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겨울, 일부 근본적 페미니스트들이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를 주장하는 강연회(“여성 레즈비언 페미니스트를 말하다”)를 열었다. 최근 근본적 페미니즘 경향의 신생 출판사 ‘열다북스’가 영국 출신의 근본적 페미니스트 실라 제프리스의 글을 묶어 발간했다.[1] 트랜스젠더 배척 주장으로 악명 높기도 한 실라 제프리스는 일찍이 1970년대 말부터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를 주장해 왔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란 무엇인가?

우선, 레즈비언과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구별해야 한다. 레즈비언은 다양한 성적 지향 중 하나로 여성 동성애자를 의미한다. 이와 달리,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여성 차별에 ‘진정으로’ 반대하려면 자신의 성적 지향과 상관 없이 의식적으로 레즈비언이 돼야 한다는 정치적 경향이다. 즉, 남성과의 관계를 완전히 단절하고 오직 여성하고만 일체감을 갖고 살고 교제해야(성관계가 필수적이지는 않다고 한다) 여성해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1960년대 후반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부상한 근본적 페미니즘에 존재한 분리주의를 가장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결과물이었다. 1970년대 초 미국 사회를 뒤흔든 반란의 물결이 퇴조하자 좌파들의 정치적 혼란과 운동의 분열은 심각해졌다. 이런 분열과 사기 저하 속에서 분리주의적 페미니즘이 세를 얻기 시작했다.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가 아니라 모든 남성을 비난하고 사회의 변혁이 아니라 개인의 ‘해방’에 집중했다. 그 중 일부 근본적 페미니스트들은 더 나아가 “페미니즘은 이론이고, 레즈비어니즘은 실천이다”라고 선언하며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를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특히 1970년대 미국의 여성운동에서 눈에 띄지만,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났다. 1979년 9월 실라 제프리스가 주도적으로 활동한 영국의 리즈레볼루셔너리페미니스트그룹은 “적을 사랑하는가?: 이성애 페미니즘과 정치적 레즈비어니즘 간의 논쟁”이라는 소책자를 발표해 여성운동 내에서 큰 반발과 논쟁을 낳았다.

 모든 남성은 여성의 적인가?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근본적 페미니즘의 논리에 따라 모든 남성을 적으로 규정한다. 그러나 과연 모든 남성이 여성의 적일까? 그리고 남성과 완전히 분리하는 것이 여성 차별에 맞서는 효과적인 방법인가?

물론 현실에서 남성들이 여성차별 의식을 수용하거나, 차별적 언동을 하는 경우들이 존재한다.  그런 개별 남성들의 태도가 잘못됐음을 지적하고 반대해야 하는 것도 옳다.

그러나 여성 차별의 원인은 남성의 지배욕이나 음모가 아니라 계급사회의 산물이다. 인류 역사의 대부분을 차지한 무계급 사회에서 여성은 체계적인 차별을 받지 않았고 남성과 평등했다. 인류학과 고고학 분야에서 이뤄진 많은 연구들이 이 점을 보여 준다.
자본주의에서 여성 차별은 노동력 재생산 단위로서 가족의 구실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지배계급은 개별 가족에게 양육과 가사를 떠넘김으로써 매우 싼 값에 노동력을 공급받을 수 있다. 국가는 양육과 가사가 여성 본연의 일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퍼뜨려 공공보육을 대폭 확충하는 것을 피하며 기업주들의 부담을 줄여준다. 기업들은 임금, 승진 등에서 여성을 체계적으로 차별하는 것을 통해 더 많은 이윤을 얻는다.

이렇게 지배계급은 가족제도를 보호하고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고자 여성 차별 이데올로기를 퍼뜨리며 성차별을 계속 부추긴다. 바로 이런 사회에서 자라난 평범한 남성들과 (심지어) 여성들도 성차별적 생각을 이러저러하게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노동계급 남성들은 이런 여성 차별적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권력을 가진 ‘적’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노동계급 남성들은 개별 가정에 떠맡겨진 양육이나 노인 부양의 과중한 비용 때문에 노동계급 여성과 함께 허덕이고 있다. 여성의 저임금은 함께 사는 노동계급 남성에게 결코 이롭지 않으며 노동계급 전체에 임금 하락의 압력을 가한다는 점에서 도리어 손해다. 이런 점에서 노동계급 남성은 여성 차별 유지에 객관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노동계급 남성은 지배계급에 맞서 더 많은 임금과 공공보육 등을 요구하며 대다수 여성들과 단결해 싸울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

따라서 계급을 무시한 채 모든 남성을 적으로 여기는 주장은 여성해방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해방을 가로막는 사상이다.

 엘리트주의

정치적 레즈비언주의자들이 남성 전반을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돌리자, 남성을 사랑하는 이성애자 여성을 비난하게 된 건 자연스러운 논리적 귀결이었다. 앞서 말한 실라 제프리스가 활동한 리즈레볼루셔너리페미니스트그룹은 “남자와 함께 살거나 섹스하는 모든 여성은 자매들에 대한 억압을 유지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며 우리의 투쟁을 방해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개인의 성적 지향을 무시하고 이성애자 여성에게 이성애를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섹슈얼리티의 자기 결정권을 무시하는 것이다. 우파들이 동성애자에게 ‘탈(脫)동성애하라’고 요구하는 것과 비슷하게 황당하다.

이성애를 마치 남성 집단의 음모의 산물인 양 보는 것도 다수 여성들의 경험과 동떨어진 것이다. 이성애자 여성들이 사랑이라는 남성들의 ‘달콤한 꾐’에 넘어간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라고 보는 엘리트주의적 시각이 깔려 있다.

자연히 정치적 레즈비언주의자들은 이성애 관계보다 여성 동성애 관계가 더 우월하다고 본다. 이성애관계는 지배와 종속의 관계인 반면 여성 동성애 관계는 평등하고 우애로운 관계라는 것이다.

이처럼 정치적 레즈비언주의자들은 여성 동성애를 이상화·신비화하면서 레즈비언이야말로 여성해방운동의 핵심이라고 여기곤 했다. 레즈비언 작가 리타 메이 브라운은 1975년 한 논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육체적 사랑까지도 포함해 다른 여성을 사랑할 수 없다면 어떻게 여성 해방에 관심 있다고 진심으로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여성 동성애를 성적 지향이 아니라 정치적 ‘선택’으로 규정한 주장은 레즈비언들 내에서도 반발을 샀다. 다수의 여성 동성애자들은 남성과 의식적으로 분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성적 지향을 나타내는 의미로서 자신을 레즈비언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남성과 완전히 단절할 태세가 된 여성만이 여성해방에 진지하다고 보는 지독한 엘리트주의를 깔고 있었다. 그래서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레즈비언 사이에서도 결코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분열주의

정치적 레즈비언주의 페미니스트들의 이성애 공격은, 여성 해방을 가져오긴커녕 여성 차별에 진지하게 반대하는 많은 이성애자들을 여성 운동에서 멀어지게 만들었다. 1970년대 미국의 여성운동에서는 정체성 정치가 득세하면서 곳곳에서 분열이 일어났는데, 이성애자 여성과 정치적 레즈비언 사이의 갈등도 그 중 하나였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이성애를 비난하면서 기혼 여성의 단체 가입을 제한했다. 아들이 있는 여성에게는 아들을 포기하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런 독단주의적인 태도는 여성 차별에 진지하게 반대하는 많은 이성애자들이 여성운동과 멀어지게 만들었다.

1982년 영국의 페미니스트 안나 쿠트와 비어트릭스 캠벨은 1970년대에 있었던 정치적 레즈비언 페미니스트와 이성애자 페미니스트 사이의 분열을 돌아보며 “[얼마나 많은 여성들이] 이성애를 찬성하는지 반대하는지 여부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던 여성해방운동의 정치에 참여할 수 없다고 느꼈던가!” 하고 개탄했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자들은 이성애자 여성뿐 아니라 남성과 동침하는 양성애자 여성도 ‘박쥐’ 같은 존재라며 비난했고, 게이들과 어울리고 바에 가는 레즈비언들도 비난했다. 그런 레즈비언들은 “남성 정체화 됐다”고 비난받았다.

개인의 성적 지향이나 라이프 스타일(결혼 등)을 운동의 조건으로 내거는 것은 여성 차별적 현실에 맞선 광범한 운동을 건설하는 것을 방해하고, 운동과 조직을 파괴하는 효과를 냈다.

이런 분열주의는 오늘날 국내의 정치적 레즈비언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남성 동성애자를 처벌하는 군형법 92조6 폐지를 지지하는 여성단체들을 게이에 동조한다며 비난하는 것과도 닮았다.

그러나 동성애 차별은 여성 차별과 동일한 뿌리를 공유한다. 지배계급은 노동력 재생산을 위해 가족제도를 유지하려 하고 이를 위해 여성 차별과 동성애 차별도 부추긴다. 따라서 여성해방이 동성애자 해방과 별개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

여성 차별과 동성애 차별을 유지하는 것이 자본주의 지배계급이라는 점에서 우리는 이들에 맞서 저항해야 한다. 지배계급은 차별 받는 사람들을 서로 이간질하고 각개격파 한다. 이런 이간질에 반대하면서 지배계급에 맞서 단결을 추구하는 것이 차별 받는 사람들의 운동에서 핵심적으로 중요한 요소다.

 분리주의는 노동계급 여성의 대안이 될 수 없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자들은 남성과 완전히 분리된 여성 공동체라는 공상적 대안을 추구했다. 그러나 소규모 집단에나 가능한 이런 시도는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를 전혀 바꾸지 못했고 그런 시도조차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1970년대 미국에서 분리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세운 소규모 여성 공동체는 생겨났다가 몇 년이 못 가 사라졌다.

남성과 완전히 분리된 여성 공동체를 만든다는 발상은 노동계급 여성들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이었다. 노동계급 여성들은 작업장에서 동료 남성들과 부대끼며 살아야 했고, 자신의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서는 동료 남성 노동자들과 단결해야 성과를 낼 수 있었다.

결국 정치적 레즈비언주의의 계급적 기반은 여성 공동체를 감당할 수 있는 재력과 시간적 여유가 되는 극소수 중간계급 여성들이었음이 드러났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는 여성해방은커녕 대다수 여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도 무기력했다.

노동계급 여성들은 남성과의 분리가 아니라 오히려 남성과 단결된 투쟁 속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 역사를 보면, 노동계급 여성들은 노동계급 남성과 함께 저항에 나섰을 때 지배계급에게 더 큰 압력을 가해 양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노동계급의 여성과 남성이 단결해 투쟁하는 것은 또한 평등 의식을 고취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노동계급은 이런 단결된 투쟁을 통해서만 자본주의 사회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힘을 자각하며 의식과 조직을 발전시킬 수 있다. 여성의 대다수가 노동계급이기에 여성해방은 이런 노동계급의 해방과 별개의 과정일 수 없다. 정치적 레즈비언주의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여성해방론이 차별받는 여성들에게 운동의 방향을 제시할 수 있다.

참고자료

토니 클리프, 《여성해방과 혁명》, 책갈피, 2008.

샤론 스미스, 《정체성 정치는 해방의 수단인가》, 다함께, 2005.

주디스 오어,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책갈피, 2016.



[1] 《래디컬 페미니즘 — 성별 계급제를 꿰뚫는 시선》

📱 스마트폰 앱으로 〈노동자 연대〉를 만나 보세요! 안드로이드 앱 다운로드 아이폰 앱 다운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