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은 스스로 해방돼야 한다. 조셉 추나라는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노동계급 자력해방 사상은 많은 노력 끝에 성취된 것이자, 급진 정치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기여에 속한다며 우리가 그 사상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의 말은 〈노동자 연대〉 편집부가, [  ― 추나라]는 필자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삽입한 것이다.


1999년 시애틀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정상회담이 최루가스로 뒤덮인 채 중단되면서, 세계적인 반자본주의 운동이 탄생했다. 가장 유능한 사회주의 좌파 활동가들은 이 운동에 참여하려 애썼으며, 동시에 사회주의자들이 운동에 기여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당시 나는 ‘마르크스: 최초의 반자본주의자’라는 제목의 연속 강의에 발제를 요청받았다. 이 아이디어는 칭찬할 만하다. 하지만 굳이 까탈스럽게 잔소리를 하자면, 마르크스를 각종 수식어로 그를 묘사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최초의 반자본주의자라고 할 순 없다. 마르크스 훨씬 이전에 생시몽, 샤를 푸리에, 로버트 오언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도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증오를 표출했다. 최초로 노동계급에 주목한 위대한 이론가들인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보기에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상상력을 동원해 이상 사회의 모자이크”를 만들려 했던 사람들이다(엥겔스의 표현).

마르크스가 계급 투쟁을 발견했다고 볼 수도 없다. 여러 사상가들이 (비록 자본주의 전복을 지지하지는 않았더라도) 계급 투쟁 개념을 먼저 발견했다. 1848년 혁명으로 붕괴되기 전까지 프랑스 총리였던 프랑수아 기조는 계급들 간의 투쟁을 중심으로 역사서를 쓴 인물이다. 그는 부르주아지의 전신인 도시계급 부르거(시민)의 성장, 부르거가 봉건 지배계급과 벌인 충돌,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프랑스 대혁명으로 나아갔는지를 추적했다. 그는 이런 충돌이야말로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주장했다.

이미 1845년에 마르크스는 노동계급과 노동계급의 투쟁에 대한 독창적 이해를 발전시키고 있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의 독특한 혁명적 잠재력을 인지하고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제시했다. 이는 세상에 없던 것을 새롭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아메리카 대륙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다고 할 때 말하는 그 “발견”과 더 유사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계급의 스승이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 자신이 먼저 계급 투쟁에서 배워야 했다.

마르크스가 정치 문제에 처음으로 관여한 것은 1830년대 말~1840년대 초 철학도일 때였다. 철학자 게오르크 헤겔의 추종자 몇몇(청년 헤겔주의자로 불렸다)은 헤겔 저술에서 급진적 결론을 이끌어 냈다. 헤겔의 철학 체계는 복잡하고, 그 의미를 둘러싸고 초기부터 논쟁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 핵심에는 헤겔이 다음과 같이 표현한 사상이 있었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합리적이고, 모든 합리적인 것은 실재한다.” 이는 보수적으로도 급진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당시 독일 지역에 매우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억압적인 프로이센 국가와 관료제를 합리적인 것이라 뒷받침하는 논리가 될 수 있었다. 이와 정반대로 봉건제 정치 구조를 산산조각 내고 유럽 전체에 자유주의 사상을 확산시킨 프랑스 대혁명의 급진적 충격파를 합리적인 것이라 볼 수도 있었다.

한 시대에는 합리적으로 보였던 체제도, 그 합리성이 일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으로 드러나고 시대가 바뀌면 전복될 수 있다. 이를 두고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러나 바로 그 안에 헤겔 철학의 진정한 의미와 혁명적 성격이 담겨 있다. 인간의 사상과 행동이 완성될 수 있다는 생각에 최종적이고도 결정적으로 사망 선고를 내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헤겔은 겉으로는 일관된 듯 보이는 체계에 내포된 모순을 변화의 원동력으로 봤다.

헤겔 사상은 독일의 보수성과 후진성에 진절머리를 내던 급진적 지식인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통일된 국가도 없었고, 영국 같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규모로 산업 자본주의가 발전돼 있지도 못했다. 많은 청년 헤겔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급진성을 따라 민주주의 운동으로 빨려 들어갔고 그 안에서 다양한 정치적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842년 마르크스는 프로이센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민주주의 사상을 펼치던 신문 〈라이니셰 차이퉁〉에서 기자로 일하기 시작했다. 훗날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842~1843년 나는 이른바 물질적 이해관계를 놓고 논쟁을 벌여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했다.” 이런 경험을 거치며 마르크스는 정치 논쟁이 사회적 갈등을 품고 있다는 것을 점차 인식하게 됐다. 마르크스는 도벌법, 밀렵이나 토지 분배와 관련된 법률 등의 문제를 다루는 연재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마르크스는 그 논쟁들마다 “각 계급의 고유한 관점”에 따라 입장이 갈리고 있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그때쯤 〈라이니셰 차이퉁〉은 급진적 기사 내용 때문에 정부의 예의 주시 대상이 됐다. 경쟁 신문사는 〈라이니셰 차이퉁〉이 공산주의 사상을 은근히 부추긴다고 비난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반박했다. “〈라이니셰 차이퉁〉은 공산주의 사상의 현 방식이 실현되는 것을 바라기는커녕 그 이론적 타당성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라이니셰 차이퉁〉과 편집자[마르크스]는 위험한 극단주의자로 여겨졌고 더는 활동이 허락되지 않았다. 프로이센의 검열 탓에 마르크스는 파리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훨씬 더 발전된 사회주의 운동을 접했다. 마르크스는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독일 망명자들의 모임에 열정적으로 참가했다.

마르크스 사상의 변화는 1843년에서 1844년 초에 쓴 여러 저술에서 나타난다. 마르크스는 혁명을 지지하고 독일 투쟁에서 노동자들이 핵심이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그는 노동계급의 비참함을 강조했고, 가장 비참한 노동자 대중이 철학이라는 지적 무기와 만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독일 해방의 실질적 가능성은 어디에 있나? 우리는 이렇게 답한다. 철저하게 사슬에 묶여 있는 계급이 형성되고 이 계급이 겪는 고통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이 계급은 보편성을 띤다. 이 해방의 머리는 철학이며, 심장은 프롤레타리아트이다.”

그러나 이후 몇 년 동안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핵심 사상인 ‘노동계급의 자력해방’이 확고해지기 시작한다. 기존의 사회주의 문헌은 마르크스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마르크스 사상의 발전 과정을 탁월하게 연구한 《카를 마르크스의 혁명 이론》의 저자 핼 드레이퍼는 이렇게 지적했다. “그때까지 알려진 초창기 사회주의자들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위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대중이 미성숙하더라도 다소 자비로운 선각자가 대중을 위해 ‘봉사하며’ 새로운 체제를 구축한다는 것이다.”

1844년 독일 슐레지엔 직공 투쟁에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이 사회 변혁의 주체임을 배우게 됐다 ⓒWikimedia

마르크스는 노동자 운동에서 배워야 했다. 중요한 사건은 1844년 6월 독일 슐레지엔 직공들의 반란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임금을 깎는 기계를 부쉈다. 섬유 상인 본부로 행진하는 비무장 군중 3000명을 제압하고자 군대가 투입됐다. 노동자 11명이 총에 맞아 죽었고, 24명이 치명상을 입었다. 처음에는 노동자들이 저항해 군인들을 물리쳤지만 다음날 보병, 포병, 기병대가 동원돼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전까지 마르크스의 급진적 동료였던 아르놀트 루게는 노동자를 무시하는 기사를 게재했다. “허약한 직공들을 처리하는 데는 몇 안 되는 군대만으로 충분했다.” 그에 반해 마르크스는 즉각 노동자들을 옹호했고, 독일 노동자들이 투쟁과 이론적 진보를 성취한 것을 찬양하며 민주주의 운동의 무력함과 대비시켰다.

이때 마르크스는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자력 활동을 강조했다. “철학자들은 사회주의 안에서만 자신에 걸맞은 활동을 찾을 수 있고 따라서 철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 안에서만 해방의 능동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이제 마르크스는 자신을 공산주의자라고 밝혔고, 자신이 노동자 운동에서 발견한 것을 이해하고자 고군분투했다. 1844년 《경제학·철학 수고》에는 마르크스의 옛 사고 방식이 새 사상과 결합된 채로 담겨 있다. “사유재산 사상을 대체하는 데서는 공산주의 사상으로 충분하지만 현실의 사유재산을 대체하려면 진정한 공산주의 활동이 필요하다. 프랑스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모이면 인류애는 무의미한 문구가 아닌 현실이 되며, 그들의 고된 몸에서 인간의 고결함이 빛을 발해 우리를 비춘다.”

마르크스는 여전히 노동자들을 피해자로 여겼지만 동시에 궁핍에 맞서 투쟁하도록 내몰리는 집단으로도 봤다.

마르크스가 노동자 투쟁을 지지한 것과 더불어 둘째 결정적 요인은 1844년 8월부터 이어진 엥겔스와의 우정이었다. 당시 엥겔스는 섬유공장 사장인 아버지가 피터 에르만 회사와 동업을 맺은 맨체스터에서 일을 돕다 갓 복귀한 때였다.

엥겔스도 마르크스처럼 헤겔과 민주주의 운동에 정통했지만, 엥겔스는 마르크스보다 산업 자본주의의 실상에 좀더 밝았다. 엥겔스는 맨체스터에 있는 동안 차티스트 모임에 참석하면서 지역 지도부의 일원인 제임스 리치와 가까워졌다. 리치를 통해서 노동계급 신문 〈북극성〉에 활력을 불어넣은 조지 줄리안 하니를 만났다. 〈북극성〉은 절정기에는 발행 부수가 수만 부에 달한 신문이었다. 또한 엥겔스는 런던을 방문해 급진적 독일 망명자들의 비밀 결사인 의인동맹 회원들을 만나기도 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최초 합작품은 《신성 가족》이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신성 가족》에서 과거 동료 철학자들의 노동자 무시 태도를 정조준했다. “[청년 헤겔주의자들의 저술인 — 추나라] 《비판적 비판》은 모든 악이 노동자들의 ‘생각’에 있다고 본다. 하지만 맨체스터나 [프랑스] 리옹 등지의 작업장에 고용된 공산주의 노동자 대중은 ‘순수한 사상’으로 공장주들을 설득할 수 있다거나 열악한 처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다른 말로 해서, “프롤레타리아트는 스스로 해방될 수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 이 단계에 도달했을 때 마르크스는 파리 정부의 눈에 띄게 됐다. 《신성 가족》이 채 빛을 보기 전에 마르크스는 프랑스에서 추방돼 [벨기에] 브뤼셀로 이주했다.

이곳에서 두 혁명가는 미출판 원고인 《독일 이데올로기》를 집필했다. 이 저서는 노동계급의 실제 투쟁과 밀접하게 결합된 공산주의 전망을 제시했다. “사회에서 축출됐고 다른 모든 계급들에게 가장 큰 적대감을 갖는 계급이 등장한다. 이 계급은 사회 구성원 다수를 차지하며, 그로부터 근본적 혁명이 필요하다는 의식, 즉 공산주의 의식을 발하는 계급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물론 이런 의식은 이 계급의 상황을 고찰하는 다른 계급들 안에서도 등장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브뤼셀에 있는 동안 정확히 이러한 관점에 따라 행동했고, 공산주의 통신 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기구는 이후 마르크스가 노동계급 자력해방 원칙을 구현하며 결성할 여러 정치 조직의 초기 형태였다.

노동계급 자력해방 원칙이 그들에게 어찌나 핵심적이었는지, 두 혁명가는 20년 후 국제노동자협회의 설립을 도우며 그 규약 첫머리에 이를 새겨 넣었다.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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