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 연대

전체 기사
노동자연대 단체
노동자연대TV

3월 31일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
한국 트랜스젠더 차별의 현실

3월 31일은 국제 트랜스젠더 가시화의 날이다. 이날은 2009년 미국에서 시작된 기념일이다. 올해에도 여러 나라에서 차별에 반대하고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당당하게 드러내자는 취지의 행사들이 열릴 예정이다. 성소수자 권리가 비교적 신장된 서구에서도 트랜스젠더에 대한 혐오와 비난은 심각하다. 최근 트럼프는 또다시 트랜스젠더 입대를 금지하고 성전환 의료 지원에 연방 예산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려 한다.

한국의 트랜스젠더들도 상황이 나쁘긴 마찬가지다. 하리수, 최한빛 등 트랜스젠더 연예인들이 미디어를 통해 스스로를 드러내고 있지만, 대다수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차별은 실태 조사조차 제대로 안 되는 실정이다. 뿌리 깊은 편견뿐 아니라 법·제도적 장벽과 이로 말미암은 경제적·사회적 차별 때문에 트랜스젠더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한국 트랜스젠더의 건강 연구’(고려대 보건과학대 김승섭 교수 연구팀)에 참여한 트랜스젠더 중 40퍼센트 이상이 ‘자살을 시도한 적 있다’고 답했다. 자살률이 OECD 1위인 한국이라지만 트랜스젠더의 자살 시도율은 심하게 높다.

또 다른 연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들은 다른 성소수자 집단에 비해서도 더 열악한 처지에 있다. 물리적 폭력이나 괴롭힘을 당한 트랜스젠더의 비율(58.6퍼센트)은 전체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했을 때(55.2퍼센트)보다 높았고, 성적 폭력이나 괴롭힘을 당한 비율(66.2퍼센트), 직장에서 조롱이나 차별·폭력을 경험한 비율(71.5퍼센트)도 마찬가지였다(전체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했을 때는 각각 61.4퍼센트, 67.7퍼센트).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주요 결과〉, 친구사이)

ⓒ이미진

높은 성별 정정 장벽

한국의 성별 정정 기준은 매우 까다롭다. 성별 정정에 관한 법률은 없지만 대법원이 예규(가이드라인)를 정해 놨다. 이 예규는 성별 정정 조건으로 의료적 요건(성전환증 정신과 진단·생식 능력 제거·성전환 수술), 미성년자 자녀 없음, 부모 동의서 등을 충족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많은 트랜스젠더들이 법적 성별 정정을 포기하거나, 매우 오랜 시간을 거쳐야 겨우 성별을 정정할 수 있다. 〈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주요 결과〉에 따르면 13.2퍼센트만이 성별 정정을 완료할 수 있었다.

다행히 최근 일부 법원에서 성기 수술을 받지 않은 트랜스젠더의 법적 성별 정정을 인정한 판례들이 나왔다. 그러나 판사나 법원에 따라 판결이 제각각인 경우가 많고 대체로는 매우 보수적이라 트랜스젠더들이 법정에서 모욕적인 처우를 받기도 한다. 2013년 서울남부지방법원장 이성호(현 국가인권위원장)는 한 트랜스젠더에게 의료적 요건이 충족됐다는 증거를 내라며 성기 사진을 제출하라는 모욕적 보정명령을 내렸다.

정정 결정이 날 때까지 1~2년을 견뎌야 한다. 그 기간 트랜스젠더들은 성전환 수술을 받고 외양도 변한 상태지만,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해 취직이나 공적 업무에서 큰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트랜스 여성에게는 군대 문제도 고통스럽다. 병무청은 입대를 면제받으려면 고환을 적출하고 오라고 강요한다. 우여곡절 끝에 병역 면제를 받아도, 몇 년 후 병역 기피자로 기소당하는 황당한 일도 벌어진다. 2014년에 병무청은 9년 전 면제받은 트랜스 여성이 ‘여자로 안 살고 있다’며 기소했다.

“본인 맞으세요?” 주민등록번호로 드러나는 차별

이처럼 법적 성별 정정 장벽이 높은 상황에서 주민등록번호와 성별의 불일치는 트랜스젠더의 일상에 큰 고통을 준다. 트랜스젠더는 휴대전화 가입과 변경, 보험 가입·상담, 투표 참여 같은 평범한 일상조차 편하게 누리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민등록번호 불일치는 취직에서 커다란 장벽이다. 적지 않은 트랜스젠더들이 주민등록번호를 요구하지 않는 일자리(4대 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를 찾고, 면접에서 당할 모욕적 상황 때문에 취직 자체를 시도하지 못하기도 한다.

취직이 돼도 사측이 트랜스젠더들의 절박한 상황을 이용해 부당한 지시를 내리거나 불이익을 주는 일도 부지기수다. 2014년 국가인권위 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의 64퍼센트가 직장에서 한 가지 이상의 차별이나 괴롭힘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이 때문에 성소수자 중에서도 트랜스젠더의 경제적 상황은 더욱 열악하다. 트랜스젠더 중 정규직은 26.1퍼센트였고(전체 성소수자 중 정규직은 44퍼센트), 비정규직(13.7퍼센트)이나 비경제활동인구(19.7퍼센트) 비율도 전체 성소수자를 대상으로 할 때보다 2배가량 높았다.(〈한국 LGBTI 커뮤니티 사회적 욕구조사 주요 결과〉, 친구사이)

막대한 성전환 비용과 경제적 어려움

성전환 비용은 건강보험이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들은 막대한 의료 비용을 버느라 허덕여야만 한다. 수백만~수천만 원까지 드는 비용을 오롯이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OECD 국가 대부분은 성전환 비용 전부 또는 일부를 건강보험에 포함하고 있다.

최근 김승섭 교수 연구팀이 발표한 〈한국 트랜스젠더의 의료적 트랜지션[성전환] 관련 경험과 장벽〉에 따르면 의료적 성전환을 포기한 트랜스젠더들은 대부분 경제적 어려움을 이유로 들었다.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의료적 조처를 포기하고, 의료적 조처를 포기해서 까다로운 법적 성별 정정 기준을 통과할 수 없고, 성별 정정을 못 해서 또다시 경제적 어려움이 커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이런 악순환을 끊으려면, 성별 정정 요건을 대폭 완화하고 성전환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늘어나야 한다. 이런 개혁을 쟁취하는 과정에서 트랜스젠더의 가시화와 사람들의 인식 개선도 함께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