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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촛불운동 10주년:
이명박 정권을 시작부터 삐걱대게 한 100만 촛불

“이명박은 물러나라!”

2008년 5월 내내 거리는 이명박 정권 항의 시위로 물들었다. 최대 100만 명이 집결한 이 운동은 정권을 실질적으로 위협하는 수준으로 발전했다. 정권 출범 100일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명박이 미국 정부에게 쇠고기 수입 제한 연령을 풀겠다고 약속한 것이 방아쇠 구실을 했다. 이 결정은 이명박 정부가 몇몇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해 다수 평범한 사람들의 건강은 거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었다. MBC 〈PD수첩〉의 광우병의 위험 보도를 보며 사람들은 분노했다.

5월 2일 2만여 명이 청계광장에 모였다. 이날 시위는 ‘이명박탄핵을위한범국민운동본부’라는 인터넷 커뮤니티가 최초로 제안했다.

시위 참가자는 매우 젊었다. 특히 청소년의 참가가 두드러졌다. 영어몰입교육, 0교시 등 이명박 정부의 경쟁 교육 강화에 진저리가 난 청소년들은 “미친 소 반대, 미친 교육 반대”를 외치며 거리로 모여들었다. 참가자의 절반 이상이 이명박 정부의 정책에 대한 분노 때문에 집회에 나왔다고 답했다(《촛불집회와 한국사회》). 미조직 노동자, 청년들도 시위에서 중요한 부분을 이뤘다. 날마다 열린 시위는 순식간에 규모가 몇 배로 커졌다.

청소년을 비롯한 대중의 자발성이 두드러졌던 2008년 촛불운동 ⓒ임수현
미국산 쇠고기 수입 결정이 불을 댕겼지만 그 바탕에는 이명박 정부와 정책에 대한 광범한 불만이 있었다.

이명박은 2007~2008년 세계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김대중 — 노무현 정부 10년에 대한 대중의 깊은 환멸 속에 등장했다. 개혁을 염원한 많은 사람들은 민주당 정부가 정리해고, 비정규직 확대, 한미FTA추진, 파병 등 온갖 시장화·친기업·친제국주의 정책을 펴는 것에 깊은 분노를 느끼며 냉소했다. 민주당도 한나라당(이명박 소속 정당)도 싫다는 분위기가 어찌나 컸던지 투표율이 낮아져, 이명박은 전체 유권자 중 겨우 30퍼센트 남짓한 지지를 얻었는데도 당선했다.

정치 권력에 맞서다

이명박 정부는 “불도저”라는 별명처럼 취임 직후부터 공세를 퍼부었다. 공기업 민영화·통폐합, 기업과 부자들을 위한 법인세 인하, 의료 산업화(민영화), 경쟁 교육 강화, 물·전기·가스 민영화, 신문사 방송 진출 허용, 대운하 건설 시도 등이 연이어 발표됐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도 한미FTA의 일환으로 그 자체가 부자들을 위한 신자유주의 정책이었다. 물가 인상도 불만을 자극하는 주요 요인이었다.

그래서 시위 첫날부터 이명박 정부 자체를 겨냥한 요구들이 등장했다. “미친 소 먹고 아파도 의료 민영화로 치료 못 받고 죽거든 대운하에 뿌려 주오”라는 말이 유행했다. 이 문구는 여러 불만이 한데 녹아 있음을 재치있게 보여 줬다.

열흘이 넘도록 집회가 계속되자 이명박 정부는 22일에 대통령 담화를 발표해 대중을 달래려 했다.

그러나 이 발표는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됐다. 5월 24일 집회의 분노와 열기는 청계광장에만 갇혀 있지 않았다. 집회 참가자들은 거리로 진출했다. 26일 행진은 1만여 명으로 시작해 3만여 명으로까지 확대됐다. 행진 대열은 “이명박은 물러나라”를 외치며 기세를 올렸다. 이 열기는 참가자들에게 큰 자신감과 용기를 불어넣었고, 촛불운동의 결정적 전환점이 됐다. 31일에는 청와대 코앞까지 진출해 이명박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6월 10일 마침내 이 운동 최대 규모인 100만 시위가 벌어졌다. 정말이지 시위대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박근혜 퇴진 운동 전까지 이 시위는 1987년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시위로 기록됐다. 당시 경찰은 차벽으로 만든 ‘명박산성’으로 광화문 일대를 가로막아 시위대의 청와대 행진을 가로막았다.

운동의 기세에 놀란 이명박은 6월 19일 청와대 뒷산에서 시위대가 부르는 ‘아침 이슬’을 들었다면서 반성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주춤거린 개혁주의 리더들

시위가 시작된 지 나흘 만에 단체 1500곳이 모여 ‘광우병 위험 미국산 쇠고기 전면 수입을 반대하는 국민대책회의’(이하 대책회의)가 구성됐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와 이명박의 등장이 사회 보수화 탓이라 여겨 침울해 하던 NGO 활동가들은 운동의 폭발성에 놀라면서도 금세 이 운동에 합류했다. 자민통 계열인 한국진보연대도 적극 동참했다. 다함께(노동자연대의 과거 이름)도 시위 첫날부터 참가해 대책회의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했다. 다함께는 우파가 압승한 대선·총선 결과가 사회 세력 균형의 진정한 변화를 뜻하지 않다고 봤고, 경제 위기로 말미암아 정권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분석·전망을 세웠었다.

거리의 분위기는 날로 뜨거워졌지만, 대책회의 내 개혁주의 지도자들은 시위 규모가 100만에 이르자 공식 정치권으로 주도권을 넘기려 했다. 6월 10일 대회에서 ‘정부가 20일까지 쇠고기 재협상에 나서지 않으면 정권 퇴진 운동도 불사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 선언을 실현할 의지도 계획도 없었다. 일부는 퇴진은 수사적 표현이었을 뿐이라며 애써 의미를 퇴색시켰다.

이명박 정부는 그 틈에 전력을 정비할 수 있었다. 이내 무자비한 공격이 시작됐다. 검찰은 광우병 쇠고기 위험을 보도한 〈PD수첩〉 제작진을 수사하기 시작했다. 시위를 이끄는 지도부와 시위 참가자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과 경찰 소환이 벌어졌다. 이를 거부한 대책회의 5인은 수배 상태가 돼 조계사로 피신해야 했다. (지난해 문재인 정부는 특별 사면 대상에 2008년 시위 관련자들을 포함하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은 참여연대 사무실을 압수수색했다.

이명박 정부는 이 운동을 계기로 단단히 교훈을 얻어 이후 한편에선 중도와 서민을 내세우면서도, 한편에선 노조와 좌파 단체를 포함한 민간인 사찰을 강화하고, 언론 장악에 열을 올리고, 집회와 시위의 자유를 제약하는 온갖 개악을 추진했다. 최근 폭로된 기무사 문건도 촛불 시위대 제압을 위한 사찰 동원에 저들이 골몰했음을 확인시켰다.

시위대의 눈치를 보며 국회 등원을 미루던 기성 야당들도 슬슬 국회 등원으로 가닥을 잡았다. 가장 늦게 운동에 발을 담근 민주당은 서둘러 등원 채비를 갖췄다. 자유주의 성향의 언론들과 학자들도 국회로 공을 넘기자고 주장했다.

개혁주의 리더들은 “재협상” 요구만 반복하다 7월 5일, “국민이 승리했다”는 (그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믿지 않을 선언을 하고서는 불매 운동으로의 전환을 발표했다. 열성적 참가자들은 이런 결정에 분노했지만 뚜렷한 대안을 찾지 못했고 그중 상당수는 ‘100만 명이 모여도 안 된다’는 식의 자신감 저하를 겪어야 했다.

그럼에도 이 운동은 이명박 불도저에 제동을 거는 구실을 했다. 당장에 수입 쇠고기 연령 제한 등 검역 조건이 강화됐다. 무엇보다 대중 운동이 우파 정권에 맞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운동에서 주요한 대열을 이룬 청년과 학생들의 정치적 각성과 급진화도 이 운동의 퇴적물이다. 2011년 폭발한 반값 등록금 운동이 그 위에서 자라난 운동의 하나였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를 두고 “언제든지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는 잠재적 시위자들이 생겼다”며 두려워했다.

교훈과 과제

당시 자유주의자들과 자율주의를 받아들이는 학자, 단체들은 대중의 자발성을 찬양하며 리더십을 폄하했다. 이런 주장은 조직 좌파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분명, 이 운동에서 보인 대중의 자발성은 눈부신 것이었다. 3개월가량 매일 거리를 촛불로 물들이는 광경은 쉽게 보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자발성, 자생성의 고취가 리더십과 대립되지는 않는다. 이 운동에도 처음 발의한 집단이 존재했고, 시위를 확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는 동력이 존재했다. 초를 구입하고, 무대를 쌓고, 행진 차량을 운영하는 일 등등은 조직적 과정이었다. 또한 보건의료단체연합의 우석균, 국민 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의 고 박상표, 서울대 우희종 교수 등 진보적 전문가들의 주장은 운동을 정당화하고 시위대에게 이데올로기적 자신감을 주는 주요한 구실을 했다.

언뜻 운동은 물 흐르듯이 벌어진 듯 보여도 자세히 보면, 운동의 향방을 둘러싼 치열한 논쟁과 투쟁이 있다. 의제를 확대할 것인가? 집회 장소를 여의도로 옮길 것인가? 행진을 조직할 것인가? 등.

따라서 대중의 자발성이 가리키는 바를 잘 이해하고 대변하느냐, 그런 바탕 위에서 전진하려면 운동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야 하는가 하는 ‘선택’의 문제가 진정한 쟁점이다.

최근 진보 진영 내 일부는 2008년 촛불 운동을 박근혜 퇴진 운동과 비교하며 선거라는 공식 정치로의 전환이 없었던 것이 한계였다고 주장한다. 당시에도 최장집 교수 등 학자, 언론인, 정치인들이 “제도 정치로의 수렴”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회와 정부를 통해 위로부터 사회를 바꾸려는 개혁주의 전략은 대중의 자주적 행동을 통한 사회 변화를 불신한다.

그러나 당시 운동에서 민주당은 완전히 찬밥 신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명박 정부가 강화한 신자유주의 정책의 기반은 민주당이 집권하는 동안 닦아온 것임을 대중은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결정적 약점은 노동계급 투쟁의 부재였다. 만일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잠재력이 발현됐더라면 그 효과는 엄청났을 것이다. 노동자들이 꼭 이 쟁점으로가 아니라 고유의 쟁점으로 비슷한 시기에 파업을 했더라도 그 효과는 비슷했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노총 지도자들은 조합원들에게 “노조 조끼 벗고 나오라”며 조직적 힘을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퇴진 요구를 극구 반대하는 NGO 지도자들은 파업은 민주노총이 알아서 할 일이라며, 파업을 호소하는 다함께를 자제시키려 했다. 민주노총은 2시간 상징 파업을 하는 데에 그쳤다.

PD계열 좌파는 대부분 매우 뒤늦게 운동에 발을 들여 영향력이 없었다. 그들은 대책회의에서 NGO나 자민통 계열이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점을 크게 의식한 듯하다.

그러나 이런 태도의 핵심은 회피로서, 오히려 운동의 주도권을 개혁주의 지도자들이 쉽게 쥘 수 있게 한다. 개혁주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는 개혁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여전히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 기대를 품고 있는 대중은 투쟁 경험 속에서 혁명적 정치가 개혁주의보다 낫다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다함께는 이 투쟁에 처음부터 뛰어들어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협력적으로 활동하면서도 비판하고 투쟁해 운동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이끌려고 분투했다. 예컨대 5월 24일 대책회의 내 온건파 지도자들은 “역풍이 불 수 있다”는 이유로 거리 행진을 꺼렸지만, 결국 다함께가 앞장서 거리 행진을 시작하는 것을 묵인할 수밖에 없었다. 앞에서 말했듯 이날의 행진은 운동이 확대되는 데서 결정적이었다.

그럼에도 다함께는 이 운동의 결정적 물줄기를 바꿔놓지 못했다. 규모의 한계, 특히 노동계급에게 뿌리 내린 정도가 아직은 얕아서 영향력이 적었기 때문이다.

혁명적 정치가 결정적 순간에 충분히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활동가들은 충분한 규모로 미리 조직돼 있어야 한다. 이 조직은 일상적 시기에도 투쟁 속에서 배우며 노동계급 속에 뿌리내리려 해야 한다. 2008년 촛불 운동은 혁명적 조직 건설의 중요성을 곱씹게 한다.

이 투쟁에 대한 더 자세한 평가와 정치적 교훈을 알고 싶다면, 《촛불 항쟁과 저항의 미래》(책갈피, 김광일 지음), ‘촛불운동과 다함께’(《마르크스21》 1호, 김하영)를 읽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