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인 1987년,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에 맞서 첫 번째 ‘인티파다’ 항쟁을 일으켰다. 이 항쟁은 5년 동안 이어졌고 아랍 전역에서 연대를 촉발했다. 닉 클라크가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을 살펴 보고 오늘날 이스라엘에 맞선 저항에 주는 교훈을 짚어 본다


12월 7일에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데 항의해, 팔레스타인 저항 운동 단체 하마스가 ‘인티파다’(봉기)를 호소했다. 1차 ‘인티파다’ 발발 30주년 기념일 하루 전날이었다.

수십 년에 걸친 이스라엘과 제국주의의 억압에 맞서, 1987년 12월 거리에서 저항이 분출했다. 항쟁은 5년 가까이 이어졌고, 아랍 전역에서 이와 유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인티파다’ 항쟁은 [이스라엘의] 충격적인 잔혹 행위 때문에 촉발됐다. 일과를 마치고 이스라엘에서 가자 지구로 돌아가던 팔레스타인인 수백 명이 보는 앞에서 끔찍한 살해 행위가 벌어졌다.

이스라엘의 탱크 수송 차량이 검문소에서 노동자들의 차량 행렬을 덮쳤다. 팔레스타인인 네 명이 죽고 일곱 명이 다쳤다.

사고 당일 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 내] 난민촌 자발리아 근방에서 치러진 사망자 3인의 장례식은 경찰서를 향한 1만 명 행진으로 번졌다. 다음 날 이스라엘 군대는 자발리아에서 벌어진 다른 시위를 공격했다.

이스라엘 군은 시위에 참가한 스무 살 청년 하템 엘 시시를 살해했다. 이 때문에 또 대중 시위가 벌어졌다.

시위를 목격한 팔레스타인 언론인 사프와트 칼로우트는 이렇게 증언했다. “무언가 새로운 일이 벌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학생들이 모여들어 [이스라엘] 군용 트럭을 에워싸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몇몇 집에 숨어 사방으로 총을 쏘아대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모든 시위를 살인적 폭력으로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이 한 명 살해될 때마다 장례식과 시위가 계속 일어나, 마침내 가자 지구 전역이 저항의 물결로 뒤덮였다.

필 마셜은 그의 책 《인티파다 ─ 시온주의, 미국과 팔레스타인 저항》에서 ‘인티파다’ 항쟁 초기를 이렇게 묘사했다. “수만 명이 시위에 참여해 그동안 금지됐던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면서 민족주의 구호들을 외쳤다.

“20년간의 실업, 과밀 인구, 빈곤, 억압에서 비롯된 좌절과 고통이 이스라엘의 점령에 대한 집단적 저항으로 폭발하고 있었다.”

항쟁은 팔레스타인 전역으로, 이스라엘 국가가 직접 통치하는 지역으로도 번졌다.

[요르단강] 서안 전역과 이스라엘 내에서도 시위와 소요가 벌어졌다. “아랍계 이스라엘인”(이스라엘에서 쫓겨나지 않은 팔레스타인인)들도 가자·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인들에 연대해 총파업에 동참했다.

충돌

야파, 아크레, 로드 등 이스라엘 도시에 거주하는 팔레스타인인들도 시위를 벌이고 경찰과 충돌했다.

이스라엘 정부는 봉기에 “철권”을 휘둘렀다. 이스라엘 국방장관 이작 라빈은 “무력을 휘둘러 타격해” 시위를 진압하라고 이스라엘 군에 지시했다.

항쟁 한 달 사이에 이스라엘 군 자체 발표로도 팔레스타인 시위대 20명이 죽고 200명이 다쳤으며 1200명이 구속됐다.

이스라엘 신문 〈하레츠〉에 이스라엘 군의 보고서가 유출됐다. 보고서는 “현장의 장교·지휘관이 [팔레스타인인들의] 재산을 부수고 팔다리를 부러뜨리라고 명령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할리메 제르미는, 바라타 난민촌에서 벌어진 초기 시위에서 자신의 딸 사하르가 어떻게 살해됐는지 기억한다.

“이스라엘인들이 총을 쏘기 시작했습니다. 서른 명 정도가 다쳤습니다. 사람들이 ‘당신 딸이 죽었어요’ 하고 [내게] 알려줬습니다.”

할리메 자신도 다른 시위에서 체포됐다. “이스라엘인들이 [팔레스타인] 청년들과 싸우는 것을 봤어요. 저는 돌을 주워 이스라엘인들에게 던졌습니다.

“이스라엘인들은 제게 수갑을 채워 끌고 갔습니다. 6개월 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어요.”

항쟁 발발 1년째인 1988년 12월까지 이스라엘 군은 하루에 병력 1만 명을 진압에 투입한 것으로 추산했다.

이스라엘 군은 난민촌에 통행금지령을 내렸고, 물과 식량 공급을 제한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팔레스타인 가정을 습격했고, 최루탄을 집 안에 쏘아 넣거나 헬리콥터로 투하했다.

하지만 그 어떤 탄압도 항쟁을 꺾지 못했다.

항쟁을 주도한 팔레스타인 청년들은 이스라엘 점령 치하에서 극도의 가혹함과 사회 파탄으로 점철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었다. 이제 그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었다.

1988년 1월 이스라엘 신문 〈예루살렘 포스트〉는 이렇게 썼다. “[이스라엘 국가가 직접 통치하지 않는] 가자 지구, 서안 지구, 동예루살렘 거리는 사실상 청년들이 통제하고 있다.

“우리 [이스라엘의] 스무 살 젊은이들이 저들[팔레스타인인들]의 스무 살 젊은이들에 맞서 싸우는 형국이다. 우리의 무기는 장갑차·헬리콥터·총이고, 저들의 무기는 막대기·돌·화염병이다.”

이집트·시리아·요르단 군대를 격파했던 막강한 이스라엘 군대도 평범한 사람들의 대중 저항을 통제할 수 없었다.

팔레스타인인 모두가 항쟁에서 저마다 한몫을 했다. 파업은 이스라엘 국가를 약화시키는 주요한 수단이었다.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점령지에서 농업을 파탄낸 후, 그 때문에 발생한 대량 실업자를 저임금 노동으로 부려먹었다.

가자·서안 지구에 사는 팔레스타인인 다수는 매일같이 이스라엘 국경을 넘나들며 최저임금을 받는 저질 일자리에서 일했다.

이제 그 팔레스타인 노동계급이 고유의 힘을 사용해 이스라엘에 반격을 가했다. 가자 지구와 서안 지구의 팔레스타인 노동자 대다수가 날짜를 정해 출근하지 않고 집에 머물렀고, 때로 몇 주 동안 그랬다.

팔레스타인 상점들도 항의의 뜻으로 문을 닫았다. 이스라엘은 상점을 열도록 압박했다.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상품 불매운동을 벌이고, 가능한 한 팔레스타인인이 만든 것만 사고팔았다.

통합전국봉기지도부라 불린 지역 활동가 위원회들의 네트워크가 모든 행동을 조율했다. 필 마셜은 이렇게 썼다. “1988년 중엽에 이르면 서안 지방의 가장 후미진 동네조차 운동에 동참했다.”

이 모든 행동이 효과가 있었음은 의심할 바 없다. 팔레스타인인들의 파업으로 건설, 섬유 등 이스라엘의 일부 산업 부문은 적잖은 타격을 입었다.

항쟁(과 이스라엘의 잔혹한 탄압) 사진들 때문에 전 세계에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투쟁에 대한 동조 여론이 형성됐다. 항쟁 진압 노력과 [진압 과정에서 치른] 대가 때문에, 이스라엘인들 중 몇몇도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 이대로 지속 가능할지 의문을 품게 됐다.

그러나 충분치는 못했다. 이스라엘 사회의 인종차별적 성격 때문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운송·제조업·금융·공공 등 핵심 산업 부문의 숙련 노동에서 배제돼 있었다.

필 마셜은 이렇게 지적했다. “점령지 출신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이스라엘 전체 노동 인구 중 11퍼센트를 차지했는데, ‘비천한’ 일자리에서 일했고 들판에서 계절 노동에 종사했다.”

그래서 팔레스타인인들의 파업이 일부 타격을 줬지만, [이스라엘에] 결정적 한 방을 먹일 수는 없었다. 더 중요한 점은, 팔레스타인인들의 파업으로는 미국이 이스라엘에 보내는 막대한 원조금의 털끝도 건드릴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 돈은 이스라엘이 중동에서 미국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대가로 미국이 이스라엘에 지불하는 것이다.

제국주의

1980년대에 미국은 이스라엘에 약 2850억 달러를 지불했는데, 그중 56퍼센트는 군대에 쓰였다.

제국주의와의 유착 관계는 이스라엘 건국과 존속에 필수적인 요소다. 팔레스타인에 처음 식민지 정착촌을 건설하려 한 유대인들은 아랍인들을 감시하는 대가로 영국 제국주의의 지원을 받고자 했다.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후 국가의 존속에 미국의 막대한 지원이 필수라고 봤다.

‘인티파다’ 항쟁 승리의 열쇠는 다른 중동 나라들에서의 저항을 얼마나 고무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었다.

아랍 지배자들은 ‘인티파다’ 지지를 선언했지만 자기 나라에서 대규모 연대 시위가 일어나는 것은 억눌렀다. 자신들에 대한 항쟁으로 번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인티파다’에서 영감을 받아 알제리에서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야당 지도자들은 시위대에 이렇게 호소했다. “단결해서 문제를 직접 해결합시다. 팔레스타인인들처럼 말입니다.”

이집트에서 일어난 ‘인티파다’ 연대 행동은, 이스라엘·미국에 대한 자국 정부의 긴밀한 협조를 비판하는 행동으로 눈 깜짝할 새에 발전했다.

이집트 북부의 대규모 섬유 공단 마할라의 노동자들은 ‘인티파다’ 항쟁 초기부터 시위에 동참했다. [노동자들이 내건] 이스라엘 규탄 구호는 이집트가 이스라엘·미국과 단교하라는 요구로 발전했다.

2011년에 아랍 혁명으로 쫓겨나게 되는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퇴진 요구도 그때 등장했다.

미국의 후원 하에 있던 아랍 정부들은 봉기가 팔레스타인을 넘어 확대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이런 두려움 때문에 마침내 미국이 이스라엘을 팔레스타인해방기구(팔레스타인의 공식 지도부, PLO)와의 평화회담 자리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파타가 이끄는 PLO는 팔레스타인 해방 운동이 아랍 전역을 휩쓰는 거대한 반란으로 번지지 않도록 적극 협조했다.

PLO는 1960~1970년대 내내 이스라엘을 상대로 영웅적인 게릴라 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PLO는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의 대중 저항을 주된 수단으로 여긴 적이 없었다. 그 대신 주변 아랍 정권들을 압박해 자신들의 요구를 달성하겠다는 전략을 추구했다.

PLO는 다른 아랍 국가들과 공조해 팔레스타인 국가 지위를 얻기를 바랐다. [그래서] PLO는 팔레스타인에서 시작된 저항이 다른 아랍 정부들에, 그리고 미국 제국주의 질서에 결코 도전하지 않도록 단속했다.

이는 아랍 국가들의 배신에 뒷문을 열어 두는 처사였고, 결국 팔레스타인인들은 1970년에 요르단에서, 1982년에 레바논에서 처절한 패배를 겪게 됐다.

그리고 이는 PLO 지도부가 대폭 양보할 태세가 돼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1989년에 PLO는 독립을 선언하고 가자·서안 지구를 영토로 하는 팔레스타인 국가를 선포했다. ‘인티파다’ 덕에 쇠퇴해 가던 PLO는 부흥했고, 파타는 저항 운동의 지도부로 재부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PLO의 국가 선포는 심각한 후퇴이기도 했다. 그전까지 PLO는 팔레스타인 땅이 자기 것이라는 이스라엘 국가의 주장을 조금도 인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과 아랍인이 평등하게 인정받는 하나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PLO가 가자·서안 지구만을 팔레스타인 국가라고 선포한 것은 PLO가 이스라엘 국가를 인정하고 팔레스타인 지방 중 일부만을 목표로 삼겠다고 수용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이는 1948년에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 난민들이 귀향할 권리를 사실상 포기하겠다는 뜻이었다.

1993년 오슬로 협정으로 인디파다는 끝을 맺었고 “평화 프로세스”가 시작됐다. “평화 프로세스”란 PLO가 무장 저항을 포기하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을 억누르는 데에 합의한다는 뜻이었다.

그 대가로 신생 팔레스타인 자치정부가 받은 것이라곤 먼 훗날 언젠가 이스라엘에서 독립해 작은 국가를 세울 수 있을 것이라는 애매한 약속뿐이었다.

이후 20년이 넘었지만 그 변변찮은 약속마저 실현될 기미가 없다.

그러나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은 ‘인티파다’ 항쟁의 교훈을 절대 잊지 않았다. 12월 7일 트럼프의 ‘예루살렘 선언’ 이후 평범한 팔레스타인인들은 다시 거리로 몰려 나왔고, 이스라엘 군대에 맞서 돌을 던지고 타이어를 태웠다.

중동 전역에 연대 시위가 다시 물결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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