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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콰도르의 대중 반란

지난 4월 21일 구티에레스 대통령이 헬기를 타고 대통령궁을 탈출했을 때, 에콰도르는 2000년에 이어 다시 한 번 라틴아메리카 투쟁의 중심지가 됐다.

에콰도르에서는 외채 원리금 지급에 정부 예산의 40퍼센트가 사용되고, 국민의 65퍼센트가 빈곤선 이하의 삶을 살고 있다. 2002년 구티에레스는 2000년 투쟁을 주도한 코나이에(CONAIE) 등 원주민 단체와 좌파의 지지를 받으며 대통령에 당선했다.
그러나 구티에레스는 사유화를 추구하고, 노동악법을 통과시켰다. 그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지지하고 콜롬비아 좌파 게릴라를 상대로 한 ‘플랜 콜롬비아’에 참가했다. 이런 우경화 때문에 2003년 8월 코나이에는 구티에레스 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구티에레스는 왼쪽 지지 기반이 이반할수록 더욱 우파 동맹자를 찾았고, 1997년 파나마로 쫓겨난 전직 대통령 부카렘이 이끄는 신자유주의적 로돌시스타당이 동맹자가 됐다.

구티에레스는 과반 의석을 이용해 우파 야당인 기독사회당 지지 대법관들을 교체했고, 부카렘의 동맹자를 대법원장에 임명했다.

새 대법원은 부카렘과 부패 혐의로 쫓겨난 다른 지배자들의 혐의를 취하해 줬다. 덕분에 구티에레스의 지지율은 2005년 초 5퍼센트로 떨어졌다. 2005년 3월 말 부카렘이 망명지에서 에콰도르로 돌아올 수 있도록 구티에레스가 지원하자 대중의 분노가 폭발했다.

처음 시위를 조직한 것은 중도좌파 야당인 민주좌파와 일부 우파 정당의 연합체였다. 하지만 이들의 시위에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참가했다.

그러나 과잉 진압에 분노한 학생들이 참가하면서 대열이 급격히 불어났다. 그 뒤 2주 동안 시위 참가자는 일부 대학생과 중간계급을 넘어 노동자들과 도시 빈민들로 확대됐다.

구티에레스는 자기 지지자들을 동원하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대중은 “루시오[구티에레스]는 사임하라. [다른 정치 지도자들도] 모두 물러나라”고 외쳤다.

우파들은 이 운동을 단순히 대법원을 둘러싼 문제로 한정시키려 노력했다. 사실, 과이킬에서는 우파 기독사회당 시장이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우파는 의회에 출입할 수도 없어서 다른 장소에서 탄핵을 진행해야 할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대중이 내놓은 요구는 플랜 콜롬비아 참가 중단, 노동유연화 중단, 사유화 중단 등 우파들의 의제에 반대하는 것이었다. 또, 일부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을 점거한 채 ‘민중의회’의 설립을 요구하는 등 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대중 운동에는 일관된 방향을 제시할 정치세력이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의 자율주의자들은 이것을 찬양하고 있다. 아쉽게도 2000년 저항에서 중요한 구실을 한 코나이에는 처음 구티에레스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조직했다가 번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2003년 구티에레스와 결별한 뒤 코나이에는 정치적 혼란을 겪어 왔다.

후임 대통령 팔라시오 전 부통령은 대중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좌파 인사를 경제장관에 임명하고 부카렘 체포 명령을 내리는 등의 제스처를 취하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국내외 지배계급들의 우려를 의식해 일찌감치 “외국 자본의 투자를 환영한다”는 성명을 내놓았다.

팔라시오 정부와 우파는 대중의 요구 가운데 “모두 물러나라”는 것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설사 당장 ‘안정’이 찾아온다 하더라도 에콰도르 지배자들이 주요 개혁을 가져다 줄 수 없는 한 대중의 분노는 다시 한 번 폭발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