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국의 평범한 은행원이다. 금융기관 종사자 수는 1997년 31만 명에서 2001년 14만 명으로 줄었고, 현재도 계속 줄어들고 있다. 핀테크, 인터넷전문은행 등의 급속한 발전으로 향후 10년간 가장 빨리 줄어들 일자리가 은행원이라고 한다. 1997년 IMF 때가 아닌 바로 이 순간에도 선배들과 후배들이 구조조정, 전직 제도라는 미명 아래 소중한 직장을 그만두고 있다. 일선 지점에서는 치열하게 영업을 하며 신규 고객 창출과 비이자이익 확보를 위해 노력하지만, 잘 살려고 발버둥 칠수록, 시간외수당 없이 늘어나는 야근에 시달리고 작은 부속품쯤으로 소모돼 가는 나를 감싸고 있는 노동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졌다.

20대에 처음 은행에 입사했을 때, 이런 불합리한 노사 관계와 노동환경을 개선해 줄 곳은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노동조합 선거가 있을 때마다 가장 강력한 목소리로 우리를 대변해 줄 곳을 지지했고 실제로 그 선거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하지만 3년마다 돌아오는 것은 실망감뿐이었다. 한국의 은행 노동조합은 그들만의 이해관계로 복잡하게 얽혀서 이미 공고화된 파벌 조직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 조직은 공식적 조직의 기본 조건인 회칙·회비·회원 관련 강령도 제대로 없었다. 간부들은 오랫동안 묵시적 관계를 유지하며 견고한 위계질서를 만들었고, 선거 때만 되면 야합하고 분열하기를 거듭했다.

노사 간 협상 결과 발표를 겸한 대의원 회의에서 투쟁 보고랍시고 발언하는 내용을 평범한 조합원의 입장에서 들어 보면, 노동의 숭고한 가치나 가열찬 투쟁, 노동의 해방구 같은 선동적 단어들은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가 솟아오르는 감정을 느끼게 했지만, 실상은 언어유희에 지나지 않는 쇼임이 매번 분명했다. 위원장과 담당 간부들은 당선하자마자 철저하게 선거의 개국공신이나 챙기고, (본인의 조직를 유지하려고) 인사부와 영합해 일부의 이동·승진을 좌우할 권한까지 부여받았다. 하지만 전체 조합원의 이익은 방치했다. 그들의 최우선 과제는 오직 다음 선거 당선과 조직 확대를 위한 준비다.

보통 영업 현장의 말단 직원들은 리테일(소매) 영업을 위한 카드, 청약저축, 펀드, 방카슈랑스 판매와 단기 수익 성과 달성을 위한 ELS,  ELT  판매, 퇴직 시장 선점을 위한 IRP 판매, 심지어 정부의 부동산 시장 금융정책을 보조하기 위한 기금 대출 업무까지 도맡아 한다. 정말 몸이 100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게다가 금융시장의 판도 변화를 예상해 오프라인 시장이 온라인 시장으로 바뀔 상황에 대비한 (터미널 구축 차원의) 새로운 앱을 고객의 핸드폰에 설치하는 영업 드라이브로 몸과 마음은 모두 만신창이가 돼 왔다. 그래서 새로운 노조가 들어서면 이제 무분별한 프로모션과 끝도 없이 자행돼 온 지옥 같은 실적 경쟁에서 해방될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품지만, 그 기대감은 늘 실망으로 돌아오고는 했다.

더욱이 은행은 겉으로 드러나든 그러지 않든 간에 정규직·비정규직 차별 문제를 모두 안고 있다. 겉으로는 정규직화돼 있지만 승진, 성과 보상, 업무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차별을 주는 예는 흔하며, 때로는 대놓고 비정규직화해 눈에 보이는 차별을 가하기도 한다. 이는 노동자 간의 대립과 반목으로 이어져, 노동조합의 조직력을 약화하고 사측에만 유리한 카드로 쓰여 왔다. 이것은 비단 한 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노동계 전체의 근본적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이를 고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허울 좋고 무늬만 정규직인 문제에 대해 나는 김하영의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을 읽으며 그 잘못된 출발점을 알게 됐다. 이 문제는 1998년 IMF 시절 당시 김대중 대통령 집권 때부터 시작됐다. 즉, 당시 금융 위기 해법의 일환으로, 아니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한국에 구제금융을 지원한 IMF가 한국 경제 전체에 구조조정을 요구한 결과로, 산업 합리화와 기업의 비업무용 자산 매각 등의 조치를 강요한 것이다. 그리고 비정규직 체제는 노동 유연화 차원에서 대량 감원과 쉬운 해고, 저임금 유지를 가능하게 할 요량으로 시작된 기형적 고용 체제임을 알게 됐다. 한국의 노동시장이 너무 견고하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비정규직은 정규직과 같이 일하는 동료다. 이 동료들은 하는 업무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노동 자체와 성과 보상에 차별을 둬선 안 되는 존재다. 현재 각 은행의 직군 문제를 한 번에 풀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차별 문제는 반드시 극복해야 한다. 시작은 비록 미비할 수 있지만 차별이 있는 부분에 맞서 하나씩 장벽을 허물어 나가야 한다. 정규직이 비정규직 차별 문제에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 김하영 지음,책갈피,456쪽,16,000원

무엇보다 김하영의 《오늘날 한국의 노동계급》은 (앞서 말했듯) 왜 노동조합 고위 상근지도부가 조합원의 이익이 아닌 선거 승리와 조직 유지에 사활을 걸며, 투쟁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지, 왜 상급 기관인 한국노총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만 힘쓰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청년들이여! 자격증 공부도 좋지만 이 책도 읽어 보라. 내 앞의 지엽적 현상에 매몰돼 막연한 불안만 느끼지 말고, 저자가 한국의 노동계급에 대해 깊게 연구한 것을 흡수하고 전체적 시야에서 불합리한 현실을 바라보라. 그러면 우리는 아는 만큼 더 볼 수 있게 될 것이고, 더는 노동조합 안에서 잘못된 방향을 보고만 있는 게 아니라, 이론으로 무장해 치열하게 비판하고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까칠한 조합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까칠한 조합원이 많아질수록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두려워하고 존중하며 선거 공약도 지켜 갈 것이다. 노동계급의 힘은 단결력에 있고, 그 단결력을 바탕으로 한 단체교섭권으로 노동조합은 사측의 부당한 대우에 목소리를 낼 수 있다. 앞으로 은행을 이끌어 갈 젊은 조합원들은 기존의 무지의 껍질을 깨고 끊임없이 매의 눈으로 노동조합 관료주의를 감시해야 한다. 만약 이들이 ‘제대로 된’ 투쟁을 이끈다면 곰처럼 우직하게 지지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것만이 우리가 노동조합의 체질을 건강하게 바꾸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