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 전 5월 5일 태어난 혁명가 카를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일컬어 “자본주의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타도하고 “각자의 자유가 만인의 자유의 조건”이 되는 사회를 건설할 잠재력이 유일하게 노동계급에게 있음을 항상 강조했다.

그러나 요즘에는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부인하는 주장이 흔하다. 불안정 노동이 늘어서, 노동자들 간 격차가 커져서, 특히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귀족’(노무현 전 대통령의 표현)이 돼서 등등.

50년 전 서구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유행했다. 1950~1960년대 장기 호황을 거치며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됐고, 이제 노동자들은 투쟁과 변혁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1968년 초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고르는 이제는 노동자 대중이 총파업 같은 행동을 할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앙드레 고르의 주장이 무색하게도, 바로 그 해 5월 프랑스 노동자 1000만 명이 파업을 벌였다. 기층이 주도해 일어난 파업이었고 당시로서는 역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었다. 3주 동안 지속된 파업은 프랑스 사회를 뒤흔들었다.

생산이 완전히 마비됐다. 노동자들이 공장을 점거했다. 몇몇 공장에서 경영진은 파업 노동자들의 허락 없이는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노동자들은 녹음기를 갖다 놓고 사용자들에게 인터내셔널가를 가르쳤다. 영화 노동자들의 파업과 영화인들의 저항으로 칸 영화제가 열리지 못했다. 인쇄 노동자들은 보수적 신문의 헤드라인과 기사 내용에 항의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낭트에서는 아예 노동자들이 도시를 통제했다. 파업위원회의 주도로 운송 노동자들이 도시의 모든 차량을 통제했고, 교사와 학생은 탁아소를 마련해 파업 노동자들의 아이를 돌봤다. 당시 낭트의 범죄율은 역사상 유례없이 낮아졌다.

당시 프랑스 대통령 드골은 이웃 나라 독일로 도망치면서 비행기 창밖으로 공장들에 붉은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봐야 했다.

전 세계적 투쟁 물결

1968년 당시 대학생이었던 영국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고(故) 크리스 하먼은 이렇게 지적했다. “1968년은 전후 자본주의 역사에서 하나의 전환점이었다. 세 겹의 위기 — 베트남에서 미국의 헤게모니 위기, 거대하게 확대된 노동계급에 직면한 권위주의적 지배 방식의 위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스탈린주의의 위기 — 가 전 세계로 퍼져 나가면서 그동안 지배적이었던 이데올로기적 합의를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세계를 뒤흔든 1968》)

1월 31일 남베트남 전역에서 미군에 맞선 무장 공세가 벌어졌다(설 공세). 미국 제국주의에 맞선 베트남 민중의 투쟁은 전 세계에서 공명을 일으켰다. 미국 국내에서는 마틴 루서 킹 암살을 계기로 흑인 반란이 일어났다. 독일에서는 미·소 양대 진영 모두에 항의하는 학생운동이 분출했다. 영국에서는 대규모 반전 시위가 잇따랐고, 북아일랜드에서는 영국의 식민 지배에 항의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전반적 운동의 고양과 급진화 속에 성차별에 맞서는 운동이 일어났다.

1968년의 격랑이 서구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제2차세계대전에서 소련이 챙긴 가장 값진 전리품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월에 민중 저항이 일어났다(프라하의 봄). 이 저항은 소련이 탱크를 보내고서야 진압됐다. 저항은 진압됐지만, 스탈린 체제가 서구 자본주의와 다를 바 없이 폭압적이라는 점이 많은 사람들에게 드러났다. 소련을 중심으로 한 공산당 운동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소련의 침공에 항의하며 거리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학생들

이밖에도 멕시코, 브라질, 인도 등지에서도 전례없이 저항이 그해 터져 나왔다.

1968년 반란은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지는 국제적 투쟁의 한 사이클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다. 주요 사건만 언급해도, 1969년 이탈리아에서는 점거와 파업이 크게 일어났다(‘뜨거운 가을’). 1970~1973년 칠레에서 혁명에 근접한 상황이 펼쳐지고 우익 쿠데타가 일어났다. 이후 그리스에서는 군사독재 정권이 무너졌고 포르투갈과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 정권이 각각 몰락했다.

이런 흐름을 보면 1968년 반란을 학생들의 낭만적 반란으로 여기는 것은 매우 일면적이다. 학생 운동이 노동자 파업의 기폭제가 되는 등 중요한 구실을 했지만, 1968년과 그 이후 반란의 진정한 특징은 마르크스가 말한 노동계급 잠재력이 세계 곳곳에서 드러난 것이었다.

이 성격 때문에, 1950~1960년대에는 주변적이었던 혁명적 주장의 경청자가 급속히 늘어날 수 있었다. 1967~1969년을 지나면서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는 혁명적 좌파 단체의 회원이 수만 명으로 늘었고, 스페인에서도 혁명적 좌파가 1975년에는 비슷한 규모로 성장했다. 영국에서도 혁명가들이 수천 명으로 늘었다.

1968년 반란의 배경

1968년의 소용돌이는 뜻밖의 일이었지만, 그 전까지 전개된 자본주의 발전의 산물이었다.

전후 장기 호황 속에서 잘 교육받은 노동자들이 대거 필요하게 되면서 대학이 증가했고 학생이 크게 늘었다. 예전에는 대학이 특권층으로 가는 길이었지만, 이제는 대학을 나와도 화이트칼라 노동자가 되기 십상이었다.

과밀한 강의실, 열악한 시설, 권위주의적 학교 당국이 강요하는 각종 규율, 기대와 동떨어진 낡은 교과과정에 학생들은 분노했다. 이는 베트남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대한 분노와 결합돼 학생 운동의 폭발을 자극했다.

호황기에 새로 노동자가 된 사람들은 처음에는 자기 조건이 그러려니 하며 참았으나 점점 불만이 쌓였다. 게다가 각국 지배자들은 점점 국제화하는 체제의 변화에 발맞춰 자국 경제의 국제 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구조조정을 벌이고 있었다.

이런 사태 전개를 배경으로 1960년대 초부터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포르투갈에서 노동쟁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영국에서는 핵무기에 반대하는 운동이, 미국에서는 시민평등권 운동이, 프랑스에서는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운동이 일어났다.

‘이데올로기의 종언’이라느니, 소비주의를 받아들여 노동계급이 소멸했다느니 하는 말의 홍수에 가려 있던 물밑의 변화가 1968년에 전면에 드러났고, 1968년의 충격은 여러 운동들을 하나로 모이게 했다.

1968년 반란의 교훈

1968년 반란은 세계를 뒤흔들고 인종차별과 성차별 같은 편견을 많이 변화시켰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지는 못했다.

지배계급이 너무 강력해서가 아니었다. 프랑스의 드골은 국민투표를 실시하려 했지만 인쇄 노동자들이 투표 용지를 인쇄하지 않으려 해서 실패했다.

노동계급 운동의 공식 체계를 주도하던 지도자들의 개혁주의가 운동의 불꽃을 차츰 꺼뜨려 나간 주된 요인이었다.

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노조 지도자들이 부분적 양보를 얻어 낸 뒤 노동자들을 한 부문씩 차례로 직장에 복귀시켰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사회당과 스탈린주의 성향의 공산당은 드골이 총선 실시를 선언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파업을 끝내라고 촉구했다. 운동의 맥을 끊는 일이었다. 투쟁은 사그라졌고, 독일로 도망갔던 드골은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후 몇 년 동안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반복됐다. 1975~1976년 영국에서는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노사 간 ‘동반자 관계’와 ‘사회적 합의’를 이루자는 데 동의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역사적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스페인에서는 ‘몽클로아 협약’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이런 배신적 행보는 노동자들의 환멸을 낳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70년대 중반 세계적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노동운동이 침체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1968년이 낳은 다른 운동들도 침체했다.

혁명적 좌파들은 꽤 성장했지만, 사태를 바꾸기엔 역부족이었다. 단지 규모의 문제는 아니었다. 마오쩌둥주의, 체게바라주의, 자율주의 등 정치적 문제도 있었다.

많은 혁명적 좌파들이 노동운동의 침체 속에서 가해지는 우경화 압력에 굴복하거나 스스로 조직을 해산해 버리며 1970년대 말 큰 위기를 겪었다.

오늘날 주류 언론은 1968년을 “일상문화 변화 과정의 한 계기” 정도로 다루고, 평범한 노동자와 청년들이 권력자들에 도전하며 정치적 문제를 제기한 것의 중요성을 애써 깎아내린다. 그러나 1968년 반란과 그 뒤 약 10년 동안 이어진 국제적 투쟁 물결은 그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영감과 교훈을 주는 위대한 경험임이 틀림없다.

추천 책

《세계를 뒤흔든 1968》, 크리스 하먼 지음, 이수현 옮김, 책갈피, 512쪽,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