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루서 킹 목사가 사망한 후 50년 동안 자유주의자들은 그의 정치색을 탈색하려 했다. 그러나 유리 프라사드는 킹 목사가 인종차별·빈곤·전쟁의 원인을 자본주의라고 지목한 급진주의자였다고 주장한다.


미국 연방수사국 FBI는 마틴 루서 킹 목사의 기일이었던 지난해 4월 4일 트위터 계정에 이렇게 썼다.

“FBI는 마틴 루서 킹 주니어 목사의 의로운 삶·업적·헌신을 기립니다.”

그러나 FBI는 킹 목사 생전에는 그를 “이 나라의 미래를 가장 심각하게 위협하는 검둥이”라고 딱지 붙였었다.

킹 목사는 1950~196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백 분리에 맞서 싸웠다.

[미국 남부] 흑백 분리 법은 어쩌다 보니 생긴 것은 아니었다. 이윤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을 이간질해 각개격파로 지배하기 위해, 미국 남부의 지배자들은 인종차별적 편견을 체계적으로 시행했다.

미국 북부의 정치인들은 북부에서는 흑백 분리 제도를 시행하지 않았지만 남부의 상황을 변화시키는 데는 별 관심이 없었다. 아래로부터의 거대한 압력이 없었다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 흑인들은 제2차세계대전 기간에 큰 변화를 겪었다. 많은 흑인들이 남부의 농촌을 떠나 공장과 도시로 이주했다. 그런 곳들에는 [남부의 흑인들보다] 자신감이 있는 흑인 중간계급이 많았다.

1955년 좌파 활동가이자 백화점 재봉사였던 로자 파크스는 알라바마주(州) 몽고메리시(市) 시내버스에서 버스 좌석을 [백인에게] 양보하기를 거부했다. 이 행동은 이후 1년 동안 이어진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을 촉발했다. 시민평등권 운동의 탄생이었다.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행진에서 대열에 손을 흔드는 마틴 루서 킹 목사 ⓒ출처 History.com

26세의 청년 목사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4만 명 규모 운동의 지도자로서 일약 명성을 얻었다.

킹 목사는 급진적이었으나 동시에 자유주의자였으며, 시민 불복종 철학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킹 목사는 온건한 인사로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시민평등권 운동을 [흑인들이] 미국 사회에 완전히 통합될 권리의 일부로 봤다.

버스 승차 거부 운동이 커지면서 킹 목사의 명성도 높아졌다. 기성 체제에 대한 압박이 커졌고, 결국 대법원은 몽고메리시 버스의 흑백 분리 정책이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이 승리는 미국 남부 곳곳에 파장을 낳았고, 새로운 많은 운동이 분출했다.

시민평등권 운동과 그 지도자들은 빠르게 배웠다.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요구가 온건하면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저항 없이 알아서 특권을 포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흑백 분리의 목적은 흑인을 그저 분리해 두는 것이 아니라 흑인을 차별하고 착취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1960년이 되자 학생들이 운동에 동참했다. 학생들은 남부 전역 백인 전용 식당에 연좌하는 운동을 시작했다.

행동

몇 달도 안 돼 흑인·백인 청년 수만명이 행동에 나섰다. 많은 사람들이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구타당하고 경찰에 체포돼 수감됐다.

시민평등권 운동은 비폭력 저항을 표방했다. 대체로 가난하고 비무장이었던 이들이 강력하고 중무장한 상대에 맞서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들은 이 전략이 그럴 듯하다고 봤다.

이 전략은 시민평등권 운동을 지지하던 북부의 많은 백인 중간계급들에게도 호소력이 있었다.

그러나 킹 목사의 전략에는 모순이 있었다. [이 전략에 따라,] 흑인들은 [경찰] 폭력에 직면할 때 미 연방 정부가 군대를 보내 자신들을 보호하고 흑백 분리 제도를 철폐할 것이라고 [경찰을] 위협했던 것이다.

운동이 승리를 거두면서, 운동의 지도부는 훨씬 큰 목표를 세웠다. 1963년 4월 시민평등권 운동은 대규모 시위를 벌여 알라바마주의 주요 도시인 버밍햄의 흑백 분리 제도를 철폐하고자 했다. 

전 세계가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시 당국은 미성년자 시위대에 소화전으로 물을 뿌리고 수백 명을 감옥에 가뒀다. 수도 워싱턴 DC에서 사태를 주시하던 존 F 케네디 정부는 경악했다.

이에 대응해 시민평등권 운동은 남부 전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영업을 방해해서 이윤에 타격을 주겠다고 위협했다. 또 시민평등권 운동은 긴장이 점차 고조되는 냉전 상황에서 미국이 ‘민주주의 진영’을 자처하는 것을 무색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 케네디가 남부 인종차별에 반대하는 조처를 취했다가는 그가 속한 민주당을 분열시킬 위험이 있었다.

1963년 여름 수도 워싱턴 DC에서 대규모 시위가 예정돼 있는 상황에서, 케네디는 흑인 투표권을 법제화한다는 도박을 걸었다. 케네디는 이렇게 해서 시위를 종식시키면서도 인종차별 진영 내에 긴장이 불거지지 않기를 바랐다.

‘워싱턴 행진’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킹 목사는 그 시위가 흑백 분리 제도 철폐를 축하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흑백 차별 철폐를 주저하는 ‘자유로운 미국’을 규탄하는 시위가 아니라 말이다.

그러나 법안 통과만으로는 충분치 않았다. 남부의 지배자들은 “대규모 저항”을 벌이겠다고 을러댔으며, 그 추종자들은 폭탄 테러, 사지 절단, 살해를 벌일 것이라고 떠들어 댔다. 미국 정부는 발을 더 담그기를 두려워하며 옆으로 비켜섰다.

이제 학생 활동가 대부분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은 킹 목사의 전략이 너무 온건하다고 봤다. 이들은 더 급진적인 전략으로 대응하고자 했다. 자기 방어를 위한 무장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부가 계속 [인종차별주의자들에게] 양보하자 백인들 일반에 대한 냉소가 자라났고, 많은 청년 활동가들은 이제 오직 흑인만이 진정으로 인종차별에 맞서 싸울 수 있다고 보게 됐다. 나이가 많은 중간계급 활동가들은 큰 충돌이 벌어질까 봐 겁을 먹었다.

차츰 킹 목사는 시민평등권 운동 내 급진파와 보수파의 분열을 막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보게 됐다.

북부의 활동가들은 흑인 빈민의 일자리·주택·교육 개선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였는데, 킹 목사는 이런 운동이 사태를 더 악화시킬 것이라고 봤다.

시카고 같은 대도시를 운영하던 백인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멀리 남부에서 벌어진 시민평등권 운동은 지지했지만 자기 도시에서 벌어지는 운동에는 적대적이었다.

그리고 미국 [연방] 정부는 1965년에 제정된 투표권리법 이외에는 어떤 흑백 차별 금지 법안도 입안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1964~1968년에 흑인들은 미국 북동부, 중서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거의 모든 도시에서 들고 일어났다.

1965년에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리스의 와츠 구에서 [흑인들의] 분노가 분출했을 때, 당국은 무장 경찰과 주(州)방위군 1만 5000명을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다. 34명 정도가 사망했다.

분노가 게토[흑인 빈민가]를 휩쓸면서, 학생 투사들은 점점 더 킹 목사에게서 멀어졌다.

비슷한 시기 시카고의 한 집회에서 야유를 받았던 것을 돌아보며, 킹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12년 동안 나는 빛나는 진보를 약속했다.

“나는 사람들에게 미국을, 백인 사회를 믿으라고 설득했다. 희망이 자라났다.

“그러나 [12년 후] 사람들은 우리가 했던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것을 보며 [우리를] 야유했다.

“믿지 못할 자들이라는 것이 번번이 드러난 그 사람들을 믿으라고 촉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를] 야유한 것이다.

“사람들은 그들이 순순히 [우리 말을 믿고] 품었던 꿈이 끔찍한 악몽이 된 것에 분노한 것이다.”

악몽

킹 목사는 개혁 가능성에 점차 환멸을 품으면서 인종차별의 본질에 의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본주의 경제가 가난과 [흑백] 분열을 낳는다고 결론짓고, 자본주의 경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 건설에 열의를 쏟았다.

킹 목사가 급진화하면서 지지자들 사이에 긴장이 생기기 시작했다. 킹 목사는 베트남 전쟁 반대 여론이 광범해지기 훨씬 전인 1966년에 한 연설에서 베트남 전쟁 반대를 주장했다.

그전까지 킹 목사를 영웅으로 추켜세웠던 자유주의 신문들은 이제 그를 공격했다.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은 뭘 해 보기도 전에 난관에 부딪혔다. 시민평등권 운동 지도자들은 주로남부 출신 흑인 중간계급 종교계 인사들이었는데, 흑인 빈민들과는 별로 접촉이 없었고, 백인 노동자들과는 거의 아무런 접촉도 없었다.

그들이 새 운동을 어떻게 건설할 것인지는 불명확했다.

테네시주 멤피스시(市)에서 청소 노동자 파업이 분출하면서, 킹 목사는 답을 찾게 됐다.

1968년 2월 어느 비 오는 날, 흑인 청소 노동자 에콜 콜과 로버트 워커는 쓰레기 수거 차량 뒤에서 비를 피하려 했다.

전기 합선으로 기계장치가 작동해, 두 흑인 노동자가 압사했다.

멤피스시 청소 노동자 약 1300명은 즉각 작업을 중단했다. 킹 목사는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을 일으킬 기회라고 봤다.

파업 노동자들은 시민평등권 운동에 일체감을 느꼈다. 그들이 목에 건 팻말에는 시민평등권 운동의 유명한 구호가 쓰여 있었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는 인간입니다" 공민권 운동에 영향을 받은 흑인 청소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섰다. 1968년 3월 테네시주(州) 멤피스 ⓒ출처 artsy.net

킹 목사는 이들의 투쟁을 지지해 이렇게 말했다. “요구를 쟁취할 때까지 일터에 복귀하지 마십시오.

“자유는 억압자들이 알아서 하사하는 선물이 아님을 잊지 마십시오. 자유는 억압받는 사람들 자신이 쟁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쟁취해야 합니다. 여기 함께 있는 여러분들은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며칠 안에 여러분들은 함께 멤피스시 전체를 멈추는 총파업을 벌여야 합니다.” 1968년 4월 3일 밤 킹 목사는 집으로 돌아갔고, 이튿날 백인 인종차별주의자 제임스 얼 레이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킹 목사는 미국 정부와 그 정부가 벌인 전쟁에 집요하게 반대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운동을 조직하고, 도시 전체의 총파업을 호소하는 활동가가 됐다.

운동을 시작할 때에 견줘 많이 좌경화한 것이다. 그리고 킹 목사가 급진화하면 할수록 미국 지배자들과 그 동맹들에 더 큰 위험 요소가 됐다.

오늘날 우리들은 사회주의를 위해 토론하고 논쟁하고 투쟁함으로써, 당시 킹 목사가 던진 자본주의를 대체할 사회는 어떤 종류의 사회일 것이냐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그런 세계는 혁명으로만 쟁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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