚더미에도 불구하고 링 위에서 보여 주는 그의 몸놀림은 가볍고 경쾌하다. 이런 역설은 오히려 진한 연민을 자아낸다.

《알리, 아메리카를 쏘다》(원제: 구원의 노래 - 무하마드 알리와 60년대의 정신)라는 책에는 권투에 대한 훌륭한 통찰들이 들어 있다. “권투는 … 인간의 원초적 공격성이나 본능적 폭력 성향 따위와 관계가 없다. 권투의 문화는 오히려 자제력, 자기수양, 고진감래 같은 것이다. 이는 가난이라는 무정부 상태와 대조되는 잘 짜여진 대응이자 안락한 피난처다.”

신인왕 결승전에서 맞붙은 두 주인공들은 경기가 끝나고, 비로소 환하게 웃는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 곧 새아빠가 생길 어린 아들을 끌어안고 그들은 잠시나마 구원의 시간을 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