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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도서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자존감 지키려면, 병든 사회를 변혁하려 싸워야 한다”

《가짜 자존감 권하는 사회》 김태형 지음 | 갈매나무 | 2018년 | 240쪽 | 14000원

《싸우는 심리학》, 《트라우마 한국사회》 등 수십 권의 심리학 저서로 잘 알려진 김태형의 신간이 출판됐다.

‘심리연구소 함께’ 김태형 소장은 오늘날 사람들이 겪는 심리적 고통의 원인을 개인의 내면에서 찾으려 하는 미국식 주류 심리학을 비판해 온 몇 안 되는 진보적 심리학자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그 속에 인간들이 맺는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에리히 프롬 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심리학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음을 강조하며 마르크스도 심리학 역사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자본주의적 심리학자다.

그래서 김태형의 책은 지난 10여 년 동안 대형 서점의 인문학 코너를 도배하다시피 한 심리학 관련 도서들 중에서도 단연 돋보인다. 최근 이 분야 으뜸 이슈는 ‘자존감’이다. 김태형은 오늘날 한국 사람들이 ‘자존감’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이 이해할 만한 현상이며 ‘자존감 찾기’가 확실히 중요한 문제라고 주장한다.

“주위 사람들에게 존중받는 사회에서 살고 있다면, ‘내가 나를 존중하고 있는가?’라는 문제는 그다지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 이웃과 경쟁을 해야만 생존 가능한 개인주의 사회에서 자존감은 엄청나게 중요해진다.”

무엇보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현실의 문제를 잘 헤쳐 나간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남의 비판과 조언을 열린 자세로 받아들이고, 누군가를 혐오하거나 배제하려 하지 않는다. 반면, 자존감이 낮은 사람들은 방어적이고 늘 누군가를 경계해 인간 관계에 어려움을 겪는다. 한 심리학자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날 자존감과 관계없는 심리적 문제는 거의 없다.

김태형은 자존감이 단순한 현실회피용 심리 조작이 아니라 삶을 지탱해 주는 소중한 ‘무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자존감이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끔찍한 고독을 방어하거나 견뎌 낼 수 있게 해 주는 일종의 자기방어 무기로서 각광을 받게 된 것이다.” 이 대목은 마르크스가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비유하면서 아편의 ‘치유’ 효과에도 주목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당시 아편은 효과적인 진통제로 사용됐다.)

김태형은 어린 시절의 경험이 한 사람의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는(많은 사람들이 이를 경험한다) 주류 심리학의 견해를 일부 수용하면서도, 그 변화 가능성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자존감은 어린 시절에 그 기초가 닦이고, 청소년기에는 기본적으로 확립되며, 청년기 이후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변화한다. 자존감에는 상당한 일관성과 공고성이 있어서 그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그러나 자존감은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하는 역동적인 것이기도 하다.”

반면 주류 심리학은 흔히 아동기의 경험으로 모든 문제를 환원하곤 한다. 예컨대 오늘날 주류 심리학 강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얘기는 “부모 탓하기”다. 그러나 “병든 사회를 그대로 놔둔 채 부모들만 비판해봤자 달라질 것은 거의 없다.”

“아이에게 총 쏘는 훈련을 시키지 말고 자유롭게 놀게 해주라는 교육을 받고 나서 문을 열고 나오니 다시 총탄이 빗발치는 전쟁터가 눈앞에 펼쳐져 있는 것이라고나 할까.”

자기존중

김태형은 오늘날 한국 사회가 과시와 우월, 지배와 통제, 계속적인 확인 등 가짜 자존감을 권하는 사회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가짜 자존감은 “일시적이고 불안정한 쾌감”을 줄 뿐 진짜 자존감을 확립하는 데는 도움이 안 된다. 이 점은 주류 심리학도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스크래치’가 난 자존감을 힐링(치유)하려 하는 주류 심리학도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오히려 문제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스스로에게 자신의 가치가 높다고 반복해서 말하거나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면서 칭찬하라고 조언한다. 효과가 있을까? 물론 없다. 자존감은 객관적인 자기개념과 평가를 토대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상담자나 고등학생인 아들과의 대화 등 풍부한 사례를 쉽게 설명한 뒤 저자가 제시하는 “진짜 자존감을 복원하기 위한 조건”은 이 책의 백미다.

그는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가치 기준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는 노력’이 중요하다고 지적한다. 그러려면 “자본주의에 대해서 정확히 이해”할 필요가 있고 “올바른 신념과 가치관을 치열하게 탐구하라”고 조언한다.

또, 단지 자존감의 기초를 복구하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어떤 집단에 수용되고 사랑받는 것과 존중받는 것은 분명히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사람은 사회가 자신을 받아들이고 사랑해 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자존감을 확립할 수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자신이 존중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확신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사회 관계, 즉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만 확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상담실 문을 열고 현실로 돌아갔는데 … 사람들한테 계속 무시당한다면, 그의 결심은 변함없이 유지될 수 있을까?”

저자는 먼저 건강한 사회 집단에 소속되는 것이 “결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병든 세상을 바꾸기 위해 직접 행동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누군가 나에게 계속 폭력을 휘둘러 자존감이 손상되고 있는데, 그에게 저항하지 않고 계속 학대당하는 상태에서 마음 수양을 한들 자존감이 회복될 리 없지 않은가.”

“나도 다른 심리학자들처럼 낙관론을 설파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과는 타협할 수 없다. 그렇게 하면 무엇보다 내 자존감부터 손상될 것임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근본적 변혁을 꿈꾸면서도 주류 심리학의 무기력한 대안에 불만을 느끼는 청년들과 ‘힐링’ 유행에 어딘지 모를 불편함을 느끼는 사회주의자들에게 일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