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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재 노동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국민권익위원회

삼성디스플레이(주) 탕정사업장에서 일하다 퇴직 후 비호지킨림프종이 발병한 김모 씨는 탕정사업장의 유해물질 노출이 질병의 원인임을 증명하기 위해 지난 2월 대전지방노동청 천안지청에 해당 사업장의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를 보여 달라고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그러자 천안지청은 3월 12일 보고서를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보고서를 내주기로 약속한 3월 27일, 국민권익위원회 중앙행정심판위원회의 위원장(현재 위원장 공석으로 김대희 상임위원이 직무대행 중)이 직권으로 ‘정보공개 집행정지’ 결정을 통보했다며 보고서를 내줄 수 없다고 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삼성은 작업환경측정결과보고서 내용 중 “측정위치도 등의 공개를 정지할 것을” 요청했다. ‘측정위치도’는 유해 화학물질 등 시료를 채취한 개략적 위치(지점)를 간략한 도면에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지난 2월 1일 확정된 대전고등법원은 ‘작업환경측정결과 보고서는 영업 비밀에 해당하지 않고, 산재노동자나 유족, 삼성의 전·현직노동자, 나아가 사업장 인근 지역주민의 안전권과 보건권을 위해 필요한 정보이므로 공개해야 한다’고 판결을 내린 바 있다. 같은 판결문에서 ‘측정위치도’가 “근로자의 생명, 신체, 보건과 직결된 정보로서 공개되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고, “영업 비밀에 해당한다고 보기 어렵다”고 명시했다. 고용노동부도 이에 따라 정보공개처리지침을 변경하고 적극적으로 정보를 공개하겠다고 한 바 있다.

반올림과 신청 당사자는 집행정지 결정에 항의하며 이를 취소할 것을 촉구했다. 그런데도 위원회는 4월 3일 회의에서 집행정지 결정을 유지했다.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은 피해 발생 시 업무상재해임을 입증하는 책임을 피해 노동자와 유가족에게 지우고 있다. 그런데 피해 당사자가 노동조건, 작업장 환경 등과 관련한 자료를 요청해도 이를 강제할 수 있는 규정이나 수단이 없기 때문에 사용자가 제출을 거부하면 업무상 재해를 입증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산재신청을 하고도 업무상 재해를 입증하지 못해 산재불승인을 받는 비율은 2015년에는 1만 117건의 산재 신청 중 5276건(52.1%), 2016년에는 1만 301건 중 5560건(53.9%)으로 절반이 넘는다.

이런 불합리한 현실에 대한 문제제기는 계속 있었다. 현재 국회에 업무와 질병 간 연관성을 입증하는 책임을 근로복지공단이 대행하도록 하고 사업주 측이 거짓 답변이나 자료 제출 거부 등을 하면 처벌하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된 산업재해보상보험법 개정안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 집행 중지 결정은 노동자들이 사업자의 정보 공개 거부로 산재를 입증하지 못해 고통받아 온 그동안의 불합리한 현실을 외면한 조처다. 또한 직업병 피해 가족들이 정보공개 소송까지 제기하며 힘겹게 쟁취한 ‘알 권리’를 다시금 짓밟는 행태다.

반올림에 따르면 삼성반도체, 삼성디스플레이 등 삼성 계열사뿐만 아니라 SK하이닉스나 다른 반도체 회사들에서 일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백혈병, 림프종, 뇌종양, 유방암과 같은 직업성 암에 걸려 고통받고 있다.

작업장의 유해환경이 노동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해치고 있다는 의혹을 철저히 규명하는 것은 피해 노동자와 가족들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고 또 다른 피해자의 양산을 예방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이런 현실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외면하는 정보 공개 집행중지 결정을 즉각 철회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