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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엔 성소수자 인권 권고 모두 무시한 문재인 정부

3월 15일 문재인 정부가 유엔인권이사회의 ‘국가별 정례 인권 검토(UPR)’가 내린 성소수자 권리 관련 권고 22가지를 모두 “불수용”했다. 이로써 정부는 또다시 성소수자 차별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다.

정부는 차별금지법 제정과 관련한 권고들에 대해 “차별 금지 사유에 대한 논란”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고 답했다. 애초 차별금지법은 2007년 노무현 정부가 추진했고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자신의 공약이었다. 문재인은 개신교 우익 세력의 집요한 반대에 압력을 받아 지난해 대선에서는 입장을 바꿔 차별금지법을 반대했다. 결국 “사회적 합의”는 문재인 정부가 우익의 눈치를 보며 후퇴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명분 구실을 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차별금지법 제정촉구대회’ ⓒ이미진

정부는 동성애를 범죄시하는 악법인 군형법 92조의6 폐지 권고 수용도 거부했다. 현재 그 법이 헌법재판소에 계류 중이므로 “사법부의 최종 판결을 준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난해 국감에서 문재인 정부의 국방부장관 송영무는 이 조항을 유지하겠다는 입장을 이미 표명했다. 그래 놓고 지금 사법부 핑계를 대는 것이다.

정부는 ‘전환 치료’ 금지 권고에 대해선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므로 금지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러나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적 지향의 하나인 동성애를 ‘고치겠다’는 ‘전환 치료’의 실태는 동성애자에 대한 폭행, 감금, 심지어 ‘교정 강간’ 같은 끔찍한 폭력이 수반되는 범죄다. 국가가 규제해야 마땅하다.

성소수자에 대한 문재인 정부와 민주당의 냉담한 태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십 년 동안 이들은 성소수자 권리 문제에서 후퇴해 왔다. 2007년부터 기독교 우파들이 동성애 쟁점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자, 우파 눈치를 보며 타협해 왔다. 차별금지법에 대한 태도 변화가 대표적이다.

특히 선거 때마다 민주당 인사들은 개신교 우파 세력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성소수자 권리를 제물로 삼아 왔다.

민주당 내 개혁파인 박원순이 최근 서울시장 3선에 도전하면서 한 인터뷰에서 동성혼 반대 입장을 표명한 것은 최근 사례일 뿐이다. 박원순은 2014년에는 “한국이 [아시아에서 동성혼이 합법화되는] 첫 번째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는데 그보다 후퇴한 것이다.

지난 2월 여가부 장관 정현백도 ‘성평등’ 용어를 버리고 보수 기독교 단체에 가서 ‘성평등 용어는 동성애 옹호가 아닌 단순 번역어일 뿐’이라고 우파를 달래고 왔다.

문재인 정부 내 개혁파들의 “차별 반대”가 얼마나 일관성 없고 보잘것없는지 알 수 있다.

문재인 정부와의 “협업”이 성소수자 차별을 없앨 수 있는가?

‘성소수자 차별 반대 무지개행동’(이하 무지개행동)은 성명을 내고 정부의 입장이 “실망스럽”고 “문제적”이라고 옳게 규탄했다.

그런데 무지개행동은 같은 성명에서 “[정부가] 성소수자 인권에 대해 부끄러운 입장을 더 이상 반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 앞으로도 적극적으로 [정부와] 협업할 의지가 있다”고도 말했다. 문재인 정부의 이런 태도가 성소수자 인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하기도 한다며, 정부가 잘 모르면 성소수자 단체들이 가르쳐 주겠다고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냉담한 태도엔 “무지”보다 더 근원적 이유들이 존재한다. 성소수자 차별은 자본주의에서 값싸고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이성애 중심의 가족제도와 관련이 깊다. 문재인 정부 역시 지배계급의 일부로서 이런 가족제도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가 있고 보수적 성관념을 유포해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며 통제하려 한다.

문재인 정부 내 일부 자유주의자들의 언사는 보수파들과 약간 다르지만, 성소수자 차별을 없애라는 압력이 대중적으로 가해지지 않는 한 그들은 차별을 완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이들은 말로만 차별 반대를 얘기하거나 모순적인 얘기(“동성애 차별에는 반대하지만 동성혼은 안 된다” 따위)를 하며 오히려 성소수자 차별을 부추기는 데 일조해 왔다.

이런 문재인 정부와의 “협업”을 말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가 개혁적 언사를 하면서도 실제로는 성소수자 차별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을 가린다. 따라서 독립적인 투쟁보다 정부 관료나 의원들과의 면담이 중시되기 십상이다.

이는 정부에 대한 비판의 날을 무디게 하고 아래로부터 투쟁을 제대로 벌이지 못하도록 만든다. 무지개행동이 2월 28일 여가부와 면담한 뒤 여가부의 변명을 고스란히 옮기는 면담 보고를 내놓은 것이 이런 약점을 힐끗 보여 줬다.

정부와의 협업을 강조하는 운동은 중간계급이 주도하는 엘리트주의적이고 온건한 운동이 될 수밖에 없다. 노동계급에 속하는 평범한 성소수자의 참여를 독려하기보다 변호사, 교수, 전업 엔지오 활동가들이 운동의 중심이 되고, 자유주의 언론에 의존하고 기업이나 국회나 정부 기관에 로비하는 등 온건한 방식이 된다.

이미 무지개행동은 구글 같은 다국적 기업의 돈을 받는 등 우경적 행보를 보이며 노동자연대 같은 급진좌파를 배척해 왔다.

그러나 성소수자 차별에 맞서는 투쟁을 만만찮게 벌이지 않는다면 문재인 정부는 계속해서 ‘사회적 합의’를 핑계대며 성소수자 차별을 유지할 것이다. 이런 문재인 정부에 기대를 걸고 협업을 말하며 급진좌파 배척에나 열을 올린다면, 성소수자 차별이 개선되기는커녕 EBS의 은하선 하차, 충남인권조례 폐지 등에서 보듯 상황이 더 후퇴할 수도 있다.

역사적 경험을 보면,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독립적인 대중 투쟁을 펼쳐야 인권이 침해되지 않고 더 나아가 실질적 개선도 이룰 수 있다. 이런 교훈이 성소수자의 권리 진전에도 예외일 수 없다.

성소수자 차별을 없애려면 문재인 정부와의 협업이 아니라 독립적인 투쟁을 강화하는 게 필요하다. 더 급진적이고 투쟁적인 성소수자 운동이 건설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