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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정상회담, 평화를 가져 올 것인가?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다고 발표된 지 얼마 안 돼, 북한과 미국·남한 사이에서 불협화음이 표출되기 시작했다.

5월 16일 북한 정부는 한·미연합공군훈련인 맥스선더 훈련 등을 이유로 남북 고위급회담에 나오지 않았다. 북한 정부는 이 훈련을 “판문점 선언에 대한 노골적 도전”이라고 규정했다.

일각에서는 이 훈련이 예년 수준이라며 북한이 괜히 호들갑을 떤다고 본다. 그러나 F-22 같은 첨단 전투기를 동원한 일련의 한·미연합훈련이 북한에 상당한 군사적 위협임은 명백하다. F-22 전투기는 유사시 미군이 북한 수뇌부를 제거하는 이른바 “참수 작전”에 적합한 기종으로 알려졌다. 그게 8대나 한국에 들어왔다.

이건 적대행위가 아닌가? 맥스선더 훈련에 등장한 미군 F-22 전투기

4월 27일 남북 두 정상은 판문점 선언에서 분명 이렇게 약속했다. “지상과 해상, 공중을 비롯한 모든 공간에서 … 일체의 적대행위를 전면 중지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그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남한이 미국과 이런 훈련을 시작했다. 북한 정부의 행동은 자국에 위협적인 연합 훈련이 진행 중인데 아무렇지 않게 남북 관계를 진전시킬 수는 없다는 메시지다.

더 중요한 메시지는 같은 날에 북한 외무성 제1부상 김계관의 담화에서 나왔다. 그는 1990~2000년대에 북·미 협상 무대에서 북한을 대표했던 고위 인사다. 김계관은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을 비롯한 “백악관과 국무부의 고위관리들”이 ‘리비아식 비핵화’,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 핵무기 외에 북한의 미사일·생화학무기 완전 폐기 등을 거론하는 것을 문제 삼았다. 미국이 북한에게 “일방적인 핵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정상회담을 “재고려”하겠다고 못 박았다. 미국의 요구가 패전국에게나 강요할 만한 수준이라는 메시지다.

김계관의 담화 발표 전에 이미 북한과 미국 간에는 비핵화 방식, 대상, 일정 등을 놓고 이견이 표출됐다. 5월 7~8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중국을 다시 방문해 중국과의 “전략적 협동”을 약속했고 비핵화도 단계적·동시적으로 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말과 행동은 모두 미국을 향한 불만을 담고 있었다. 최근 트럼프가 시진핑을 만난 후 북한 태도가 바뀌었다고 거듭 말하며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이다.

물론 지금 최근의 불협화음만을 두고 북·미 정상회담이 무산된다고 단정할 수 없다. 여전히 다음 달에 싱가포르에서 김정은과 트럼프가 만나서 함께 사진을 찍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최근 상황은 오히려 6월 북·미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와 평화 체제로 가는 길이 온갖 변수로 가득 찬 험로일 수 있음을 예시적으로 보여 주는 것 같다.


북·미 정상회담 성공 여부에 쏠린 시선들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 남북 갈등이 아니라 화해·협력을 바라는 한국민들의 염원이 확인되는 계기였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남북 정상회담 지지 여론은 그것이 성취한 것에 대한 지지라기보다 이를 계기로 실질적인 변화를 성취했으면 하는 기대에 더 가깝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2000년 남북 정상회담 직후의 그것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은 (비록 1994년 김영삼 정부 때 김일성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무산된 바 있지만) 분단 이래 최초의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그만큼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커다란 기대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2000년 당시 많은 좌파들이 세계화론의 여러 좌파적 버전들을 수용해,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전쟁은 과거지사라고 봤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제국주의 국가들 간의 경쟁은 한반도 문제의 핵심 원인이 아니었다. (제3세계에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강요하는) 미국과 (이에 저항하는) 북한 간의 대립이 핵심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맥락 속에서는 남북(민족) 공조로 미국의 압력을 이겨내고 한반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 진보·좌파적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들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에 20년 가까이 시간이 지나면서, 남북 두 정상이 만난다고 해서 한반도에 긴장이 항구적으로 해소되고 평화가 달성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 분명해졌다. 무엇보다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국가들, 특히 미국과 중국 간의 갈등이 완연하게 발전했고 이 점이 한반도 상황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 됐다.

이 점은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여권 인사들도 인정하는 바다. 그래서 청와대는 처음부터 4월 남북 정상회담은 6월 북·미 정상회담으로 가는 “길잡이”라고 강조해 왔다. 이 점 때문에라도 지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북·미 정상회담의 성사와 그 성공 여부에 쏠리고 있다.


“영구적 비핵화” 대 “벼랑끝 전술”

트럼프는 자신의 측근인 국무장관 마이크 폼페이오를 평양에 두 차례나 보냈다. 이를 보아, 트럼프 정부는 북·미 협상에 한동안 집중하려는 것 같다. 게다가 최근 더욱더 혼란해진 중동 상황을 의식하며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을 것이다.

진보·좌파 일각에서는 “북한이 핵무력 완성 선언으로 자신감을 갖고 상황을 주도한다”고 여긴다.

분명 북한 정부는 핵무기를 미국과의 협상 테이블을 여는 지렛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지난해 수많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과시적으로 진행해 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북한이 주변의 막강한 제국주의 국가들에 둘러싸인 처지임을 가릴 수는 없다. “북한 국내총생산은 한국의 2퍼센트 정도다. 북한 전체의 경제 규모가 대전시의 ‘지역내총생산(GRPD)’에도 약간 못 미친다.”[1]

북한 경제는 최근에 강화된 대북 제재로 어려움이 가중되고 있었다. 지난해 12월 조선로동당 대내 기관지 《근로자》는 제재 때문에 무역 거래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외국의 무역상이] 일절 식료 생산 설비 및 자재들을 수출할 수 없으므로 무역 거래를 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다.” 원유 수급이 어렵다고도 밝혔다. “연유 판매소[주유소]만 보아도 다른 단위들은 적들의 제재로 [판매가] 멎었다.”

따라서 이런저런 상황을 감안한다면, 여전히 북한 김정은 정권의 목적은 생존일 수밖에 없다. 냉전 종식 이후, 그리고 지금도 북한이 이른바 “벼랑끝 전술”을 동원하는 까닭이다.

북한 정권 같은 제3세계 민족주의 정권은 제국주의의 협박에 저항하지만, 그 저항의 목적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주권을 온전히 행사할 공간을 확보하는 데 있다. 그래서 과거에 많은 민족주의 정권들이 체제 안전 보장, 서방 경제에의 접근 등을 조건으로 결국 제국주의와 타협했다.

김정은도 체제 안전을 약속받고 경제 회복에 필요한 서방 자본 유치가 가능해진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질서에 타협할 의사가 있을 것이다. 비핵화를 대가로 얻어내고자 하는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는 중국에 대한 과도한 경제적 의존으로 북한에 대한 중국의 정치적 입김이 커질 우려를 완화시킬 균형추로도 여겨질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북한의 협상 테이블은 병원 무균실처럼 외부와 완전 차단된 조건 속에서 열리는 게 아니다. 예컨대, 4월 남북 두 정상이 종전선언에서 중국을 빼기로 했다는 소식에 중국 정부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5월 4일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직접 이렇게 말했다. “한반도 문제의 정치적 해결을 위해 적극적인 역할을 할 준비가 돼 있다.” 중국이 한반도 문제에 관여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하는 데서 드러나듯이, 북·미 협상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치열한 각축전이라는 맥락 속에서 열린다. 그리고 이 협상 테이블 바깥의 일들이 협상 자체에 영향을 미친다.

불투명한 미래

지난 사반세기 동안 미국이 패권 유지의 수단으로서 북한을 집요하게 악마화하며 괴롭혔듯이, 트럼프 정부는 북·미 협상 중에도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낳는 국제 정세의 변화를 주되게 고려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북·미 협상의 장래는 근본에서 불투명하다.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 개최가 “최대한의 압박” 덕분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리고 폼페이오, 볼턴 같은 대중·대북 강경 인사들을 외교·안보 책임자로 임명했다. 최소한을 내주고 최대한을 얻기 위한 ‘찍어 누르기식 협상’을 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자 한 것 같다.

이란 핵협정의 운명도 북·미 협상의 미래에 시사하는 바가 많다. 폼페이오는 국무장관에 취임하면서 미국 이익을 우선하는 “거친 외교”를 하겠다고 공언했다. 그 거친 외교의 첫 행보가 바로 이란 핵협정 탈퇴였다.

트럼프 정부는 이란 핵협정을 던져 버리면서, 이것이 북한에 주는 메시지라고 했다. 즉, 이란 핵협정을 파기한 트럼프로서는 북한과의 새 합의가 그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포괄적인 내용을 포함해야 한다. 트럼프는 북한을 상대로 이란 핵협정보다 더 확실하고 급속한 핵물질·핵탄두의 반출을 원한다. 트럼프 정부가 북한의 “영구적 비핵화”를 강조해 온 것도 10~15년 후 이란의 핵개발 제한을 풀어 주는 이란 핵협정의 “일몰 조항”을 의식해서다.

트럼프 정부의 강경한 입장을 대변해 온 자가 바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존 볼턴이다. 그는 일관되게, ‘선 핵 포기와 후 보상’이라는 이른바 리비아식 비핵화를 요구했다. 먼저 북한 핵탄두를 비행기에 실어 미국으로 보내라고까지 말했다. 대량살상무기 프로그램 폐기 외에 인권 문제도 테이블 위에 올리겠다고 했다. 북한에 백기 투항을 요구하는 셈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약속 불이행과 생트집을 경험한 북한으로선, 트럼프 정부의 말만 믿고 비핵화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계속 단계적 조처를 강조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 존 페퍼는 이란·북한 같은 “불량국가”의 정권교체를 원하는 볼턴이 내심 북·미 협상 결렬을 원하는 게 아니냐는 합리적 물음을 던졌다.[2]

일각에서는 볼턴 같은 강경파와 트럼프를 애써 구분한다. 그러나 비록 트럼프가 리비아식이 아닌 트럼프식 비핵화 모델을 제시한다고 하지만, 지난해에 “화염과 분노” 같은 무시무시한 말을 쏟아낸 당사자였다. 그리고 비핵화의 핵심 내용(CVID 등)이 볼턴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도 않다. 5월 18일 트럼프는 북·미 정상회담이 열리기를 희망한다고 말하면서도, 김정은을 향해 협상을 하지 않으면 리비아 카다피와 같은 운명을 맞을 것임을 암시하기도 했다. 22일에는 여건이 안 맞으면 정상회담을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5월 22일 백악관에서 만난 문재인과 트럼프 ⓒ출처 청와대

북·미 협상이 잘 되기를 바라는 전문가들 중에는 이란식이나 리비아식 비핵화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비핵화 방식, 즉 “선 안전 보장과 후 비핵화”를 추천한다. 그러나 이조차 2014년 러시아가 안전 보장 약속을 깨고 크림 반도를 병합한 사실 앞에 빛이 바랜다.

어떤 절차와 방식이 됐든, 핵실험을 6차례나 실시하고, 대륙간탄도미사일 시험 발사까지 단행한 북한의 비핵화는 이란, 리비아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어렵다. 북한 핵사찰이 역사상 최대 규모일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이다.

따라서 2018년 현재 북한과 미국이 맺을 새 비핵화 합의는 합의 도달, 이행, 검증 등 모든 면에서 길고도 불확실한 과정이 될 것이다.


평화협정과 미국

우여곡절 끝에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에 이르러 한동안 긴장이 가라앉고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되도, 근본적인 문제는 남는다. 강대국 미국의 약속 또는 선의를 믿고 핵무기를 포기한 이후, 그 약속(선의)이 계속 지켜질 수 있느냐는 물음이다. 자본주의 국가들의 외교 관계에서 이 점을 완전히 보장할 수단은 전혀 없다.

자본주의가 워낙 역동적인 체제인 탓에, 각국 국력에 비례한 국제 질서는 안정적이지 못하다. 특히 제국주의 국가들의 경쟁이 낳는 국제 정세의 변화 때문에, 미국이 평화협정을 지키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예컨대, 1953년 한국전쟁을 마무리하면서 맺은 정전협정이 있다. 정전협정상 한국에는 새로운 무기 반입이 금지돼 있었다. 그러나 정전협정이 체결되자마자, 미국은 이것부터 어겼다. 한국에 전술 핵무기까지 배치했다. 1991년 공식 철수를 선언할 때까지 한때 한국에는 미국 전술 핵무기가 최대 1000기 가까이 배치돼 있었다. 이것은 북한에게도 위협이었지만, 주로 중국 등과의 냉전 제국주의 경쟁을 의식한 조처였다.

남북 공조만으로 미국의 약속 이행을 담보할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이 미국만이 아니라 중국 같은 주변 강대국, 심지어 유럽연합이나 유엔까지 포함된 평화협정안을 제기한다. 즉, 한반도를 비핵(지대)화하는 대신에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강대국들이 한반도의 안전을 집단적으로 보장한다. 그리고 강대국들의 상호 감시·견제 하에 평화협정의 약속 이행을 보장받는다는 발상이다.[3]

결국 이런저런 버전의 평화협정 구상들 모두 현존 제국주의 세계체제와의 타협을 모색하는 것이고, 주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조정과 합의라는 기반 위에 한반도 평화를 이룩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과의 약속도 번번이 어겼다는 점 앞에서 이런 구상의 한계가 드러난다.

예컨대 1989~1990년 독일 통일 당시, 미국은 소련에게 서방의 군사동맹체인 나토가 동유럽으로 확대돼 소련 코앞까지 갈 일은 없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받고 소련은 독일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독일에 주둔하는 것을 용인했다. 하지만 1990년대 후반에 미국은 이 약속을 파기했다. 1999년 헝가리·폴란드·체코를 시작으로 미국은 동유럽 국가들을 속속 나토에 가입시켰다.

이 사례는 중국이 눈여겨볼 반면교사 사례다. 평화협정 체결 이후에도 주한미군이 한국에 남아 있을 가능성 때문에라도 말이다.

거인들의 충돌

이종석, 문정인 등 친여권 전문가들은 한반도 평화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면, 동북아 국가들과 미국이 모두 참가하는 다자안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안보기구가 동북아에 세워진다고 해도, 미국과 중국이라는 두 거인이 그 기구 안팎에서 충돌하는 것을 방지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한과 미국 등이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하는 게 평화협정 유지의 또 다른 보장책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많다. 대표적으로, 문정인 청와대 외교안보특보가 4월 25일 한 독일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대동강변에 트럼프 타워를 세우거나 미국 대기업들이 북한에 투자하는 것이 미국이 북한 정권에 취할 수 있는 중요한 체제 안전보장책[이다.][4]

그러나 경제적 상호 의존이 전쟁을 방지하고 평화를 보장한다는 생각은 역사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설득력이 없다. 지정학적 경쟁을 자본주의 경제와 별개의 것으로 보는 통속적인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다. 경제적 상호 의존이 경제적 경쟁을 배제하는 것도 아니고, 지정학적 경쟁도 자본주의 경쟁의 다른 형태일 뿐이다.

당장 미국과 중국처럼 경제적으로 서로 크게 의존하는 최대 규모 경제들이 전쟁으로 치달을지도 모를 갈등을 빚는 것을 보라. 하물며 중국과는 비교도 안 되게 경제 규모가 작은 북한을 상대로 훗날 미국이 평양의 트럼프 타워 때문에 전쟁을 주저하리라 장담할 수 있을까?

제2차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미국 대기업들의 공장이 있는 독일 대도시들을 폭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오히려 같은 시기에 미국은 경제적으로 밀접한 관계였던 일본과 태평양의 주인 자리를 놓고 격돌했다.

따라서 그 어떤 방식과 수단을 동원하든지 간에, 현존 제국주의 체제 안에서 평화협정은 항구적 평화를 보장하지 못한다. 미국과 중국 등의 제국주의 갈등이 지속되는 한, 미국의 동맹, 핵전력은 그대로 동아시아에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태로 한반도와 그 주변에서 항구적 평화는 요원하다.

일부 여권 인사들은 내심 평화협정을 맺으면 미·중 갈등이 한반도가 아니라 대만과 남중국해 등지에서 벌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반도가 그 자장에서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1930년대 대불황 이래 세계경제가 가장 심각한 경제 위기에서 10년째 헤어나오지 못한 와중에,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앞으로도 더 악화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역사적 교훈

정부 당국 간 협상이 진행되면서, 진보·좌파 내 많은 사람들이 그 협상에 기대를 건다. 그러다 보니 협상 상황에 따라, 기층 활동가들도 일희일비하게 되는 것 같다.

또한 이런 상황은 평화 협상에 반대하는 소수 강경파들에 맞서 국민 다수가 단결해 평화 협상을 뒷받침하자는 생각이 강해지는 쪽으로 발전하기 쉽다. 〈한겨레〉 5월 17일자 사설이 이런 경향에 호소하는 것 같았다. 제목이 “강경파 제지해야 ‘북-미 정상회담’ 성공한다”였다. 주로 미국과 북한 내 소위 강경파들이 문제라는 주제였지만, 이는 쉽게 한국 내에서도 한 줌의 반동에 맞서 평화를 위해 계급을 가로질러 단결하자는 주장과 연결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발상의 가장 발전된 형태가 바로 1930년대 스탈린주의 공산당의 인민전선 전략이었다. 당시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전쟁을 준비하는 게 명백해지자, 소련 독재자 스탈린은 영국·프랑스와 군사동맹을 맺고자 애썼다. 그 결과, 1935년 소련은 프랑스와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했다.

스탈린은 프랑스와의 상호방위조약을 공고히 하려고 각국에서 정치적 동맹자를 확보하고 싶었다. 그래서 스탈린은 각국 공산당에게 인민전선, 즉 파시즘에 대항해 부르주아 정치 세력까지 포함한 모든 민주 세력의 대연합을 이루라고 촉구했다. 그게 파시즘과 전쟁을 막을 현실적 방도라고 했다.

분명, 인민전선은 선거에서는 성공을 거뒀다.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승리해 정부를 구성했다. 그리고 인민전선의 성공에 열광한 일부 자유주의적 지식인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스탈린의 소련 내 대량 숙청에까지 눈을 감았다.

그러나 부르주아 정당과 동맹하는 정책은, 결과적으로 노동계급이 반동에 저항할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하게 마비시켰다. 1936년 프랑스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파업 물결이 일어났지만, 프랑스공산당은 파업 노동자들을 향해 “파업을 끝내는 법을 알 필요가 있다”고 윽박질렀다. 스페인에서는 파시스트와의 내전이 벌어졌지만, 공산당은 부르주아 공화정부의 재건과 방어를 우선하면서 노동자들의 혁명적 투쟁을 억눌렀다. 결국 스페인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지원한 파시스트가 승리했다. 프랑스와 스페인 등지에서 인민전선은 실패로 끝났고, 노동계급의 사기는 결정적으로 떨어졌다. 이후 제2차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더 끔찍한 재앙이 닥쳤다.

같은 일이 오늘날에 재현될 것이라고 주장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역사적 경험에서 교훈을 이끌어내야 한다.

노동자 운동의 많은 지도자들이 문재인 정부가 노동 문제에서는 많이 불만족스럽지만, 평화 문제에서는 정말 잘한다고 여긴다. 이런 인식이 어떤 실천으로 귀결될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중재자 문재인?

그런데 부르주아적 개혁주의 정부인 문재인 정부가 과연 평화 문제에서 잘하고 있는 게 맞을까? 최근, 평화협정을 맺어도 주한미군은 철수할 수 없다는 그의 얘기를 떠올려 보자. 그는 여전히 대중의 항구적 평화 염원과 한미동맹 강화 필요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5월 14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의 초청 강연회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 그는 참석한 민주노총 간부들을 향해 북한도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않고,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은 중국을 견제하는 구실을 해야 하니 주한미군 철수를 요구하지 말라고 강조했다. 평화 문제에서 문재인 정부에 협력해야 한다고 여기는 한, 기층 운동은 이처럼 불필요한 타협 압박을 계속 받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문재인 정부가 중재자 구실을 하길 기대하지만, 이는 서로 대등한 상대방 사이를 중재하는 게 아니다. 중재자로서 문재인 정부는 한쪽으로 기울어 있다. 한미동맹의 틀 속에서 미국의 대북 제재 유지에 보조를 맞춰 가며, 한·미연합훈련도 지속하고, 때로는 북한에 자중하라고 미국과 함께 소리치는 구실을 할 것이다.

물론 혁명적 좌파는 한반도 평화 운동에서 평화를 바라는 여러 세력과 기꺼이 함께할 수 있다. 이를 위해 평화협정 요구를 비판적으로 지지할 수 있다. 평화 운동의 실천 속에서 항구적 평화를 이룰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을 설명할 기회와 공감대를 얻기 위해서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일 순 없다. 제국주의는 자본주의 체제의 동역학에서 비롯했고, 따라서 제국주의를 끝장내려면 자본주의의 이윤 체제를 마비시킬 수 있는 노동계급의 계급투쟁이 전진해야 한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민족 화해를 위한 국민적 단결을 중시하는 민중주의가 아니라 계급과 계급투쟁을 중시하는 혁명적 좌파가 제 구실을 해야 한다.



[1] 이종태, 《햇볕 장마당 법치》, 개마고원, 2017, 7쪽.

[2] https://fpif.org/the-bolton-administration-has-already-begun(검색일: 2018년 5월 17일).

[3] 이삼성, 《한반도의 전쟁과 평화》, 한길사, 2018, 785~786쪽 참조. “한반도 평화협정이 발효된 뒤 … 협정을 위반한 일로 분쟁이 발생할 때 이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4국간 기구가 필요하다. … 이런 기구를 운영해서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고, 중국은 미국을 견제하는 가운데 남북한이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주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4] 〈연합뉴스〉. 2018년 4월 27일자 보도.